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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자의 백화점, 와코 이야기

by 늘 담담하게


긴자의 상업 시설들인, 복합 쇼핑몰, 백화점에 이야기를 쓸까 말까 고민을 했다. 쇼핑이라는 것이 맛집과 같이 주관적인 경향이 강한 것이고, 이미 다 알고 있는 정보를 굳이 써야 할까 했지만, 이 도쿄 여행 이야기라는 것이 도쿄 여행 가이드북을 쓴 저자로서, 한정된 지면에 모두 담을 수 없는 여행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 목표인지라, 긴자의 대표 백화점인 와코, 미츠코시, 마츠야를 다루기로 했다. 단순하게 이곳들이 무슨 물건을 팔고 어떤 것들을 사야 되는지에 쇼핑 정보에 더해, 언제 생겨서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은 긴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와코和光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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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코 본관은 긴자의 중심지인 긴자 4초 메 사거리에 있어 긴자 와코라고도 불린다. 와코는 1881년 12월 핫토리 킨타로(服部 金太郎 )가 21세 때 핫토리 시계점(현재의 세이코 홀딩스)을 현재의 긴자 와코가 있는 곳에서 창업한 데서 시작되었다.

%ED%95%AB%ED%86%A0%EB%A6%AC_%EA%B8%B4%ED%83%80%EB%A1%9C.jpg?type=w1 핫토리 킨타로

핫토리 킨타로(1860-1934) 수입 시계 판매점을 개업하고 후에 벽시계·손목시계, 제조 판매로 사업을 확대해서 "세계의 세이코"의 기틀을 다지고" 일본의 시계왕"이라고 불린 인물이다.


1860년 오와리국 나고야 출신의 핫토리 키사부로의 장남으로 에도 쿄바시(현재의 긴자 4초 메 부근)에서 태어난 핫토리 킨타로는 8세 때 서당에서 습자, 주판등을 배우면서 공부보다는 장사에 관심을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고물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가 11세 때 근처 잡화 도매상에서 전원살이를 하면서 언젠가 자신의 가게를 갖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이웃 시계점이었다. 13세의 핫토리는 긴타로는 시계점을 보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비 온 날은 손님이 적다. 그런 때에도 시계점의 점원은 수리를 하고 있다. 판매뿐 아니라 수리에서도 이익을 얻고 소중한 시간을 하는 일 없이 보내지 않아도 된다. 우선 시계 수선업에서 틈틈이 시작하고, 개업 자금을 모으기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다, 시계점이 된다"


그 후 킨타로는 14세 때 니혼바시 시계점, 2년 후에는 우에노 시계점에 들어가 시계 수리 기술을 배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1877년 킨타로는 자신의 집에 핫토리 시계 수선소를 개업하고 집에서 시계 수선을 하면서 다른 시계점에서는 직공을 겸하는, 시계점 개업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다시 4년이 지난 1881년, 새로운 서양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그 시기에 21세의 긴타로는 집 근처에 "핫토리 시계점"을 개업한다. 그는 저당 잡혔다가 돈을 갚지 못해 전당포에 소유권이 넘어간 시계와 고물상의 시계를 싸게 사서 수선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기일을 지켜 돈을 지불하는 상관습이 별로 없었고 한 달이나 두 달씩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킨타로는 정확하게 기일을 시켜 거래를 했고, 외국 상관으로부터 신뢰를 얻었다(당시 새로운 신문물들은 요코하마와 고베의 외국 상관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자 외국 상관은 안심하고 많은 상품을 융통해 주었고, 품질이 좋거나 참신한 것이 있으면 핫토리 시계점에 우선해서 판매했다.



이렇게 영업을 하던 그는 1886년부터 외국 시계의 도매 판매에 집중했고, 1887년 긴자 4초 메의 큰길의 새로운 가게로 이전했다. 이때부터 단순 수리 판매보다는 시계 제조를 생각했던 킨타로는 당시 회중시계의 수선과 가공을 의뢰했던 시계 장인 요시카와 츠루히코를 기사장(기술 장인중 가장 우수한 사람)으로 맞이하여 1892년 시계 제조 공장 정공사精工舎를 설립했다. (당시 킨타로는 31세, 요시카와 츠루히코는 28세였으며 정공사의 직원은 1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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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정공사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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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시계



%EC%A0%95%EA%B3%B5%EC%82%AC.jpg?type=w1 정공사 설립 당시의 벽시계
%EC%A0%95%EA%B3%B5%EC%82%AC_%ED%9A%8C%EC%A4%91%EC%8B%9C%EA%B3%84.jpg?type=w1 1895년의 회중시계, 타임키퍼

1895년에는 회중시계의 생산에 성공하고 정공사에서 제조한 시계의 판매를 핫토리 시계점에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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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94년에는 긴자 4초 메의 길 모퉁이 땅을 인수하면서 거대한 시계탑을 갖춘 시계점을 완성시켰다. 긴자의 상징 "핫토리의 시계탑"의 탄생이다. 당시 이 시계탑의 높이는 16m였다.


%ED%82%A8%ED%83%80%EB%A1%9C.jpg?type=w1 1907년의 킨타로 사진 당시 47세
1913%EB%85%84_%EC%86%90%EB%AA%A9%EC%8B%9C%EA%B3%84.jpg?type=w1 1913년의 최초의 손목시계


1913년에는 일본 최초의 손목시계 제조에 성공하고 판매를 개시했으며 1917년에는 가게를 회사조직으로 고치고, 주식회사 핫토리 시계점으로 했다. 청나라에 대한 시계수출을 시작하고 호경기를 맞아 핫토리 시계점은 시계업계에서 확실한 위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긴자의 사옥, 공장의 대부분을 잃었다. 이 때문에 낙심이 컸지만 킨타로는 다시 정공사의 재건에 착수. 이듬해 3월에는 벽시계, 12월에는 손목시계의 생산 및 출하를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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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의 정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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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째 핫토리 시계 상점 본사 빌딩 시계탑의 준공은 1932 년 6 월 10 일이었다. 관동 대지진의 피해에서 재건까지 11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 건물이 현재에도 와코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네오 르네상스 풍의 건물 (디자인 : 와타나베 히토시 )이다. 이 2대째 빌딩의 외장에는 지진 · 화재 대책으로 모두 천연석을 사용했다. 이렇게 일본 시계업의 큰 족적을 남긴 킨타로는 1933년 병마에 쓰러지고 1934년에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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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이야기들

현재 개인 브랜드 (세이코 제)의 시계와 보석 외에도 일본 국내외의 시계, 보석, 도자기, 가방 등 고급 장식품을 취급한다.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는 고급 전문점으로도 유명하다. 미술관인 '와코 홀'이 6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양한 행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관 시계탑은 긴자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시계탑에는 종루가 있고, 매장 영업시간 동안 매시 0 분에 웨스트 민스터 종소리를 연주 시간 수대로 울린다.



그가 남긴 어록 중에서 이런 말이 있다.

"모든 상인은 세상보다 한 발 앞서야 한다. 다만 한 발짝만 있으면 된다. 자꾸 앞서다 보면 세상과 너무 떨어져 예언자에 가까워진다. 상인이 예언자가 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 "


그 말에 더해서

" 한 번은 내가 다른 사람이 끼리끼리 장사를 하고 있을 때 외국 상관으로부터 물건을 사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이 상관 거래를 시작할 때는 외국에서 직수입을 했다. 타인이 직수입을 시작했을 때, 이쪽은 이미 자신의 손으로 제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제조를 시작했을 때는, 다른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제품을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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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토리 하우스


1933년에 건축된 핫토리 하우스는 패전 후 미군에게 접수되어 1945년 12월부터 전범 처리를 위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조셉 키네외 10명의 검사가 거주했다. 1948년 8월부터 도쿄 군사 재판 판결문의 번역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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