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현 나가토시 센자키
카네코 미스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서점에서 일본어 교재를 고르다가 그녀의 동시가 실린 것을 보고 난 뒤였다. 그 뒤 그녀에 대해 조금씩 알아보다가 언젠가 그녀의 고향 야마구치현 센자키를 가보리라 생각했었고, 서일본 여행 때 이곳에 들렀다..
지금 남아 있는 카네코 미스즈의 사진이다.
그렇다면 카네코 미스즈의 어떤 인물일까?
카네코 미스즈 金子 みすゞ (1903년 4월 11일-1930년 3월 10일)는 다이쇼시대 말기부터 쇼와시대 초기에 천재 동요시인이라는 후대의 평가를 받는 여성으로 본명은 가네코 테루 金子 テル 이고 미스즈는 필명이다.
그녀는 야마구치현 오츠군 센자키仙崎(지금의 나가토시 센자키)에서 태어나 군립 오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녀에게는 두 살 위의 오빠 겐스케와 두 살 아래 마사스케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처제의 시댁에서 운영하는 시모노세키에 있는 우에야마 분에이도上山文英堂의 청나라 지점장으로 일하다가 그녀가 세 살 때 청나라에서 죽었다.
(이전에는 카네코 미스즈의 아버지가 중국인에게 타살되었다고 알려졌지만 2006년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급성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현재는 타살보다는 급성 뇌출혈설이 유력해져 있는 상태이다.)
하기에서 센자키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센자키는 야마구치현내에서 어획량으로 시모노세키에 이어 2위의 항구이다. 그만큼 항구의 위치가 좋다는 뜻인데,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난 뒤 해외에서 귀환하는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이 이곳을 통해 들어왔고 당시 조선이나 대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이곳을 통해 출발했다. 현재는 나가토시에 편입되어 있다.
센자키항의 전체 모습
하기에서 센자키는 버스로 이동했다.
센자키에 있는 카네코 미스즈 기념관金子みすゞ記念館이다. 그녀의 생가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간판이름은 金子 文英堂(카네코 분에이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카네코 가족이 운영하던 서점의 이름이다.
그녀가 4살이 되던 해 동생 마사스케(上山 正祐 1905-1989)가 우에야마 분에이도上山文英堂, 그러니까 아버지가 지점장으로 일했던 그 서점집안(미스즈 어머니의 동생, 즉 작은 이모, 이모부는 우에야마 마츠초우)으로 양자로 들어갔다.
이것은 그 뒤 복잡한 집안 문제를 낳게 되는데,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모가 죽고 나서, 미스즈의 어머니가 우에야마 마츠초우와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양아버지도 그리고 그녀의 친모도 어린 시절에 마사스케가 양자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 카네코와 마사스케는 본래 친남매였지만 사촌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여튼 어머니가 재혼을 한 뒤 그녀는 시모노세키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시모노세키로 이사한 다음 그녀는 우에야마 분에이도에서 살면서 니시노바시초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서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미스즈는 동시를 쓰기 시작했고 여러 동시 잡지에 투고하여 당시 유명 시인이었던 사이죠우 야소로부터 일본의 크리스티나 로제티, 젊은 동요시인 중의 큰 별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녀는 『동화(童話)』, 『붉은 새(赤い鳥)』, 『부인화보(婦人畵報)』, 『금성(金の星)』 등의 잡지에 5년 동안 90편 정도의 동시를 투고했다.
(기념관에 남겨 있는 그녀의 동시)
이렇게 전도유망한 여류 시인으로서 카네코 미스즈의 삶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물셋이었던 1926년이었다. 그 해 그녀는 당시 우에야마분에이도의 지점장 격이었던 남자와 결혼을 했다. 2012년에 방영된 일본 드라마 카네코 미스즈 이야기에서도 나온 내용이지만 사실 친남매인데도, 사촌으로만 알고 살아왔던 동생 마사스케가 카네코 미스즈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양아버지는 그녀를 당시 우에야마 분에이도에서 일하는 미야모토 케이키宮本啓喜와 반 강제로 결혼을 시켜버렸다.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두 살 연상의 미야모토 케이키는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빙수시럽을 제조하여 판매했었기에 유복했다. 하지만 그는 계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10대 때 집을 나와 주식 거간꾼으로 일했다. 13세 때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주가가 많이 올랐지만 전쟁이 끝나자 주가는 폭락하여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본가에서 만든 빙수 시럽을 하카타에 팔기 시작했지만 판매 대금을 유곽에 갖다 쓰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가 찾아간 곳이 카미야마 분메이도였다. 그는 키가 크고 일처리도 좋았지만 여자관계가 좋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딸을 낳았고 이름을 후사에 라고 지었다. 마음에 없는 결혼이라고 해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이제 안정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발표한 동시들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데 비해 그녀의 결혼생활을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 생활에 성실하지 못한 남편은 그녀의 양아버지에게 냉대를 받았고 결국 다른 여성과의 문제를 일으켜서 서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녀는 쫓겨난 남편을 따라갔지만 자포자기한 남편은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고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임질을 옮겼으며, 그녀가 스물다섯 살 때 동시를 쓰는 것과 편지 쓰는 것조차 막아버렸다.
이후 그녀의 창작은 중단되었고 방탕한 남편에 의해 유일한 기쁨이었던 글쓰기마저 힘들어지자 그녀의 삶은 급격하게 어둠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리고 1930년 2월에 별거에 들어간 미스즈는 남편에 이혼을 요구했고 그 달 27일에 이혼을 했다.
그런데 남편이 그녀에게 딸의 친권을 행사하며, 그녀에게서 딸을 빼앗아가려 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에게 친권을 행사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1930년 3월 9일 그녀는 사진관을 찾아가 아이와 마지막 사진을 찍었고 그다음 날 3월 10일 우에야마 분에이도 2층에서 음독 자살하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그런 그녀의 죽음을 당시 신문은 부잣집 딸의 자유연애의 파산이라고 보도했다.
미스즈는 죽을 때까지 3권의 노트에 시들을 정리하였고 딸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며 했던 말들을 채집(採集)해 놓은 『남경옥(南京玉)』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우연히 그녀의 작품 하나를 보게 된 한 청년에 의해서이다. 1968년, 카네코 미스즈가 죽은 지도 40여 년이나 흐른 어느 날 당시 18세의 대학생이었던 야자키 세츠오(矢崎節夫)라는 사람이 우연히 미스즈의 大漁」 풍어(豊漁 )라는 제목의 시를 보게 되었다. 그 시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은 그는 미스즈의 시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그녀의 시를 찾아내었는데 결정적으로 1982년에 그는 미스즈의 친동생인 우에야마 가스케(上山雅輔; 우에야마 마사스케)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보관하고 있던 3권의 노트를 보게 된다. 그 노트에는 각각 『아름다운 마을(美しい町)』, 『하늘의 엄마(空のかあさま)』, 그리고 『쓸쓸한 공주(さみしい王女)』라는 제목이 붙어있었고 모두 512편의 동요가 들어 있었다. 야자키 세츠오는 그 시들을 정리하여 1984년에 JULA출판국(出版局) 발행 『카네코 미스즈 전집 전 3권·별책 추억의 기록』을 출판하였다.
이후 그녀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고 그녀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2003년 4월 11일 그녀의 생가터에 카네코 미스즈 기념관이 건립되어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의 복원과 함께 그녀의 친필 메모등이 전시되고 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야마구치현의 시골 센자키까지 찾아온 한국인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동상
기념관에서 나온 나는 기념관 앞 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은 쭈욱 항구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곳곳에 카네코 미스즈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길의 끝지점은 항구의 방파제였다. 어린 시절 그녀는 이 바다를 보면서 성장했으며 그녀의 동시 곳곳에 센자키에서의 추억을 담았다.
세토의 비라는 가네코의 동시이다.
이 안내판은 센자키의 일본의 근대 포경이 시작된 곳이라는 내용이다. 카네코도 어린 시절 고래잡이를 보고 이에 대한 시를 남겼다.
센자키까지 카네코 미스즈를 보러 왔는데 그녀의 묘가 있는 마을의 절에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역시 가네코의 작품이 새겨져 있다.
친절하게 카네코의 묘를 가리키는 안내판.
마침내 가네코 미스즈의 묘 앞에 섰다. 그녀의 사후 85년이 지난 후 찾아온 한국인 남성, 사실 무엇하나 연결할 만 것은 없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감정으로 찾아온 나는 동행했던 이와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왜 이렇게 능력 있는 여성이 별로인 남자를 만났을까? 그녀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센자키를 떠나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가야 했기에 센자키역仙崎駅에 도착했다. 센자키역은 JR미네선의 무인역으로 1930년 5월에 개업했다.
이 역은 무인역으로 자동발매기도 없다.
역사 안에 사무실이 있던 공간에 카네코 미스즈의 사진을 묘사한 작품이 있었다. 이 안에 카네코 미스즈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일정크기의 나무판에 색을 입혀 만든 것이다.
(이 자료관은 2019년 4월 10일, 이 지역 출신 작사가 오츠 아키라 기념자료관으로 리뉴얼되었다. 아울러 앞서 설명했던 대로,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해외에 귀환하는 구 일본군 병사들과 일반인들에 대한 자료도 전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대표작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私と小鳥と鈴と라는 작품을 소개할까 한다.
내가 양손을 벌려도
하늘은 조금도 날수 없지만
날 수 있는 작은 새는 나같이
지면을 빠르게 달릴 수 없다.
내가 몸을 흔들어도
아름다운 소리는 나지 않지만
저 소리 나는 방울은 나같이
많은 노래를 알지 못한다.
방울도, 작은 새도, 그리고 나
모두 다르고 모두 좋다.
*센자키는 1954년에 주변 정촌 등과 합병하여 나가토시가 되었다. 나가토시는 산인 지방의 거의 서단에 위치하고 동서로 뻗은 지형이다. 북측은 동해에 접하고 외해에 접한 해안선은 침식 지형을 이룬다. 한편으로 오미 섬과 본토에 둘러싸인 후카가와 만·센자키 만, 무카쓰구 반도에 둘러싸인 유야 만 등의 만이 존재해 천연의 양항이 되고 있다. 무카쓰구 반도는 평지가 적고 다랑논이 많이 존재해 최근에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다랑논"으로서 풍경 사진의 소재로 다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히오키 지구에서는 문주란이 자생하고 있다. 인구는 2025년 2월 1일 기준 29,493명이다. 나가토시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곳이지만 이곳이 바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지역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