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頌歌)
인생이라는 서가(書架)에는 유독 손이 자주 가는 책들이 있다. 시간의 먼지가 옅게 쌓일만하면 다시 꺼내어 첫 장을 넘기게 되는, 그리하여 나의 다른 시절과 다른 감정의 흔적이 겹겹이 포개어진 이야기들. 내게는 <어린 왕자>의 글귀와 <화양연화>의 복도, 그리고 <헤어질 결심>의 안개가 바로 그런,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 머무르게 되는 풍경이다.
얼핏 이 셋은 너무도 다른 세계처럼 보인다. 어린아이의 순수를 담은 동화와 닿을 수 없는 사랑을 그리는 어른들의 비가(悲歌), 그리고 한 남자의 완전한 붕괴를 다룬 미스터리. 하지만 나는 이질적인 세 편의 이야기 속에서 기이할 정도로 닮아있는 하나의 시선을 발견한다. 그것은 세상의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소리 내어 말해지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쓸쓸하고도 명징한 진실에 대한 응시다.
모든 것의 시작은 <어린 왕자>에 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단다”라는 비밀을 알려준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이 문장은 더 이상 동화가 아닌, 삶의 가장 아픈 진리를 담은 경구(警句)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수많은 장미와 똑같이 생긴 꽃 한 송이가 그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은, 함께한 시간과 서로에게 들인 정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관계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눈에 보이는 것들의 화려함에 속아, 마음을 들여 길들인 존재의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어른이 되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 세계의 복도에서 <화양연화>의 두 남녀, 차우와 수리첸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사랑은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로 고백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텅 빈 저녁을 국수 한 그릇으로 채워주고, 좁은 복도에서 몸을 비껴가며 잠시 스치는 옷깃으로, 어깨에 기댄 채 뱉어내는 낮은 한숨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욱 애틋하고,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에 영원하다. 차우가 앙코르와트의 낡은 돌기둥에 묻어버린 비밀은, 마침내 마음으로 보아야만 했던 보이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가장 완벽한 장례식이다. 우리는 그들의 어긋난 시간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가장 완전해진 감정의 형태를 목격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안개 자욱한 산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가 만난다. 만약 <화양연화>가 침묵의 왈츠라면, 이들의 이야기는 격렬한 파도 소리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해준의 이 절규는, 눈에 보이는 증거와 논리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던 한 남자가, 결코 증명할 수 없는 마음의 실체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보여준다. 서래는 자신을 영원히 사랑하게 할 방법으로, 스스로를 ‘미결 사건’이라는 보이지 않는 진실로 만들어 바닷속에 묻는다. 해준은 이제 그녀를 찾기 위해, 증거가 아닌 마음으로 영원히 그 바다를 헤매야만 한다. 길들인다는 것의 가장 잔인하고도 가장 완전한 형태다.
<어린 왕자>의 작은 행성에서, <화양연화>의 홍콩 골목에서, <헤어질 결심>의 푸른 바다에서, 나는 같은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당신의 마음이 길들인,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말을 하고 무수한 관계를 맺지만, 정작 삶을 지탱하는 가장 깊은 기둥은 침묵 속에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슬픔을 알아보는 눈빛, 목적 없이 함께 걸어준 시간, 차마 전하지 못해 마음속에 비밀로 남은 진심.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진짜 실체일 것이다.
오늘 밤, 나는 또다시 이 이야기들 속을 거닐 것이다. 그것은 낡은 필름을 돌리고 닳아빠진 책장을 넘기는 행위를 넘어, 세속의 소음에 무뎌진 나의 감각을 다시 길들이는 의식이다. 눈을 감고 마음으로 보아야만 비로소 선명해지는, 내 인생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한 조용한 송가를 부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