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치를 위한 야합

백의종군하였습니다.

by 허용수

나는 울산광역시치과의사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지금은 임기를 마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젊었을 때부터 일개 학술이사로 시작하여 총무, 부회장, 회장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임원으로 봉사해 왔다.

치과의사회는 정치 단체는 아치과의사들의 권익을 위한 이익 단체이자 친목 단체이다.

과거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사이좋게 돌아가며 회장을 맡아 왔는데 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회원들이 투표로 직접 뽑는 직선제로 바뀌었다.

직선제는 여러 가지 장점도 많지만 정치적 성향을 띠며 편 가르기 같은 부작용도 생기기 시작했다.

평소 다 같은 치과의사들인데 각 후보의 선거 캠프에서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다가 선거가 끝나고 나면 서로 서먹해지며 외면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수석부회장까지 역임했어도 세 번이나 잇따라 도전한 재야의 후보에게 선거에서 패한 적이 있다.

치과의사회의 골이 깊어질까 우려한 회원들의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나로서는 오랜 세월 임원으로 봉사해 온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서운한 마음으로 패배의 아픔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게 바로 직선제인 것이다.

그저 오랫동안 간부직을 역임했다고 해서 당연히 회장이 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렇게 선거 패배 후 일반 회원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일 년쯤 지났을 때 회장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게 된다.

당시 울산치과의사회는 일 년 후 치과계의 엑스포라 할 큰 규모의 국제대회를 주관해야 했는데 회장을 비롯해 아무도 이 대회의 운영을 경험해 본 임원이 없었다.

나는 전임 집행부에서 이 대회를 총괄하는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기에 고민하던 회장님이 마침내 내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렇게 나는 부회장 겸 대회 조직위원장으로 집행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정치적 야합이라고 놀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식과도 같은 대회에 대한 애정이 컸었고 회장님의 대승적인 결단을 존중하였기에 흔쾌히 내린 결정이었다.


낙하산처럼 집행부에 합류하고 보니 임원들 대부분이 선거전 당시 상대 후보였던 회장님의 선거 운동원들이라 정치적으론 적들과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과연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자는 따가운 시선들을 이끌고 통솔해 나가야만 했다.

여태까지 나의 경력과 자존심은 모두 버렸다.

회장님의 운전기사를 자처하는 등 백의종군하는 낮은 자세로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보이니 차츰 임원들이 마음을 열었고 마침내 원팀으로 의기투합하여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있었다.

나는 경험을 내세워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회 경험이 없는 임원들이 엉뚱하리만큼 재미있고 참신한 아이디어들을 쏟아내 역대 어느 대회보다도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대회로 호평받았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노를 저었고 나는 그저 배가 헛돌지 않게 방향을 잡는 키잡이 역할만 했을 뿐이다.

다음 선거에서 나는 화합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아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로 회장에 당선되는 영예를 누렸다.




울산치과의사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캄보디아 치과의사회는 협회장 선거에 바이스 없이 후보들이 난립하지만 과거 킬링필드 시절 지식인들이 많이 희생되어 인력풀이 적은 탓에 선거가 끝나면 경선했던 후보들이 집행부 임원으로 사이좋게 합류한다고 한다.


척박한 땅으로 유럽의 빈국이던 아일랜드가 세계적 부국이 된 것은 정치개혁 때문이었다는 기사도 보았다.

당시 총리는 법인세를 인하하는 등 외국기업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제1야당 당 대표가 "정부 여당이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면 핵심사항에 반대하지 않겠다.

정부의 정책이 길에서 이탈하거나 함정에 빠지지 않게만 하겠다."

는 연설로 협치의 돌파구를 열었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세계 20대 제약업체 중 19곳을 유치하고 애플과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등 세계적 IT, SW업체의 유럽 본부를 유치해 유럽 시장의 60%를 점유하기에 이르렀다.



작금의 국내 정치상황은 어떠한가.

내란과 탄핵정국으로 국가의 위기 상황이다.

정치인들은 서로 국민을 위한다지만 실상은 자기를 지지하는 국민들만을 위한다는 것이니 이들은 국민들을 여야로 나누고 지역감정으로 나누고 세대로 나누고 남녀로 나누어 버렸다.

명절에 가족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 얘기만 나오면 부모 형제 간도 나누어 버린다.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언론과 유튜버들은 가짜 뉴스를 여과 없이 남발하고 있으며, 거리마다 유치하고 날 선 정치 공방 현수막들이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다.

사회의 지도층 원로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다 돌아가셨는지 누구 하나 쓴소리 하는 분이 없다.

표류하는 대한민국호가 순항하기 위해선 똑똑하고 부지런한 국민들에게 방향을 잡아줄 키잡이가 필요하다.

날씨는 점차 무더워져 가는데 정치인들이 지긋지긋하게 싸우는 건 짜증이 나서 더는 못 봐주겠다. 대선을 앞두고 치열한 정치 공방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있는 지금, 선거의 결과에 승복하고 서로 협치를 해서 이 국가적 난국을 속시원히 날려버릴 쿨한 정치를 보여주길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