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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세권 - 슬리퍼 신고 찾아가는 일상의 소확행

by 임선재

아침에 눈을 뜨고 슬리퍼를 신은 채로 집을 나섰습니다. 겨우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까요? 이미 향긋한 커피 향이 코끝을 자극합니다. 며칠 전부터 인사를 나누던 바리스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아메리카노 한 잔이죠?" 하고 반갑게 말을 건넵니다. 커피를 받아 들고 조금만 더 걸으면 작은 빵집에서 갓 구운 크루아상의 버터 향이 가득합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오늘 새로 만든 단팥빵을 맛보라며 작은 조각을 건네줍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다시 슬리퍼를 신습니다. 편의점에서 필요한 생활용품을 사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정리한 뒤, 헬스장에서 가볍게 땀을 흘리는 것까지. 모든 것이 집 근처 몇 백 미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동차 키를 만질 일도, 지하철 카드를 챙길 일도 없이 하루가 흘러갑니다.


이처럼 '슬리퍼'만 신고도 일상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한 생활권을 우리는 '슬세권'이라고 부릅니다. 휴식과 일상의 경계가 흐려진 이 작은 동네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행복의 형태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내 삶의 반경 500미터, 슬세권의 일상

요즘 도시의 풍경을 살펴보면 슬세권이 생활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최근 이사를 결정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슬세권'이었습니다.

"집 근처 300미터 안에 카페 세 곳, 마트 두 곳, 그리고 작은 서점이 있어. 게다가 동네 병원도 있고 헬스장까지 걸어서 5분이야. 월세가 조금 비싸도 이 동네로 결정했어."

그는 매일 아침 집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퇴근 후에는 동네 서점에서 책을 읽거나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합니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대부분의 생활이 가능하니 삶의 질이 훨씬 높아졌어"라고 그는 말합니다.


또 다른 지인은 집에서 단 3분 거리의 헬스장을 다닙니다. "그 전에는 일이 바빠서 항상 운동을 미루곤 했는데, 이렇게 가까우니 핑계를 댈 수가 없더라고. 운동을 마치고도 바로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준비할 수 있으니 정말 좋아."


직장 동료는 퇴근 후 슬리퍼 차림으로 동네 카페에 들러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잔을 나누곤 합니다. "회사 근처 번화가는 항상 북적이고 시끄러운데, 집 근처 작은 바는 조용하고 편안해. 단골이 되니 사장님도 내 취향에 맞는 칵테일을 추천해주시고."


이들에게 슬세권은 단순한 생활의 편리함을 넘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매일의 소소한 순간들이 모여 삶의 질을 결정한다면, 슬세권은 그 순간들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공간적 배경인 셈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찾는 나만의 취향

슬세권은 단순히 편의시설이 가까운 주거 지역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을 담은 생활 방식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집 근처에서 보내는 시간은 결국 자신의 삶을 어떻게 채우고 싶은지에 대한 선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네 작은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는 사람은 대형 마트의 빵 코너보다 그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빵을 만드는 사장님과의 소소한 대화가 하루의 활력이 될 수도 있고, 매주 새롭게 선보이는 계절 빵을 기대하는 설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동네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안정감을 소중히 여깁니다. 익숙한 의자, 창가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조용한 대화 소리가 주는 편안함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한 지인은 슬세권의 작은 꽃집을 자신만의 위안처로 삼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 근처 꽃집에서 계절 꽃을 사. 꽃집 주인이 내 취향을 알고 있어서 항상 좋은 걸 골라주시거든. 그 꽃들로 집을 장식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비싼 취미는 아니지만,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야."


슬세권의 핵심은 단순히 '편리함'을 넘어, '내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에서 삶의 작은 행복을 찾는 일'에 있습니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화려한 곳이 아니어도, 내 주변의 작은 공간에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슬세권이 우리에게 주는 진짜 가치입니다.


시간의 풍요를 가져다 주는 슬세권

슬세권의 또 다른 큰 매력은 바로 '시간'입니다. 출퇴근길에 소모되는 시간, 필요한 것을 사러 멀리 가야하는 시간, 이 모든 것들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내 것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민들의 평균 출퇴근 시간은 하루 약 2시간에 이른다고 합니다. 주 5일을 일한다면 한 달에 약 40시간, 1년이면 거의 500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이동하는 데만 사용하는 셈입니다. 슬세권에 사는 것은 이런 시간의 낭비를 최소화하고,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쓸 수 있게 해줍니다.


"전에는 하루에 3시간 가까이 출퇴근에 썼어요. 지금은 재택근무도 가능하고, 필요할 때만 회사에 나가는데, 그때도 30분이면 충분해요. 그 덕분에 아침에 조금 더 여유롭게 일어나서 동네 산책을 하거나, 저녁에는 취미로 드로잉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죠."


슬세권의 가치는 단순히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밀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모두 가까이 있으니, 하루의 일과를 효율적으로 계획할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여유 시간이 생기면 즉흥적으로 카페에 들러 책을 읽거나, 동네 요가 클래스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사람이 가장 충만한 삶을 산다"고 말했습니다. 슬세권에서의 삶은 바로 그런 태도를 실천하는 방법일지 모릅니다. 더 먼 곳을 찾기보다, 가까운 곳에서 충분히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의 일상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슬세권의 마법

슬세권이 만들어낸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대형 쇼핑몰이나 유명 상점에서는 물건을 사는 것이 전부지만, 슬세권의 작은 가게들에서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더해집니다.

단골이 되면 카페 주인은 나의 커피 취향을 기억하고, 빵집 사장님은 새로 나온 메뉴를 먼저 추천해 줍니다. 편의점 알바생과는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고, 동네 서점 주인은 내 독서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주기도 합니다.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소소한 대화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물합니다.

"한 달 전부터 우리 동네 작은 식당에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사장님이 이제는 제가 들어가면 반갑게 맞아주시고, 오늘은 뭐가 맛있는지 추천도 해주세요. 지난번에는 '단골 서비스'라며 작은 반찬을 더 내주셨는데, 그게 너무 감동이더라고요. 그 식당에 가는 게 이제 하루의 작은 기쁨이 됐어요."


슬세권의 관계는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몸으로 경험하는 관계'라는 개념과도 닮아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진정한 관계는 언어만이 아닌, 몸으로 느끼고 교감하는 경험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했습니다. 슬세권에서의 관계는 단순한 고객과 상인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 대 사람의 소소한 교류로 이어집니다.

이런 관계는 도시 생활의 익명성과 고립감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웃과의 연결은 우리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줍니다. 마치 작은 마을 공동체처럼, 슬세권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가고 배려하며 살아갑니다.


대도시 속 작은 마을, 슬세권의 매력

슬세권은 대도시의 편리함과 작은 마을의 친밀함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도시의 복잡함과 바쁨 속에서도,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작은 동네 안에서 사람들은 조금 더 느린 삶의 리듬을 찾아갑니다.

밀라노의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는 "미래의 도시는 '15분 도시(15-minute city)'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15분 도시란 집에서 걸어서 15분 이내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도시 설계를 말합니다. 슬세권은 바로 이런 도시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작은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슬세권은 또한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자동차 사용을 줄이고 걷기를 늘리면 환경 오염이 감소하고, 개인의 건강도 증진됩니다. 슬세권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루에 몇 천 보씩 걷게 되고, 이는 일상적인 운동 효과를 가져옵니다.

"슬세권에 살기 시작하면서 걷는 습관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조금만 멀어도 차를 타곤 했는데, 지금은 동네 산책 겸 걸어서 장을 보러 가요. 걷다 보면 새로 문을 연 가게도 발견하고, 계절의 변화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체중도 조금 줄었고, 기분도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슬세권은 이처럼 개인의 생활 습관부터 도시의 지속 가능성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대도시의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마치 작은 마을에 사는 것처럼 편안함과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슬세권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슬세권 라이프의 현실적 고민들

물론 슬세권 생활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고민과 한계도 존재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주거 비용입니다. 편리한 위치에 있는 슬세권 지역은 대체로 임대료와 주택 가격이 높은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위치를 선택하기 위해 주거 면적을 포기하거나, 더 오래된 건물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슬세권의 편리함 때문에 이 동네로 이사왔지만, 확실히 비용 부담이 커요. 같은 돈이면 조금 외곽으로 나가면 훨씬 넓은 집에 살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지금의 생활이 주는 만족감을 생각하면 이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슬세권이 제공하는 편리함이 오히려 일과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가령 집 근처에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다면 퇴근 후에도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까이 있는 환경이 오히려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슬세권의 선택지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단점으로 꼽힙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 비해 동네 상점은 상품의 다양성이 떨어질 수 있고, 가격도 조금 더 비싼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찾으려면 결국 슬세권을 벗어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슬세권 생활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삶의 질과 만족감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일상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사람들과의 연결감이 더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미래의 슬세권, 어떻게 발전할까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와 원격 수업이 늘어나면서 집 주변 환경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 머물게 되면서, 집 근처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슬세권의 가치가 재조명된 것입니다.

미래의 슬세권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나갈까요?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기술의 발전으로 '스마트 슬세권'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동네 상점들이 배달 앱과 연계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동네 커뮤니티 앱을 통해 이웃과 정보를 공유하고, 근처 상점의 재고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동네 행사나 모임에 참여하는 등 더욱 연결된 슬세권 생활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둘째, '공유 슬세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한정된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유 주방, 공유 작업실, 공유 세탁실 등 다양한 공유 시설이 슬세권 내에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주거 공간은 작더라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풍부한 새로운 형태의 슬세권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셋째, '문화 슬세권'의 중요성이 커질 것입니다. 단순히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는 것을 넘어, 문화생활과 여가 활동을 집 근처에서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작은 극장, 갤러리, 음악 공연장, 취미 교실 등 문화 시설이 슬세권 내에 더 많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태 슬세권'의 발전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도시 농업, 공동체 정원, 작은 공원 등 자연과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이 슬세권 내에 더 많이 조성될 것입니다. 이는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을 통해, 슬세권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닌 도시 생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슬리퍼 신고 찾는 행복, 그 소중한 일상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거주함은 존재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어디서 사느냐'는 단순한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슬세권은 그 고민의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생활 문화입니다. 더 많은 시간을 아껴서 더 많은 일에 집중하는 삶이 아니라, 생활 속 작은 순간에서 의미를 찾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슬세권은 단순히 '가까운 것이 편리하다'는 차원을 넘어,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로 확장됩니다.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고, 익숙한 공간에서 안정을 느끼며,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이 슬세권의 본질입니다.


슬세권은 결국 나를 위한 작은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빵집, 자주 가는 카페, 편하게 드나드는 서점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을 쌓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멀리서 더 좋은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나만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먼 곳을 찾아 나서기보다,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슬세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소중한 삶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진정한 행복은 화려한 여행지나 특별한 이벤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슬리퍼를 신고 찾아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슬세권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여유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나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의 슬세권은 어떤 모습인가요? 오늘 슬리퍼를 신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세요. 어쩌면 그곳에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행복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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