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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성, 36 미츠케 이야기

36 미츠케 10-14

by 늘 담담하게


에도성의 안쪽 해자와 바깥해자에 있던 36 미츠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사실 도쿄에 대한 여행 이야기는 수없이 많고, 그 대부분이 여행지와 쇼핑, 맛집 정보이다. 그래서 도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에도의 도쿄가 어떻게 발전해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써보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이들은 별로 다루지 않은 것이고 주목받을 주제는 아니지만, 음식과 쇼핑 이외에 도쿄의 다른 이야기들을 글로 남겨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전편에서 아사쿠사 미츠케에서 도라노문까지 모두 9개의 미츠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시 한번 이해를 돕기 위해 에도성의 36개 미츠케를 표시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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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뒤를 이어 36 미츠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자.



10.사이와이바시문 幸橋門

%EC%82%AC%EC%9D%B4%EC%99%80%EC%9D%B4%EB%B0%94%EC%8B%9C%EB%AC%B8.jpg?type=w1 사이와이바시문의 사진

이 문은 현재 존재하지 않은데, 지금의 JR신바시역 서쪽 출구 쪽에 있는 다이이치 호텔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이와이바시라는 지명도 존재하지 않지만 가까운 제국 호텔이 있는 행정구역이 우치사이와이초 内幸町 인 것을 보면 제국 호텔이 있던 자리가 사이와이바시 문 안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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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를 보면 오른쪽 중간쯤에 사이와이바시문적幸橋門跡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아래쪽이 신바시역, 그리고 왼쪽 끝 위를 보면 우치사이와이초라고 표기되어 잇다. 토라노문에서 현재의 신바시까지 에도시대의 바깥 해자였고, 해자를 따라 좁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을 카와기시도오리河岸通り라고 불렀고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EC%82%AC%EC%9D%B4%EC%99%80%EC%9D%B4%EB%B0%94%EC%8B%9C.jpg?type=w1 에도시대의 지도

지도를 보면 성 안쪽은 다이묘들의 저택이 있고 분리된 구획들마다 그림이 표기되어 있는 것은 그 다이묘 가문의 상징이다. 이 지도의 파란색 원이 그려져 있는 부분이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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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나와 있는 왼쪽길이 바로 지도에서 파란 색원에 해당된다. 맨 처음 지도에서 보이듯 에도성의 바깥 해자는 사이와이바시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북쪽으로 올라가고, 또 하나는 에도만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11. 야마시타문 山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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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문은 현재의 긴자 중심부에 있던 문으로 사이와이바시문과 마찬가지로 유구도, 지명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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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지도에 표기된 야마시타문, 에도성의 성문중에서 가장 작은 문이었고 마스가타를 꺾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보면 바로 일직선으로 에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야마시타 문이 있던 곳은 오늘날 JR고가 밑에 있으며 안내판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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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95%BC%EB%A7%88%EC%8B%9C%ED%83%80%EB%AC%B81.jpg?type=w1 야마시타문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게시판


12.스키야바시 数寄屋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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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야바시의 사진. 1871년에 촬영된 사진이다. 이 다리는 1629년에 만들어졌다. 무사와 쵸닌의 거주지를 사이에 두는 경계선에 있어, 미츠케가 설치되어 있었다.


메이지 유신 후에 성문은 철거되었고 관동 대지진 후 부흥 사업에 의해서, 1929년에 석조 아치교로 교체되었다. 하루미 거리가 바깥 해자를 건너는 위치에 있으며 북쪽으로 일본극장과 아사히신문사, 남쪽으로 긴자 도시바 빌딩과 타이메이 초등학교를 마주하는 풍경은 도쿄의 대표적인 수변 풍경이었다.


1958년 바깥해자가 메워져 도쿄 고속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철거되었다. 그 후 하루미 거리에 걸쳐 있는 고속도로 다리는 '신스기야바시'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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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시대 초기의 스기야바시, 다리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옛 아사히 신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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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시대 초기 히비야에서 스기야바시 교차로를 바라본 사진, 왼쪽 건물이 옛 아사히신문사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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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스기야바시 교차로, 교차로 건너편에 소니 빌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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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지도 왼쪽 위가 스기야바시문이다. 그 아래가 야마시타문이다. 현재 에도성의 바깥 해자는 메워졌고 그 위에 수도 고속도로가 놓여 잇는데 지도상의 해자가 꺾어지는 것처럼 수도 고속도로도 똑같이 꺾어져 있다.



13. 카지바시문 鍛冶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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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바시 문은 1629년 무쓰국 혹은 데와국의 다이묘에 의해 세워졌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대장장이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었고 마을의 길을 따라 직진하면 안쪽 해자의 바바사키문이 나왔다. 이 다리는 1873년에 철거되었고 1876년에 석조 다리가 세워졌지만 이 역시 전쟁 후에 철거 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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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지도에 표기된 카지바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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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스키야바시 교차로에 안내 표지판만 서 있다.


14.고후쿠바시문 呉服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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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쿠바시문은 1629년 무쓰국(현재의 후쿠시마, 이와테, 미야기, 아오모리, 니가타현북부 지역)과 데와국(현재의 야마가타현과 니가타현)의 다이묘에 의해 스미가타문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위치는 현재 도쿄역의 야에스출구 부근의 고후쿠바시 교차로 부근에 있었다.


소토보리 도오리와 에이타이도오리가 교차하는 곳에서 조금 들어간 곳이다. 다리이름은 이 다리 주변에 막부에 직물들을 납품하는 포목상들이 많이 거주했던 고후쿠마치呉服町에서 유래되었다. 메이지시대에 이르러 이 다리가 철거되고, 새로운 다리가 놓였고 교차로 남쪽에 전차가 정차했던 고후쿠바시 정류장이 있었다. 1950년에 바깥해자에 폭격이 남긴 폐자재들의 매립공사 오후쿠바시부터 신바시 방면을 향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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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쿠바시 다리一石橋에서 본 고후쿠바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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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성의 지도에 표기된 고후쿠바시, 그리고 지도의 오른쪽 위편에 이치코쿠바시一石橋가 표기되어 있다. 고후쿠바시를 건너가면 오른쪽에 오반쇼(大番屋, 경비초소)가 있고 그 너머로 제니가메바시銭瓶橋가 있었다. (지도 참조, 지도의 가운데 하단부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는 곳이 기타마치 봉행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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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보면 오른쪽이 고후쿠바시문, 그리고 사진 중앙부에 보이는 건물이 오반쇼, 그리고 그 왼쪽에 도산보리에 놓여 있던 제니가메바시다리이다.


사진 아랫부분이 광장인데, 이 광장에 기타마치봉행소北町奉行所가 있었다. 에도 마치 봉행은 도쿠가와막부의 직제의 하나로, 계정봉행, 사찰봉행과 함께, 삼봉행이라고 불렸고 에도의 행정, 사법, 경찰 등, 폭넓은 분야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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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제니가메바시를 건넌 곳에서 촬영한 것인데 왼쪽 다리가 제니가메바시, 그리고 다리 건너 보이는 작은 건물이 오반쇼, 그리고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이 바로 고후쿠바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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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보면 지금은 사라진 외호(바깥 해자)를 볼 수 있다. 사진 중앙위쪽에 보이는 넓은 다리는 야에스다리이다. 지금은 그 다리 쪽에 도쿄역 야에스 출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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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역 야에스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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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경에 발매된 화첩에 그려진 고후쿠바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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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을 더 보자, 사진 오른쪽의 수로가 바깥 해자이고 상단부에 검은색으로 보이는 지점이 도쿄역이다. 그리고 그 해자를 따라 위에부터 1.고후쿠바시다리 , 2.야에스다리 , 3.카지바시 다리 ,4.유라쿠초바시다리, 5.신유라쿠초바시다리, 6.마루노우치바시다리,7.스키야바시다리, 8.야마시타바시다리 이다. 이 다리중에 1,3,7,8은 에도시대에 세워진 다리이고, 2,4,6번 다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세워진 다리이다. 이 바깥 해자는 1950년부터 매립을 시작하여 1959년 고후쿠바시다리 앞 니혼바시 강만 남기고 매립이 완료되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치코쿠바시다리一石橋를 잠깐 알아보고 가자.



이 다리는 에도시대 초기에도 가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데, 이 다리가 파괴되었을 때 당시 막부의 금화 주조를 맡았던 고토 쇼자부로와 막부에 포목을 납품했던 고토 누이노스케가 자금을 대서 다리를 재건했다. 그 뒤 두 사람의 성인 고토를 음독(글자대로 읽는 것)하여 고토五斗(다섯 섬) 2개를 합쳐, 一石(열섬)을 만들었다고 해서 이치고쿠바시一石橋라 부르게 되었다. 에도시대 내내 칸다와 니혼바시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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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바시에서 본 이치고쿠바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


이치고쿠바시다리는 그 이름을 '야츠미바시八つ見橋'라고도 불렀다. 다리 위에 서면 자신을 포함해 8개의 다리(바깥 해자의 도키와바시(니혼바시강)·고후쿠바시, 긴다이바시,니혼바시의 이치고쿠바시, 니혼바시, 에도바시,· 도산보리해자 의 제니가메바시·도산바시)가 내려다보이는 것에서 유래되었고 에도의 명소로 유명해졌다.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명소 에도백경에서 '야쓰미의 다리'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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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이치고쿠바시


현재는 이치고쿠바시 남쪽의 바깥 해자와 도산보리 해자가 매립되고 다리 위를 지나는 수도 고속도심 환상선의 교각이 전망을 가려 때문에, 불과 토키와바시常磐橋, 그리고 나중에 만들어진 또 다른 토키와바시常盤橋, 니시가시바시西河岸橋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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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이치고쿠바시 다리


이 다리옆에는 마이고시라세세키 迷子しらせ石 라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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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기둥에는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잃어버린 아이의 특징을 적은 종이를 붙여 놓았다. 이 지역은 에도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번화가여서 아이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미아를 찾는 책임이 그 지역 동네에 있어서 마을의 책임자가 1857년에 이 기둥을 세웠다. 이런 기둥은 이곳 외에도 센소지나 료고쿠 지역등에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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