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요시 료칸에서 머물다
히토요시 료칸을 이야기하기 전에 히토요시 온천에 대해서는 먼저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히토요시 온천은 구마가와강 유역에서 솟아나는 사가라 온천을 비롯한 30여 개 온천을 한데 일컫는 총칭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곳 히토요시는 전국시대부터 사가라가(家)의 조카마치로서 번창해서 옛날부터 목재와 목탄을 중심으로 한 상업지로서 발달했고 그런 까닭에, 먼 곳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어 상담 장소로서 이용되는 많은 요정이 자리해 있었다. 거기에 또 양질의 온천 원수가 솟아나서 1492년에 히고국을 지배하던 전국시대 다이묘 사가라 다메쓰구가 온천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고 , 쇼와시대 초기에는 많은 대중 온천도 개설되었다.
그 온천숙소들 중의 하나가 바로 히토요시 료칸이다.
이 안내판은 히토요시 료칸이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직 료칸이 많지 않은 당시 홋카이도의 건어물을 도매하는 “생선가게”를 경영한 사람이 히토요시 료칸의 창업주인 호리오 요시키. 1932년에 온천을 찾아내 당시 아직 흔치 않은 료칸을 시작한 것이 히토요시 료칸의 시작이었다.
현재 히토요시 료칸의 사장은 창업자 호리오 요시키의 손자인 호리오 겐지로, 그리고 안주인(오카미)이 한국인 호리오 사토미상이다. 1934년 문을 열었으니까 9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2층 목조 건물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복도는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난다. 깔끔하게 정돈된 다다미 방의 창문 밖 구마카와강 전망은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정원수로 빼곡한 안쪽 마당 분위기는 차분했다. 마당을 돌아 흐르는 온천수에서 피어나는 수증기가 아련한 느낌을 주었다. 역사가 오래되어서 온천탕은 좁고 낡았다. 마치 옛날 시골의 허름한 공중목욕탕을 생각하게 했지만 그것 또한 지친 여행자에게는 안식을 주었다. 온천수는 무색무취의 나트륨 탄산수소염천이었기에 노보리베츠와 같은 유황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료칸에 들어섰을 때 나를 맞이하던 직원은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잠시 통화를 한 뒤 나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는데 전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국여성이었다. 그 활기차고 상냥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여관의 안주인 호리오 사토미(한국명 손종희)상이었다. 여행사에서 일본어 통역 가이드를 하던 1992년에 남대구청년회의소와의 자매결연행사를 위해 방한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저녁식사가 막 시작될 무렵에 나타나서 이런저런 여관과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무 복도는 밟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오래된 여관이기에 더 그랬지만 나는 불편하지도 않았고 더 좋았다.
온천을 다녀오고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나는 여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출발하기 전부터 안 좋았던 몸 상태도 많이 나아졌고 마음도 훨씬 가벼워졌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말고기를 먹었다. 구마모토현은 말고기로 유명한 곳이고 히토요시 또한 말고기를 즐겨 먹는 곳이었다.
음식은 정갈했고, 혼자 먹기에는 배가 부를 정도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내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불은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대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히토요시 여관의 온천
다음날 새벽, 구마카와강의 모습.
결과적으로 히토요시 료칸을 선택한 것은 괜찮은 것이었다. 혼자서의 여행에서는 게스트하우스나, 비즈니스 호텔에서 머물게 되는데 히토요시 료칸은 1인여행자로서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낡은 느낌의 여관이었지만 그곳에서의 하룻밤은 쓸쓸함도 없었고, 편안한 그것뿐이었다. 안타깝게도 히토요시 여관은 2020년 구마카와강 홍수 때 침수되는 바람에 큰 피해를 당했다.
2020년 7월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의 홍수 때의 모습이다. 사진 상단의 산이 있고 그 바로 앞이 히토요시역이다. 그리고 사진에서 왼편 상단 중간쯤에 작은 나무 숲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아오이아소신사青井阿蘇神社이며 그 신사에서 강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그곳이 바로 히토요시 료칸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흙탕물이 흐르는 가운데가 구마카와 강이다.
이 홍수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은 히토요시료칸은 복구 작업 끝에 10월에서야 부분적인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