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어린이
좌충우돌이 많았던 첫 만남 이후,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교실에서도 잠깐 평온해 보이는 순간이 5분남짓 종종 찾아온다. 일주일 동안 이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루틴을 익히게 하느라 같은 말과 행동을 무제한 반복한다.
“겉옷을 벗어서 차곡차곡 접어보자. 먼저 배꼽 쪽에 팔을 모으고….”, “물통과 수저통은 여기 바구니에 넣자.”,”놀이하기 전에 손을 꼭 씻자.” 물론 이런 말들은 어른에게 하듯 무난한 말투로 하면 안 된다. 말과 말 사이 격한 칭찬도 넣어가며 친절하게 말해야 한다. 이제부터 한 달 적응의 시간 동안, 나는 우리 반 어린이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이거 하고 싶어.”
아이의 반말에 흠칫 하지만 이 아이의 마음을 얻기도 전에 존댓말을 안 쓴다고 뭐라 하면 안 된다.
“이거 하고 싶어? 색연필 여기 있어. 꺼내서 색칠해도 돼요.”
아이는 색연필 통에 있는 색연필을 꺼내려다 책상 밑으로 우수수 떨어뜨린다. 주위에 아이들이 몰려와 떨어뜨린 색연필들을 한 개 씩 줍거나, 발로 차기도 한다. 침착해야 한다. 절대 호통을 치면 안 된다.
“자, 모두들 마음에 드는 색연필을 골라서 색연필 통에 쏙 넣어주세요!”
내가 생각해도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나는 핑크!”
“유라(나)도 핑크!”
“아냐 내가 핑크 할 거야!”
“유라(나)도 핑크 할 거야!”
참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거만이라는 듯이 눈앞에 갈등의 씨앗이 터졌다. 아직 학기 초이기에, 교실에 넣은 재료나 놀잇감은 선별해서 소량만 넣었다. 핑크 색연필이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다. 순식간에 진이와 유라는 핑크 색연필의 양쪽 귀퉁이를 잡고 세게 잡아당긴다.
“자 얘들아, 그럼 색연필을 같이 잡고 넣어주자, 하나 둘 셋 쏙-! 어이쿠, 잘했어요!”
“내가 넣었어”
“아냐, 유라(나)가 넣었어!”
“같이 넣은 거 선생님이 봤답니다. 둘 다 핑크를 좋아하는 핑크 공주구나!”하며 나는 진이와 유라의 시선을 돌리려 시도해본다.
“교실에 또 핑크로 된 놀잇감을 찾아봐야겠다!”
내 말을 듣고 유라와 진이는 나를 졸졸 쫓아온다. 색칠을 하겠다고 색연필 통을 떨어뜨린 장본인, 지율이는 바닥에 남겨진 색연필 중 필요한 색연필만 골라 들어 색칠한다. 나는 교실 전체를 눈으로 훑어본다. 교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어린이에게 “정리”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정리”를 어떻게 재미있게 느끼게 할지, 정리하고 화장실은 어떻게 보내며, 모두 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무슨 수를 써야 할 지 막막하지만, 우선 이 시기에는 무조건 어린이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와, 여기 핑크 블럭이 있네! 핑크 블럭들로 핑크 공주님들의 핑크 성을 만들어볼까?”
나를 보고 있는 진이와 유라의 표정이 밝아진다.
우리 반 아이들과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잘 맺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관계는 봄 날씨의 변덕처럼 금방 일그러진다. 유라의 고집이 나타난 사건 중 하나. 그 날 오전은 실내 신체 활동실에서 신체 활동을 한 후 교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유라는 신체 활동실에서의 신체 놀이기구가 너무 재밌었던지, 내가 “정리해야 할 시간이에요, 놀이하던 놀잇감 제자리에 넣어 주세요!”라고 말하던 순간부터 눈썹이 일그러지고 볼이 빵빵해졌다. 이윽고 아이들이 모두 정리를 마치고 모였을 때 유라는 볼풀장에서 혼자 볼풀공을 던지며 이 상황을 외면했다.
“유라야, 얼른 오세요! 우리 내일 또 와서 놀이할 거야, 이제 교실 가서 맛있는 점심 먹자.”
그래도 유라는 볼풀공을 던지며 놀이한다.
“유라야, 어이쿠, 얘들아 잠깐만 기다려줄래?”
나는 아이들을 잠시 두고 유라 쪽으로 다가간다. 유라는 나를 피해 더 깊숙한 모서리 쪽으로 몸을 숨는다.
“유라야, 더 놀이하고 싶지? 그런데 선생님은 이제 친구들과 가야 해. 선생님이 가고 나면 유라만 혼자 남을텐데 그럼 속상하고 무섭지 않을까? 지금 선생님과 같이 가자.”
“흥.”
유라의 이 한 단어에 나는 실랑이가 길어질 것임을 직감한다. 아무리 회유하고, 정말 난 이제 간다고 한 들 유라는 끄덕 없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아이들이 방방 뛰다가 내가 못보는 사이에 사고라도 날까 걱정되었지만, 유라와의 이 대치에서 물러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유라를 도움 주시는 분 께 부탁드리고, 나는 아이들과 교실로 돌아가기로 한다. 교실에 돌아와 점심 먹을 준비를 하는데도, 유라는 한참 동안 오지 않는다. 아마 도움 주시는 선생님도 쉽게 유라의 고집을 다루기가 힘든 것 같았다. 한참 뒤에 저 복도 끝에서 뾰로통한 표정으로 빙글빙글 돌며 오고 있는 유라가 보였다. 단단히 심술이 난 것 같았다. 도움 주시는 선생님을 따라 어찌어찌 교실 앞 까지 왔지만, 이번에는 교실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유라야, 친구들 지금 다 점심 먹고 있어. 오늘은 후식으로 달콤한 과일도 나왔어. 선생님하고 같이 밥 받으러 갈까? 유라, 배고프겠다.”
“흥.”
아아, 난감하다. 나는 유라의 “흥.”에 휘둘리지 않고 우선 지금 무슨 시간인지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한다.
“응, 알겠어. 그럼 선생님은 친구들과 함께 교실에 들어가서 밥 먹을게. 유라도 함께 먹고 싶으면 교실로 들어와, 알겠지?“ 라고 말한 뒤 나는 들어가서 내 자리에서 침착하게, 아니 정신없이 밥을 먹는다. 나는 틈틈이 곁눈질로 교실 밖 복도 의자에 앉아있는 유라를 확인한다. 유라는 이따금 교실 창문을 흘깃 쳐다본다. 언제 교실로 들어올지 가늠할 수가 없다. 유라의 고집이 하루 종일 갈지, 세 시간 갈지, 한 시간 갈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식사가 끝나갈 즈음 유라가 앞문에 기대어 슬금슬금 들어온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유라야, 왔어? 배고프지, 얼른 부지런히 먹자. 달콤한 짜장 밥이 얼마나 맛있었는데?”하며 유라를 자리에 후딱 앉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다음번에 신체 활동실에서 교실로 돌아올 때는 또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어떤 장치를 생각해 놓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봄의 계절 동안, 유라는 종종 팔짱을 끼고 “흥!”이라고 말하며, 나를 난감하게 하였다.
봄은 새 생명이 돋고, 활기찬 계절이다. 동시에 “적응”의 계절이다. 유치원에 오는 어린이에게, 새로운 어린이를 만나는 나에게는 어떻게든 장소에 적응하고, 관계에 적응하고, 서로의 성격에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봄의 계절 내내 유라는 신체 활동실이나 바깥 놀이에서 교실로 돌아올 때마다,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 후 나는 유라의 행동 패턴을 알게 되었다. “유라야, 얼른 와! 우리 이제 들어가요.”라고 말하며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유라를 두고 다른 아이들과 먼저 들어가는 시늉을 보이면 유라는 슬금슬금, 티 안 나는 걸음으로 우리를 쫓아온다.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이다. 마음이 급할 땐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답답하고 화나는 마음이 올라오지만, 아닌 척 따라오는 유라의 모습이 귀엽고 실없는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유라가 어른이 되면 저 고집이 뚝심이 되어 뭐라도 해내길…바라며 유라의 걸음에 맞추어 나는 아이들과 천천히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