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는 3D 직종입니다.
환자가 뜸한 어느 날, 모처럼 원장실 책장 정리를 하다 보니 먼지 쌓인 스프링 노트 몇 권이 나온다.
젊은 날 치위생과 외래강사를 하던 시절 작성했던 강의록들이다.
20여 년 전 모 대학이, 신설된 치위생과에 달랑 교수 한 명만 두고 신입생을 받은 대책 없는 상황이 있었다.
마침 우리 치과에 근무하던 직원 중 한 명이 입학을 하면서 박사 학위가 있던 나를 소개해 해부학과 생리학 등 기초과목을 강의하게 되었다.
쉽게 시작했지만 하루의 강의를 위해 일주일 동안 쫓기듯 숨 가쁘게 강의록을 작성하고 컴퓨터로 파워포인트 작업까지 하느라 강의 전날은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기본 강의록은 살이 붙어 여백마다 색색의 펜으로 빈틈없이 빼곡해졌으며 그것도 모자라 포스트잇까지 덕지덕지 붙어서 손때가 묻어갔다.
방학 때면 모교 은사님께 부탁드려 치과대학 해부실습 참관 수업도 진행하는 등 어렵고 딱딱한 과목에 학생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나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그 후로 8년이나 더 하게 되었다.
소중한 경험이었고 '허사모'란 팬덤도 생겨 요즘도 가끔씩 제자들이 안부를 전해올 때면 보람도 많이 느낀다.
강의를 하면서 치위생사에 대한 나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치위생사들은 해부학, 생리학 등의 기초과목들 뿐만 아니라 치과대학에 준하는 대부분의 임상과목들을 배운다.
치위생사들이 이런 것까지 배울 필요가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치위생과는 처음엔 2년제 전문대학의 과정이었는데 3년제를 도입한 학교들이 점차 생기더니 지금은 3년제가 기본이 되었으며 4년제 일반대학에도 개설된 곳이 늘고 있다.
그들은 진료보조만 하기엔 아까울 만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전문적인 내용을 배우고 있었다.
소위 '문사철'학과들은 폐과 되는 학교도 많은데 치위생학과는 취업학과의 중심에 있어 인기가 있다.
그 후로 나의 치과엔 자연스럽게 간호조무사는 사라지고 치위생사들로만 채워졌다.
요즘은 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치과들이 치위생사들로만 직원을 채우는 곳이 많다.
그러다 보니 그간 치위생사들의 배출이 꾸준히 늘었음에도 개원가는 항상 구인난을 겪는다.
하지만 반대로 치위생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구직난을 겪는다고 한다.
일할 데는 많지만 본인이 만족하는 조건의 일자리는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소규모의 개인치과보다는 규모가 큰 대형치과를 선호하고 시골이나 도시 변두리보다는 중심가를, 지방보다는 수도권을 선호하는 것이다.
직업에 대한 긍지나 자부심도 적어서 평생 직업으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잦은 이직이나 결혼과 동시에 장롱면허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실제로 내 제자 중에도 과 톱을 달리던 우수한 학생이 지금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정말 아까운 학생이었는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평소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자주 했다.
11명이 뛰는 축구에서는 한 명이 퇴장당하면 10명이 11명과 싸워야 하는데 실력이 엇비슷하면 정신력에 따라 가끔 이기기도 한다.
하지만 5명이 뛰는 농구에서는 한 명이 퇴장당하면 4명이 5명을 이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는 남은 인원 한 사람의 비중이 축구에서는 1/10(10%)이지만 농구에서는 1/4(25%)으로 훨씬 크기 때문이다.
직원이 20명인 대형치과에서는 한 사람의 비중이 5%에 불과해 조직의 톱니 같은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직원 세명의 개인치과에서는 한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33%나 되므로 자기 한 명이 빠지면 치과가 잘 돌아가지 않을 만큼 소중한 존재가 될 것이다.
'허사모'였던 한 제자는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 직원이 세 명뿐인 갓 개업한 치과에 취직했단다.
치위생사는 자기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간호조무사들이었는데 젊은 원장님이 오직 진료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치과의 모든 행정 업무와 환자 관리, 직원 교육 등 살림을 도맡아 했단다.
마치 신혼부부가 없는 살림에 하나씩 늘려가는 재미를 붙이듯 그렇게 치과가 성장해 지금은 세 명의 원장에 직원 12명의 중견 치과의 총괄실장이 되었단다.
복지나 근무여건 등 취업 결정에 여러 중요한 기준들이 있겠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 가장 이상적인 직장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업무 강도면에선 치과 일이란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어서 이른바 3D 업종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환자들의 잇똥과 피를 만져야 하는 더럽고(Dirty),
복잡하고 수많은 재료와 장비를 취급해야 하니 어려우며(Difficult),
침이나 균이 튀어 감염되기 쉬운 위험한(Dangerous)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매력적인 3D 업종이기도 하다.
고통으로 시달리던 환자가 극적으로(Dramatic) 낫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약을 먹거나 발라서 치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즉각적인 손길이 개입함으로써 결과가 나오는 역동성(Dynamic),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로 인해 보람과 긍지를 찾을 수 있는 꿈의(Dreamming) 직종이다.
요즘 MZ세대들은 힘든 일은 꺼려해 쉬운 알바만 찾거나 아예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신캥거루족 또는 전업자녀, 자택 관리사 등 우스꽝스러운 신조어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그만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내 친구가 그러는데, 입사한 지 6개월만 지나면 사람이 태도가 달라지며 본색을 드러낸다고 한다.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선 자진 퇴사가 아니라 회사에서 해고를 당해야 하니까 일부러 태업을 한다는 거다.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연이어 쓰는 여직원은 월급은 나가는데 사람 얼굴을 못 봤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당당히 주장하고 누리는 걸 당연 시하기 때문에 비난할 수도 없다고 한다.
보람과 긍지, 열정페이 이런 꼰대 같은 소리는 통하지 않는 시대다.
치과의사들은 인력 문제의 해법을 치위생사의 배출 인원을 늘리는데서만 찾으려 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오히려 이들의 숫자를 파격적으로 줄여서 귀한 몸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
치위생사 과정이 학력 인플레이션이 되지 않게 많은 교육을 받는 그들이 전문인으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직업적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물론 인건비에 대한 부담으로 치과에서 모든 직원들을 치위생사로 둘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치위생사들이 간호조무사들과 업무 영역에 대해 다투지 말고 간호조무사들의 업무 영역 확대를 일정 범위만큼 수용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소수의 치위생사에 다수의 간호조무사로 운영하면서 치위생사가 진료보조 업무만이 아닌 전반적인 행정과 교육, 관리 업무 등을 다 맡는 전문가다운 멀티플레이어가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치과의 만성적인 인력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