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생활과 4F (2)

일상의 지속

by 나뭇결


지난 글 말미에 나온, ‘서울에 사는 사촌들이랑 놀고, 맛있는 거나 좀 먹으면 나을 거다’라는 말을 엄마는 충실히 실행에 옮겼다. 중학생 시절 이후로 별로 본 적도 없는 사촌 언니가 근처의 대학에 다니고 있다며 대뜸 불러온 것이다.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촌 언니가 하나, 유학을 다녀온 사촌 언니가 하나 있는데 결국 자매이니 편하게 큰 언니, 작은 언니로 부르겠다.


작은 언니는 평범하게 좋은 대학의 좋은 학과, 유학을 하며 충실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식사하며 몇 가지 얘기를 했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절대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시점이 있었다.


“그냥 요즘 재미있는 게 없어. 분명 예전엔 좋아했던 것 같은데 이젠 재미없고, 더 보기도 힘들고. 그냥 아무것도 못 해.” “나도 그런데, 그럼 나도 우울증인가?” “…언니도 생각 있으면 병원 가보면 되지 않을까?”

쓸데없이 비관에 젖어서는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웃으면서 말하기는 했다. 그냥 요즘 힘들어서 내내 누워만 있는다며 자기 비하적 농담을 하는 것처럼 군 내 탓일 수도 있다. 내가 작은 언니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고작 그런 걸로 힘들다고 하는 거니?’

그러게, 그냥 게으르기 짝이 없는 인간일 수도 있겠네. 언니 말이 맞을지도.


그 이후의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서 기계적으로 대화했기 때문이다. 겨우 병원에 다니며 내가 아파서 그런 거라고, 내가 답도 없는 게으르고 무능력한 인간은 아닐 거라고 애써 희망을 품어보려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냥 내가 나약해서, 세상에 적응을 못 하는 사람이라서 고작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다는 이유로 인생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너무 힘들었다.


여러분 이거 다 헛소리인 거 알죠?


이래서 우울증 환자 앞에서 불행 배틀을 시도하면 안 된다. 정상인들 사이에서야 ‘야 너도 힘드냐? 나도 힘들다’ 정도 수준으로 대화가 가능하지만 우울증 환자에게는 ‘와 나보다 이만큼이나 더 힘든 사람이 있구나. 역시 내가 답이 없을 정도로 나약한 인간인가 봐.’라는 극단적인 사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고, 그래서 고통의 역치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손톱이 까진 정도인 고통조차 누군가에겐 온몸이 불타는 고통일 수 있다. 그 앞에서 ‘이래서 약한 것들은,’하며 혀를 찼다가는 정말로 죽음을 선택하는 수가 있다. 그걸 원하는 게 아니라면 그 고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라는 것이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티 내지 말고 O, X로 생각하자. 단, 이때 필요한 판단은 ‘이게 정말 힘든 일인가?’가 아니다.


이 사람이 정말 힘들어하고 있는가?’이다.


모 마법사 소설에서는 보름마다 늑대인간이 되는 힘든 사정을 ‘털 달린 사정’ 정도로 취급하며 힘들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느냐, 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는가!

그 인물들이 정말 ‘늑대인간 = 별거 아닌 일’이라 생각한 게 아니다. 친구가 힘들어하고 있으니, 도와줄 방법으로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본인의 경험을 근거로 다른 이의 고통을 깔볼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어쩌다 ‘내가 이만큼 힘들고도 살아남았으니 지금 네가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님’ 정도의 사고방식이 만연한 세상이 되었는지는 내가 사회학자가 아니니 모르겠지만, 그게 옳지 않은 태도라는 것 정도는 치가 떨릴 정도로 실감했다.

엄마 친구 아들, SNS상의 이상적인 모습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무상한 일인지 다들 알 만큼 알지 않는가. 그런데 왜 친구, 배우자, 자식이 힘들다는데 나를 가져다 비교하는 것인가? 현재의 그 사람과 비교할 대상은 과거의 그 사람이어야 한다.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내가 제공해야 하는 것은 시련을 버티는 것에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이지, 비교가 아니다.


다행히 큰 언니는 나와 같은 우울증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자신과 비교하느니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큰 언니가 추천한 병원에서 약물 치료와 상담을 병행할 수 있었으나 너무 늦은 도움이었고, 계절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다. 나는 결국 어거지로 학기를 마쳤다.

결석 3번을 찍은 시점부터 그 수업은 아예 포기해 버렸다. 자체 드랍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기들을 봐야 하는 필수 교양은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며 듣다가 도망쳤다. 총 7개의 과목을 신청했으나 살아남은 3개의 과목은 팀플레이가 있는 과목이었다. 내가 수업을 안 나간 것이니 성적표에 F를 받는 것이야 자업자득이지만 팀원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 과목만 아득바득 출석한 결과였다. 성적표에 적힌 성적은 4F였고 당연히 학사경고 대상이었다. 같은 우울증 환자였던 언니가 대학을 다니던 6년 전에는 쌍권총을 받아서 부모님께 혼났었는데, 난 딱 두 배인 것이다. 절대 언니처럼만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웃기지도 않는 청출어람에 헛웃음이 나왔다.


비이성적인 원망이 고개를 들었다. 어른들은 그랬잖아. 대학 가서 놀면 된다면서, 대충 놀면서 좋은 대학 졸업하면 어디든 취직할 수 있을 것처럼 말했잖아. 그렇게 숨 막히는 입시 시절을 보내게 해놓고 그 이후는 책임지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담임처럼 제자를 이끌어주는 스승은 무슨 주도적으로 따라오는 학생들만 가르치는 교수들만 가득한 대학 과정을 당연한 과정인 것처럼 장려하는 사회가 싫었다.

내가 정말 게을렀던 거라면 차라리 좋았을까? 자체 휴강해 버리고 인생을 즐겼더라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텐데, 방 밖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아 속절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면 결국 결석이 된다. 고작 몇 달 전만 해도 이해가 어렵지 않았고 집중하면 나름 재미도 있던 내용은 외계어가 되어버려서 허망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고 있으면 그냥 두 시간 동안 우두커니 앉아서 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다른 학생들은 멀쩡하게 수업을 듣고 한 두 시간 공부하면 친구들과 놀러 나가기도 하는데 나는 수업도 듣지 못하고 한 두 시간은커녕 서너 시간을 투자해 놓고도 이해하지 못한다. 내내 어두운 방 안에 박혀 꿈나라로 도피하고 있으니 놀러 가기는 무슨 인생은 더더욱 즐기지 못한다. 학교가 정신병 환자를 왜 신경 써줘야 하겠느냐마는, 별도의 교육과정이나 대안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세상이 싫었다. 하필 예약이 꽉 차 있는 학교 상담실도 원망의 대상이었다.


당연하지만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했고, ‘세상에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식으로 나를 꾸짖었다. 나는 그날 식칼을 들고 한참을 고민했고, 그제야 부모님은 내가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서울에서 치료받는 겸 자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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