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벌등안(捨筏登岸)

나도 이젠 자연인이다.

by 허용수

아침에 출근을 하고 보니 '아뿔싸!' 휴대폰을 안 가지고 왔다.

나이가 드니 자주 깜빡하는데 지갑을 두고 오면 그런가 보다 싶지만 휴대폰은 좀 당황스럽다.

출근해서 첫 진료까지 아침의 루틴이 모두 망해버렸다.

그날의 스케줄을 체크할 일정표가 없고 메시지나 톡으로 서클이나 단체의 소식을 접하거나 소통을 못한다.

지인들의 근황이나 경조사도 확인할 길이 없고 협회 소식지 등 정보 열람도 불가능하다.

어디 그뿐이랴.

휴대폰 속에 신용카드놔서 결재도 할 수가 없다.

지갑 없는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이다.

습관처럼 보던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의 영상 짤도 볼 수가 없다.

주식계좌 체크도 안 되고 은행업무 등 모든 게 붕 떠버려 무얼 해야 할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다.

휴대폰에 중독된 탓이다.

초조하고 안절부절 불안한 게 디지털 금단증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어쩌겠나.

우선 크게 숨 한 번 쉬고 따뜻한 차 한잔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행히 오후에 마님이 휴대폰을 가져다주었래 황급히 확인해 보니 의외로 뭐 별일 없다.

전화 온 곳도 없고 별 중요하지도 않은 광고성 문자 몇 개뿐.

세상은 나의 부재를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허탈하지만 그게 정상 거지.

당연한 얘기지만, 나의 일상이 타인에게 실시간 노출되고 나의 존재와 부재가 간섭받고 영향받는 게 오히려 이상하고 불편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요즘 SNS상에서는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여주지 못해 다들 안달이다.

브이로그라며 자신의 평소 모습과 비밀을 다 공개하면서 어서들 와서 봐 달라고 애원하듯 한다.

그렇게 인싸가 되면 인기를 얻게 되니 TV방송이 거꾸로 이들을 흡수하여 유투브화 되고 있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공개하는데도 혈안이 되어 도대체 비밀도 없고 프라이버시도 없다.

그들의 어머니를 동원하고 이혼과 결혼 등 가족사나 집 안방까지 리얼리티라는 명분 아래 다 공개를 한다.

아침에 침실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눈뜨는 장면부터 주방에서 밥 해 먹는 장면까지 왜 보고 있어야 하나 싶다.

심지어 밥 한 끼 얻어먹는다는 컨셉으로 일반인들의 집 안까지 침투하고 있다.

일반인들이나 연예인들의 짝짓기를 하더니 이젠 그들의 친구나 자식들의 짝짓기까지 예능이란 이름으로 지켜봐야 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대세인 만큼 우리는 남의 생활을 엿보데 익숙해지고 소셜 네트워크 밖으로 밀려나는데 불안감을 느끼며 살고 있 세상이다.


TV에 나오는 숱한 자연인들.

방송 프로그램이 두 개나 되지만 향후 십 년 간은 출연자 걱정은 문제없다고 할 만큼 산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단다.

그들이 그렇게 꾀죄죄하고 외로운 삶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 건강상의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적 속박과 간섭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SNS상의 인간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 허상에 불과한가.

만일 작정하고 사라지려면 구태여 산에 숨어 잠적하지 않아도 폰 번호만 바꾸면 되는 세상이다.

사는 곳도 연락할 방법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누구나 잊혀질 권리도 존중받아야 하고 고독을 즐길 권리도 있어야 한다.

이제는 사회적 관계망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하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울산광역시 치과의사회의 임원으로 봉사해 왔고 마침내는 회장까지 역임하였다.

하지만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지금은 임원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쌓았던 많은 명성과 영예가 다 허상이며 부질없음을 느낀다.

회장 재임 시절엔 치과 원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협회의 회장으로서의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느라 바빴다.

출근을 하면 협회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업무를 보고 받고 지시하며 공문 수발 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임원들과는 정례 이사회에서 회의를 하지만 단톡방에서도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논의 해야 했다.

유관단체와의 미팅 일정과 각종 회의, 출장, 행사 진행 상황 등을 확인하는 등 연락받고 연락할 일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모든 것이 휴대폰 없이는 불가능했다.

집회나 행사 때면 연단에 올라 대중의 시선과 관심을 받을 일도 많았다.

찾는 곳도 많았고 불려 다닐 일도 많았던 바쁜 일상이 당연시되던 생활이가 퇴임 후 이 모든 게 일순 사라지게 되니 한동안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무려 18년 동안 임원으로서 회무를 보고 회원들을 위해 봉사해 왔던 관성이 남아서 무언가 계속 바쁘고 또 바빠야만 할 것만 같았다.

후임 회장님과 임원들이 어련히 잘해나갈 일을 왠지 못 미더워 도와주고 자문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해소되면서 새 집행부 활발한 활동으로 문제없이 회를 잘 이끌어나가는 걸 보며 모든 게 나의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협회 회장 퇴임 후로도 몸담고 있는 크고 작은 모임들, 이를테면 골프서클이라든가 스터디그룹 등에서도 나이 순번에 따라 어쩔 수없이 회장을 맡게 되다 보니 주위에서 다들 '회장 도착증'이냐며 놀다.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사벌등안(捨筏登岸)'이란 말이 있다.

'뗏목은 버리고 언덕을 오르다'는 뜻이다.

고맙게 잘 타고 왔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뗏목은 강가에 놔두고 언덕을 올라야 한다.

사람들은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해 어느 정도 이루고도 만족할 줄 모른다.

산꼭대기까지 뗏목을 매고 가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고집과 노욕을 버리고 조용히 잊혀질 줄 알아야 한다.

애착을 지녔던 것들을 지니고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떠나보내야 새로운 세상도 열린다.

이걸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남들의 시선과 관심에서 자유로운, 이제는 드디어 나도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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