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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횡단 철도 여행

히토요시를 걷다.

by 늘 담담하게


늦가을의 여행, 한국을 떠나느라 하루 종일 피곤했던 몸은 그대로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다. 잠이 깬 것은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어나서 창밖을 보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안개비 같기도 했다.



창문으로 본 구마카와 강은 수심도 얕고 잔잔하게 강물도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 강은 역사적으로 많은 홍수가 일어났다. 공식적인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홍수는 1669년으로 당시 아오이 아소 신사의 누문이 1m 정도 잠겼다고 한다. 2000년대에도 거의 매년 홍수 피해가 발생했고 앞서 설명한 2020년 7월의 누적된 호우로 인해 구마카와강 유역에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다.

과거 구마카와 강 홍수때의 최고 수위를 표시한 전봇대, 맨 위가 2020년, 그 다음이 1965년 홍수때의 수위이다.

아침 식사 시간은 아직 이르고 해서 차 한잔을 끓여 마신 뒤, 히토요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아침 식사 후 바로 역으로 가서, 깊은 산악지대를 넘어가는 히사츠선의 나머지 여행이 있었고 가고시마에 도착한 뒤, 바로 관광버스를 타야 하는 일정이기에 히토요시에서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이른 아침에 여관을 나서려 할 때,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여직원이 급히 달려 나와 어디를 가냐고 묻길래, 산보라고 대답해 줬고 그녀는 우산을 내게 내밀었다.


전날 제대로 보지 못했던 히토요시 여관의 명패



히토요시의 아침은 상쾌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리를 통해 구마카와강을 건너갔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에이코쿠지(永国寺 영국사)이다.

에이코쿠지

이곳은 유령사幽霊寺(유레이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절에 유령의 모습이 담긴 족자가 있기 때문이다. 에이코쿠지는 조동종의 사찰로서 창건 연도는 1408년에서 1410년 경이라고 한다.


유령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600여 년 전에 이 지역 사무라이의 첩이 본처의 시기와 괴롭힘으로 억울하게 죽자 귀신이 되어 이 절의 연못에 나타났다고 한다. 연못은 사진에 있는 본당 뒤편에 있다.


주민들이 공포에 떨자 이 절의 당시 주지스님이 공력이 높아서 두려워하지 않고 연못에 나타난 귀신의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본 귀신은 자신의 추한 모습에 괴로워하며 저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뒤 이 귀신을 그린 족자가 절에 남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곳을 유령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여름에는 이곳에서 유령 마츠리가 열린다.


그러면 귀신이 나타났다는 연못은 어떤 모습일까?

음침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였다.



이 족자의 그림이 바로 600여 년 전의 귀신의 모습이다.

세이난 전쟁 때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곳에서 33일간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 히토요시는 세이난 전쟁 때 정부군과 사츠마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곳이었다. 당시 시가지를 중심으로 해서 구마카와강을 끼고 방어선을 구축했던 사츠마군에 정부군은 맹공격을 가했고 그 시가전에서 이 에이코쿠지는 불타버리고 만다. 현재의 본당은 1891년경에 재건되었다. 전설과 역사와 함께 하는 곳이 이 에이코쿠지였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히토요시성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을 향했다.

가는 도중에 사무라이 가옥이 있어 사진을 찍었다. 사가라번의 가로를 살던 저택을 이축한 것으로 세이난 전쟁 때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휴관하고 있다.


일일온천인 츠츠미 온천, 히토요시에서 가장 오래된 공중목욕탕으로 1921년에 개업했다.


2022년 12월에 리뉴얼 오픈했다




센게츠 소주繊月酒造 공장. 시간이 있었다면 견학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히토요시는 예로부터 소주로 유명한 곳이다.

구마소주 박물관 시라다케 전승관

이곳에서 생산하는 구마소주는 맑은 물과 좋은 증류수로 빚어 그 맛이 뛰어나다. 구마소주를 생산하는 업체는 약 28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서 센게츠주조가 제일 크다. 3대째 160년 된 양조장으로 이 지역 소주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적 양조 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생산하는 방식은 전통을 기초로 하고 있다. 알코올 함량이 25도 정도로 우리나라 소주에 비해 독한 편인데 목 넘김이 부드럽고 뒷맛은 깔끔하다. 생산된 술은 나무통에서 5-10년, 항아리에서 20-30년 정도 숙성시킨다고 한다.

센게츠 주조


센게츠 주조

히토요시 성터에 이르렀다. 히토요시 성에 대해서는 일본의 성 시리즈에서 다룰 생각이다. 히토요시에는 이외에도 볼거리가 많다. 3월에는 히나 마츠리가 성대하게 열리고,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지야초거리 鍛冶屋町通り는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예로부터 히토요시는 칼과 총 농기구를 만들어 내던 대장간이 유명한 곳으로 지금은 1곳의 대장간이 남아 있어 장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카지야초 거리의 모습이다.

나는 이 아담한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온천이 있고, 산책로가 있으며, 뱃놀이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여행이 늘 그렇듯이 다음 일정을 위해 이곳에서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다.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이른 아침부터 걸어 다녔기에 다리도 아파왔고 배도 고파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한 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사토미상의 배웅을 받으며 히토요시역으로 향했다. 이제 히사츠선 여행을 본격적으로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전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역을 등지고 왼편에 있는 건물... 히토요시 유명 에키밴을 만드는 가게 야마구치人吉駅弁やまぐち였다.

이 가게에서는 구마가와강에서 잡은 은어를 식재료로 한 아유스시와 밤으로 만든 구리메시가 특히 유명하다.

*아유 스시(은어 초밥)는 일본 3대 급류로 꼽혀 급류타기를 즐길 수 있는 구마카와 강의 은어를 사용. 다시마 국물로 지은 초밥 위에 고추냉이(와사비)를 올리고, 그 위에 식초로 하루 동안 굳혀 약간 단단해진 은어를 펼쳐 두었다.

*구리메시(밤밥)는 붉은 밤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에 무 말랭이를 넣은 찜밥을 깔고, 그 위에 산채나 조림반찬과 더불어 히토요시 분지에서 수확한 달콤한 밤을 둥글둥글 얹었다.


이 중에서 내가 고른 것은 구리메시였다. 일본 철도를 여행하면서 에키밴을 빼놓을 수 없는데, 철도여행 초기만 해도 에키밴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에키밴을 맛보기 시작했다.

구리메시

이렇게 해서 히토요시의 짧은 여행은 끝을 맺고 이사부로 산페이로 일컫어지는 히사츠선, 열차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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