밥 먹으러 한번 갈게
돌이켜보면 내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들의 아버지는 모두 선생님이셨다. 교육자의 올바른 훈육 아래 자랐을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과 달리, 그 녀석들은 하나같이 공부와는 담을 쌓은 개차반들이었다. 기행(奇行)은 일상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순수했다. 나는 수도 없이 그들의 집을 드나들며 추억을 쌓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도 그들의 아버지를 실물로 본 적이 없다. 늘 교육 현장에서 남의 자식들을 훈육하느라 바쁘셨던 걸까. ‘선생집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그들에게 일종의 면죄부처럼 작용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동업계 자식이라는 암묵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그들의 불성실함을 너그럽게 눈감아주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의 그늘 아래, 제멋대로 그러나 즐겁게 어울려 다녔다. 하지만 시간은 각자의 길을 갈라놓았고, 대부분의 인연은 희미해졌다. 1999년 12월 31일, 남산타워에서 만나자던 중학교 친구들과의 약속은 나부터가 나가지 않았으니 지켜졌을 리 만무하다. 오직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집 아들’ 한 녀석과 지금껏 간헐적으로 연락을 이어오고 있을 뿐이다.
“야, 너 어제 동문회 왜 안 나왔냐?” 오후 늦게, 식당 주인이자 건물주가 된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문회? 내가 거길 왜 가냐. 난 졸업도 안 했는데.” 내 대답에 녀석은 껄껄 웃었다. “새삼스럽게. 그래도 네 동기들인데 얼굴은 봐야지. 김 변호사, 박 원장, 최 전무… 다들 한가닥씩 하고 살아. 너만 빼고 다 잘 나간다, 인마.”
농담 섞인 그의 말끝에 깊은 한숨이 묻어 나왔다. “부럽냐? 부러워하지 마라. 어제도 가게 문 닫고 혼자 소주 마시다 울었다, 내가. 이놈의 요식업, 정말 보통 노가다가 아니야.”
나는 그들의 성공이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 혼자 운다는 그의 고백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삭제된 거나 진배없다.’ 2학년 때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갔으니, 치열한 3학년의 추억도, 졸업의 감격도 내겐 없다. 동문회는 나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그가 중계해 주는 성공 신화는 내 삶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야, 그래도 대단하다, 너희들은.” 나는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은 무슨. 이제 다들 은퇴할 나이야. 전문직 몇 빼면 그냥 비슷비슷한 노인네들이지. 사는 게 뭐 있냐.” 녀석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인생에 대한 피로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한 번도 그들의 삶을 부러워한 적이 없다. 부족하게 살아왔기에,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도 없었다.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는 말처럼, 나는 명예나 지위라는 음식의 맛 자체를 몰랐다. 그래서 누가 돈을 벌고 명성을 얻었다고 해서 시기심이 일지 않았다. 해탈한 건가.
가끔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단호하게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하지만 굳이 돌아가야만 한다면, 나는 학창 시절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해보고 싶다. 좀 제대로.
입시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그 시절의 친구들이 외면했던 진짜 공부. 하늘과 땅을 잇는 원리와 체계를 이해하는 공부 말이다. 뒷자리에서 무협지를 읽으며 세상을 조롱하던 대신,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즐거움을 누려보고 싶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잖아?”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이미 늦었다. 그리고 딱히 아쉽지도 않다. 나는 앞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방식대로, 게으르고 느리게, 목표의식 없이 살아갈 것이다. 나름 성공한 내 친구가 홀로 소주를 마시며 우는 밤, 나는 아마도 재미없는 책을 뒤적이다 스르르 잠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