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도성 36 미츠케 이야기

36 미츠케 15-16

by 늘 담담하게


15. 토키와바시문 常盤橋門

%ED%86%A0%ED%82%A4%EC%99%80%EB%B0%94%EC%8B%9C.jpg?type=w1

토키와바시는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쿄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에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중의 하나이다. 이후 1606년 에도성 공사가 시작된 이후 1629년에 무쓰국과 데와국의 다이묘에 의해 개축되었다. 니혼바시 강으로 이어지는 토키와바시문은 오테문에서 아사쿠사바시문을 통해, 오슈 가도로 이어지는 에도로쿠구치(江戸六口)의 하나이다. 1595년에 이에야스는 토키와바시문 바깥에 긴자(金座)를 설치하고 금화의 제조와 유통을 고토 쇼자부로 코지에게 명령했다..


%ED%86%A0%ED%82%A4%EC%99%80%EB%B0%94%EC%8B%9C1.jpg?type=w1

에도성의 바깥 해자에 세워진 토키와바시문 바깥은 쵸닌지구로서 니혼바시 상인의 마을로 번창했다. 사진 왼쪽 저 멀리 고후쿠바시다리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사진 오른쪽, 그러니까 토키와바시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에 목조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명판 같은 것이 보이는데 이것을 코사츠바高札場라고 불렀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에도의 6개 코사츠바高札場 중의 하나인 토키와바시 코사츠바이다. 이를 한문 그대로 읽으면 고찰장이라고 읽게 되는데 사진에 보이는 명판들은 高札(코사츠)라는 것이다.


코사츠는 간단하게 말해 법령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에도 막부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과 주요 관문항구, 큰 다리, 도시와 마을이 입구나 중심등 눈에 잘 띄는 곳에 코사츠바 高札場이라는 설치장소를 마련하고 각 번에도 이에 따를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이에 따라 각 번에서도 같은 조치를 하고 동시에, 번의 법령을 함께 배치했다. 또한 역참에도 많이 설치되어 각 숙소 마을의 거리 측정의 거점으로 삼기도 했다. 이 고찰 문자가 알아보기 힘든 경우에 영주의 허가 없이 함부로 수정할 수 없었다.(고찰은 먹물로 쓰여 있기 때문에 비바람에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막부와 각 번에서 고찰을 담당하는 직책을 마련하고 항상 고찰이 걸린 곳의 정비 관리를 맡게 했다.


당시 막부는 법률에 관한 출판을 엄격히 금지시켰지만 고찰에 쓰인 법령에 관해서는 만민에게 알리는 사실이라는 점에서 쉽게 출판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고찰의 문장을 서당의 받아쓰기 교과서로 사용하게 했다. 이 고찰은 법령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목적도 있지만 한편으로 밀고(크리스천에 대한)를 장려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 고찰의 폐지는 1874년에 결정되어 2년 뒤에는 완전히 철거되었다. 그 이유는 메이지 유신과 함께 법령이 자주 바뀌는데, 이것을 전국 각지의 고찰장이 따라가지 못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재정난으로 이 고찰장을 운영할 경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Tokiwabashi_env.1880.jpg?type=w1

1880년에 촬영된 토키와바시 다리 사진이다.


토키와바시문은 1873년에 철거되었는데 1877년에 마스가타 돌담을 이용하여 석조 다리인 도키와바시다리를 만들었다. 남은 돌담은 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다.



%ED%86%A0%ED%82%A4%EC%99%80%EB%B0%94%EC%8B%9C2.jpg?type=w1


%ED%86%A0%ED%82%A4%EC%99%80%EB%B0%94%EC%8B%9C3.png?type=w1


에도성의 지도를 보면 토키와바시다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긴자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금화를 제조했다.

%EB%8F%84%ED%82%A4%EC%99%80%EB%B0%94%EC%8B%9C.jpg?type=w1

당시 토키와바시 바로 앞에 건축된 구 일본은행


1882년에 일본은행이 니혼바시카와 가와구치에 설립되었다. 1889년에 취임한 제3대 일본 은행 총재는 이와사키 야타로와 함께 미츠비시 재벌의 기초를 쌓아 올린 카와다 코이치로이다. 카와다는, 비좁아진 일본은행 본점을 니혼바시 모토이시쵸 「긴자」의 철거지에 신관의 건설을 시작했다. 앞서 지도에 표기된 긴자에 일본은행이 들어선 것이다.


건축설계는 나중에 도쿄역을 설계한 다쓰노 킨고, 일본은행의 건설 담당자는 다카하시 고레키요이다. 1896년에 7년의 공사 끝에 준공되었다. 2연 아치식 돌다리, 도키와바시 다리 앞에 보이는 일본은행 본점은 지진 재해와 도쿄 대공습을 견뎌낸 네오바로크식 건축으로 화강암 열주를 배치한 견고한 건물은 1974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C%9D%BC%EB%B3%B8%EC%9D%80%ED%96%89_%EB%B3%B8%EC%A0%90.jpg?type=w1


1280px-Bank_of_Japan_2010.jpg?type=w1

사진 상의 건물이 바로 그때 건축된 일본은행이다.


현재 토키와바시는 2개이다. 하나는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에도시대 토키와바시문으로 통하는 보행자 전용 석교와 관동 대지진 이후 건설된 교량이다.


%E5%B8%B8%E7%9B%A4%E6%A9%8B.jpg?type=w1

자동차 도로 교량의 토키와바시


%ED%86%A0%ED%82%A4%EC%99%80%EB%B0%94%EC%8B%9C4.jpg?type=w1

보행자 전용의 토키와바시 이 두 다리는 서로 70m쯤 떨어져 있다.



16.간다바시문 神田橋門


이 다리의 사진은 일본 내의 자료를 다 뒤져봐도 찾지 못했다. 추측건대 이 다리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는 것 같다.



mitsuke_map.jpg?type=w1




다시 한번 에도성 미츠케의 위치를 기재한 지도를 보자, 맨 위의 아사쿠사바시 문을 시작으로 왼쪽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지금까지 바깥 해자에 있었던 문과 미츠케를 이야기해 왔다. 이제 안쪽 해자 쪽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위의 지도에서 가운데쯤에 神田橋門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간다바시 문은 1629년 데와 국의 아키타 번주인 사타케 요시노부가 건축했다. 역대 쇼군은 우에노 간에이지나 닛코 도쇼구(日光東照宮)에 참배하러 갈 경우, 오나리도御成道로 정해진 칸다바시문(神田橋門)에서 스지카이바시문(違 門橋門)으로 향했다.


간다바시다리 아래를 흐르는 구 히라카와강은, 옛날에는 상류가 카미히라가와, 하류를 시모히라가와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리 밑 가마쿠라 강변에서 하역된 목재와 축성석 등의 건축 자재는 이 강변에서 에도성으로 반입되었다.

%EC%B9%B8%EB%8B%A4%EB%B0%94%EC%8B%9C.jpg?type=w1 간다바시다리와 미츠케

문 앞을 지키는 오반쇼에는 어문 안의 대문간에는 도자마 다이묘 중 5만~6만 석의 다이묘가 경비를 맡았다. 경비를 맡았던 번사 5명은 하오리하카마羽織袴를 입었다. (하오리하카마는 가문(家紋)을 넣은 羽織와 はかま(=일본 남자의 하의)((정장임)).


%ED%95%98%EC%98%A4%EB%A6%AC%ED%95%98%EC%B9%B4%EB%A7%88.jpg?type=w1 하오리하카마

쇼군의 행차 혹은 다이묘가 에도성에 들어가기 위해 이 문을 지나갈때면 모두 상하로 착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오반쇼에 배치된 무기는 총 10정, 활5개, 장병창 10개, 개인 총 2개, 개인 활 1개엿다.


%EC%B9%B8%EB%8B%A4%EB%B0%94%EC%8B%9C.png?type=w1

간다 바시의 위치를 그린 지도, 에도성으로 들어가기전 왼쪽에 가마쿠라가시 鎌倉河岸 번역하면 가마쿠라강변 혹은 가마쿠라 선착장이 있다.


%EC%B9%B8%EB%8B%A4%EB%B0%94%EC%8B%9C1.jpg?type=w1 간다바시다리와 그 옆의 가마쿠라 선착장이 그려진 그림

이 지명은 에도성 축성공사를 할 때 가마쿠라에서 가져온 석재를 이곳에서 하역했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현재는 이곳이 간다 1초메와 2초메에 해당된다.


%EA%B0%80%EB%A7%88%EC%BF%A0%EB%9D%BC_%EC%9C%A0%EA%B5%AC.jpg?type=w1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가마쿠라 선착장의 유적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 축성 공사의 건축자재들을 옮겨오기 위해 선정한 곳이 가마쿠라 선착장이었다. 성 축성의 건축 재료들을 상장하기 위해 선정된 곳이 가마쿠라 하안이었다. 소토보리 강 연안으로 수운도 편리하고, 에도성 혼마루와도 가깝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까지 화물 하역장으로 사용되었다.


에도성 축성 공사 목수로서 교토에서 온 코라 무네히로(甲良 宗広 1574-1646 에도시대의 유명한 목수)가 가마쿠라 선착장에 저택을 배정받았다. 메이지 유신 때까지, 코라 가문은 대대로 같은 토지에 저택을 두고 있었다. 또 코라 가문에는 에도성 축성 때의 설계도면을 대대로 보관하고 있어 화재로 인한 소실 등의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그 도면을 참고로 재건공사가 이루어졌다.


가마쿠라 선착장 주변에는 유곽이 15채 정도 있었다. 이것은 스루가(시즈오카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로 옮겨 오기 전에 있었던 곳)의 미로쿠마치에서 이전해 온 것으로, 항구마을에는 유곽이 필수불가결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후 1617년에 쇼오지 진자에몬에게 아시야쵸에 유곽을 만들도록 허가되어 에도 내의 유녀(옛날 역참이나 유곽에 있던 창녀)들이 한 곳에 모여들었다.


에도의 마을은 신흥도시로 급성장함과 동시에 무사, 낭인, 상인·인부 등 다양한 인물이 모여들었다. 유곽의 설치는, 참근 교대의 무사나 공사 종사 노동자 등 단신 부임자의 에도로의 유출에 따른, 현저하게 밸런스가 부족한 남녀비의 영향하에 의한 것이었다.


이 밖에 모토요시하라(니혼바시에 있었던 유곽)에 모이기 전에는 가마쿠라 선착장 외에 고지마치에 16, 7채, 토키와바시와 도산보리 해자 주변 야나기마치에 20채 정도 유녀촌이 존재했다. 이 때문에 가마쿠라 선착장은 에도 유곽의 발상지로 여겨지고 있다.

%EA%B0%80%EB%A7%88%EC%BF%A0%EB%9D%BC.jpg?type=w1

선명하지 못한 사진으로 관동대지진 때, 발생한 화재에서 가마쿠라 선착장에서 피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