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아나. 이름에도 복고가 유행할지.
나의 큰딸 이름은 '희진'이다. '허희진'.
지금은 결혼을 해서 미국에 사는데 미국에서는 이름이 그냥 '희'로 불린단다.
이게 다 내가 여권에 딸의 영문명을 엉터리로 기재했기 때문이다.
'허 희진'(영문자는 개인정보라 생략)으로 성과 이름 사이에만 공백으로 띄워야 하는데 '허 희 진' 이렇게 한 글자씩 모두 공백으로 띄워 쓰는 바람에 중간 글자 '희'가 이름이 된 거다.
미국식 이름과 성의 구분을 할 줄 몰라서 생긴 착오다.
그래도 여전히 고치지 않고 그 이름 그대로 쓴단다.
내 이름의 성씨인 '허'는 영문 알파벳으로 대개 'HEO' 또는 'HUR'을 많이들 쓰는데 나는 가장 발음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HER'을 쓴다.
그야말로 '그녀의 용수'이니 뭐 뜻도 좋고 만족스러운데 외국 입국심사관이 자꾸 원숭이 보듯 쳐다보는 게 기분 탓일까?
작은딸 이름은 '희은'이다.
제 할아버지가 '옥'자를 내려서 '희옥'이 될 뻔한 걸 제 엄마가 촌스럽다고 시아버지랑 대치 끝에 겨우 지켜낸 이름이다.
그런데도 개명을 하겠단다.
우리 딸은 연예인 지망생인데 주위에서 이름에 'ㅎ'이 연달아 있어 발음하기가 안 좋다고 입을 댄단다.
'허'자도 여성 이름에 어감이 안 좋아서 성도 바꿔버리고 싶지만 그럴 순 없으니 이름만큼은 꼭 바꾸겠단다.
그래서 바꾼 이름이 '다인'이다. '허다인'.
애비 마음에 서운하고 괘씸한 생각도 들었지만 평생 쓸 자기 이름을 자기 마음에 드는 걸로 바꾸겠다는데 어쩌겠나.
그리고 바꾼 이름이 예쁘고 발음하기도 좋아 나도 마음에 든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내가 가장 먼저 그리고 자주 불러준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꾼다는 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라에서도 쉽게 개명을 허락하지 않아 절차가 무척 까다로웠다.
어른들이 너무 의미만 강조하다 보니 때로는 놀림받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많았고 여자 이름은 뜻도 없이 아무렇게나 짓는 경향이 많았다.
하지만 이름과 사람의 운명 간에는 무시 못할 연관성이 있는 듯도 하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이름에 '돈'자가 들어간 사람들은 대체로 비만인들이 많다.
정형돈, 돈스파이크..
그리고 나처럼 이름에 '용'자가 들어간 사람들은 아담하고 귀여운 이미지가 있다.
'성룡', '장용', '이상용' 등등.
우리 치과의 단골 환자분들의 성함은 나도 자주 보니까 외우는데 '병균', '병환', '병석' 같은 분들은 이름 때문에 자주 오시는가 싶기도 하다.
'홍중태'님은 아주 상태가 심각할 것 같다.
'방금자'님은 왠지 잘 주무실 것 같고 '조금자'님은 불면에 시달리실 것 같다.
치과명이 이름 때문에 늘 의심받는다는 '문희만'선배님, 잘 지내시죠?ㅎㅎ
개명 절차가 간단해지다 보니 이름 때문에 한평생 한이 서린 중년들도 이젠 가차 없이 이름을 바꾸는 모양이다.
아내는 장인께서 '수정'이란 예쁜 이름을 주셨고 본인도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
하지만 지금 나이에도 개명을 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많단다.
내 어머니의 함자는 '금자'씨다.
평생을 잘 써 오시다가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이제 팔순이 넘으셨는데 '현아'씨가 됐다.
뭐지? 연애라도 하시나?
이웃사촌으로 지내는 아파트 옆집 식구들은 부부와 아들 삼 형제까지 다섯 식구가 모두 한꺼번에 개명을 했다.
어디 유명한 작명소에서 많은 돈을 주고 이름을 받았단다.
자신감 넘치고 유능한 그 집 아빠가 해외를 누비며 돈도 잘 벌었는데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으로 10년 동안이나 일을 못 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한 가정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는 크나큰 사고를 겪다 보니 뭐라도 붙잡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름 변경은 폰 번호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이다.
어쩌면 현재까지의 과거는 모두 부인하고픈 마음일지도 모른다.
새 번호 새 이름을 모두에게 다시 각인시켜야 하고 은행계좌나 인증서 로그인 등 모든 사회적 인증을 전부 새롭게 리셋해야만 하는 엄청난 일이다.
그러므로 처음 이름을 지을 때부터 나중에 변경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잘 지어야 한다.
중국계 미국인인 우리 사위 이름은 '스턴 황'이다.
그야말로 '황고집'인 거다.
지금 뱃속에 있는 내 외손주의 태명은 '두부'다.
너무 순둥순둥하고 귀여울 것 같지 않은가.
이제 곧 태어나면 제 부모나 친할아버지가 어련히 좋은 이름을 지어주겠지만 나도 손주의 이름을 고민하는 행복한 사치에 빠져본다.
미국인이 되겠지만 너무 미국스럽지 않으면서도 국제적일 것.
그러다 '지니'는 어떨까 하고 아내에게 물어봤다.
기생 이름이라고 싫단다.
음.. 그렇군. '황지니'니까.
하지만 주체적 삶을 살아 간 여인으로 드높은 이름인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개성 있고 예쁜 이름들이 많다.
굳이 한자로 표기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순우리말이나 국제적 감각에 맞게 외국인 느낌이 나게 짓기도 한다.
그런데 가족처럼 여기는 반려견과 반려묘에게도 마치 사람처럼 이름을 짓는다.
큰딸이 키우는 진돗개 이름이 '수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흔하고 국제적으로도 손색없는 이름이다.
'꼰대희 TV'에 나오는 유명한 짤이 있지 않은가. 여자 아이돌 가수와 밥 먹으면서,
"가족관계가 어찌되노?"
"저는 세 자매예요. 채연, 채령, 채민, 채리, 채소 이렇게 해서..."
"그럼 마. 세 자매가 아니잖아."
"강아지예요."
"어디부터 강아지야? 풋. ㅋㅋㅋ"
다들 너무 이쁜 이름만 찾다 보니 사람 이름인지 개 이름인지도 헷갈리고 몰 개성화하기도 하다.
서양 사람들은 '주니어'라 해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우리는 너무 세련된 이름만 찾는 건 아닐까.
촌스런 옛날 이름이라고 찾지 않는 '철수', '영희 ', '만복이' 같은 이름들에서는 어떠한 영악함이나 삭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아나. 앞으론 드문 이름이 된 이런 정겨운 이름이 복고로 유행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