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올해도 벌써 장마가 시작된 모양이다.
점심시간에 우산을 쓰고 공원 산책을 나섰다가 바지 밑단과 신발이 흠뻑 젖어버렸다.
통기성이 좋은 운동화라 쉽게 물이 스며들어 양말이 꿉꿉하다.
아내는 대학생 시절에도 비 오는 날엔 장화를 신고 학교에 갔단다.
애도 아니고 다 큰 아가씨가 비 온다고 장화 신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기면서도 무척 귀여웠을 것 같다.
아내는 비 오는데 장화 신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며 작년에도 국제시장에서 장화를 샀다.
그래서 그때 내 것도 같이 샀다.
작업용이 아닌 오로지 비 오는 날 신는 장화는 꼬마 때 이후론 처음이다.
그렇게 장화와 판초우의를 가지고 작년 장마철이던 어느 주말, 아내랑 영주 부석사로 여행을 떠났다.
판초우의는 캠핑을 즐기는 우리에겐 필수장비다.
우중캠핑 시 우산을 쓰고서는 텐트를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가 오니 한산한 데다 이따금씩 보이는 관광객들은 우산을 쓰고도 옷이 젖어 불편한 모양새다.
우리는 두 손이 자유로우니 손도 잡고 거리낌이 없었다.
개구쟁이 아이들처럼 일부러 물웅덩이를 첨벙 대며 낄낄거렸다.
뜻밖의 해방감을 느꼈고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행복했다.
작은딸 희은이는 범생이던 제 언니와는 달리 사차원의 정신세계를 지닌 엉뚱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담장 바로 앞이 우리 아파트라 걸어서 5분이면 등교를 할 수가 있었는데도 항상 지각대장이었다.
1교시 수업이 한창일 때 아무 거리낌 없이 교실문을 활짝 열고 교실로 당당히 들어가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희은이 이제 오니? 근데 책가방은?"
하고 물으시면,
"아참! 책가방!"
하면서 다시 천연스레 가방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수업 중에 선생님께서
"자기의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곳에 대해 각자 말해 볼까요?"
하셨는데,
다른 아이들은
"음. 엄마가 내 눈이 예쁘댔어요."
"나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요."
"날씬한 다리요."
이렇게 대답하는데
우리 희은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뼈"
라고 단답형의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하여 선생님을 웃게 만든 아이였다.
영혼이 자유롭고 다소 산만하기는 하지만 의외의 창의성을 기대하였기에 중학생이 되어서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3이 되어 고입시험을 앞두게 되자 제 엄마는 혹시 인문계 고등학교를 못 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인문고에 진학할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의 부모는 상담을 위해 학교에서 호출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희은이가
"엄마, 선생님이 학교에 오래."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떨어져도 좋으니 일단은 무조건 인문고에 지원하게 해달라고 조르기 마련이다.
우리도 그렇게 단단히 마음먹고 아내가 학교로 갔다.
이미 교실에선 여러 부모님들과 담임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상담 중이었다.
아내는 조용히 들어가 뒷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보시더니,
"희은이 어머니, 웬일이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희은이가 진학상담 때문에 선생님께서 부르신다고 해서요."
"하! 이 녀석이 또 제대로 안 듣고는...
어머니는 안 오셔도 됩니다.
희은이는 인문고 갈 성적은 충분히 됩니다.
희은이가 건성으로 듣고 잘못 전달한 모양이네요.
걱정 마시고 그냥 가셔도 됩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학부형들이 일제히 부러운 눈으로 돌아보더란다.
서울대를 보냈다한들 이런 뿌듯함에 비할 바였을까.
아내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나오면서 이런 평범한 성적으로도 엄마를 우쭐하게 만든 희은이 때문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단다.
아내는 매일 아침 내가 손수 내려 주는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한다.
아침이면 눈을 채 못 떠도 일어나자마자 원두를 꺼내 곱게 갈고 여기다 헤이즐넛이나 시나몬 등의 향 커피 가루를 일정 비율 섞은 다음 의식을 치르듯 정성스레 커피를 내린다.
편리하게 커피 드립 기계를 써도 되겠지만 굳이 드리퍼에 거름종이를 직접 깔고 끓인 물을 주전자로 조심스럽게 우려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내는 식은 커피는 질색을 하므로 드립 한 커피는 포트를 워머에 올려 따뜻한 상태를 유지하는 세심함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귀찮을 때도 많지만 전날 아무리 술 먹고 늦게 들어가도 매일 아침의 이 행사만큼은 웬만해선 빼먹은 적이 없다.
내가 직접 내린 커피를 아내가 저리도 좋아하고 인정해 주니 마치 일류 바리스타라도 된 양 커피 내리는 일이 스스로도 신나고 재미있다.
양도 많아야 한다.
거의 열 잔 분을 내려달래서 텀블러에 담아 종일 들고 다니며 홀짝거린다.
외출할 때도 보온병에 담아 지니고 다니다가 모임에 가면 지인들에게 맛보라며 자랑을 하기까지 한다.
무어 그리 대단한 맛일까만 이제 다른 커피는 못 마시겠다고 한다.
거창한 이벤트나 달달한 애정 표현을 못 하는 경상도 남자의 무심한 듯 소박한 이 아침 공양만으로도 별도 달도 다 따주고픈 마음을 알아주는 아내가 고맙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다.
다들 그렇겠지만 다이어트는 영원한 숙제다.
간헐적 단식과 운동을 병행하는 동안은 분명 체중이 주는 건 확실하다.
체중을 잴 때는 두려움 반 기대 반의 떨리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임한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면 밤 사이 공복인 상태를 유지한 채 아침 운동으로 땀을 뺀다.
그런 다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샤워를 해서 내 몸 안팎의 온갖 찌꺼기를 비우고 깨끗이 한다.
용변 전후로 수백 그램까지 차이나는 걸 경험했다.
터럭 한올의 무게조차 허락할 수 없기에 면도는 당연히 기본이다.
충분히 닦고 말리고 나면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맨몸으로 깊은 심호흡과 함께 체중계에 올라간다.
스킨로션을 바르는 것도 체중계에서 내려오고 난 후의 일이다.
그러니 이때가 하루 중 내 몸무게가 가장 가벼울 때다.
아침식사라도 하면 이보다는 더 증가하겠지만 나는 이때의 체중을 그날의 체중으로 기억하기로 한다.
수백 그램이라도 전날보다 줄면 기쁘다.
최근에는 100그램 차이로 드디어 몸무게의 앞자리 숫자가 달라졌다.
물 한잔에도 다시 돌아갈 숫자이지만 감격에 겨웠다.
즉시 못 입었던 바지를 꺼내 입어 본다.
조금 끼이긴 하지만 드디어 단추가 잠긴다.
오 예! 이런 게 행복 아닌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행복이란 의식하고 기대하는 순간 오히려 멀어질 뿐이다.
하늘에서 선물처럼 툭 떨어지는 거창한 것은 행운이 될지언정 행복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일로 웃어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몇 년째 소식이 없어 포기하고 있었던 막세라리아 난이 마침내 초콜릿 향이 나는 꽃을 수줍게 피워 올렸을 때, 대책 없이 떠난 여행지의 소박한 식당에서 별미를 맛봤을 때, 아내랑 중국식 냉면을 먹으며 국제시장 데이트를 할 때, 이런 평범한 순간마다 작은 행복을 느낀다.
기대치를 낮추고 들여다보노라면, 별것 없는 삶 속에서도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소소한 일상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것들이 차곡차곡 모여 인생이 되고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