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 명당자리

나도 한때는 전설이었다오.

by 허용수

내 고향은 부산이지만 치과 개원은 아내의 고향인 울산에서 했다.

30여 년 전 당시 울산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역동적인 산업수도였기에 개업하기엔 최적의 입지였다.

온산의 석유화학단지도 있었지만 울산 동구엔 현대 중공업과 자동차가 있었고 그 배후엔 일명 '만 세대'라 일컫는 엄청난 직원 사택단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교통이 불편해 마치 고립된 왕국 같은 곳이라 그곳에 개업한 치과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전설적인 치과들이 많았다.

지금도 다소 과장된 '카더라' 전설들의 무용담이 회자되고 있다.

어떤 모 치과에서는 직원들을 3교대로 돌리며 원장님은 아침부터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진료를 시작해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환자를 봤다고 한다.

한 달 수입이면 당시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는데 정작 본인은 돈 쓸 시간이 없었던 분이었다.

결국 뇌출혈로 쓰러져 안타깝게도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일찍 은퇴하시고야 말았다.

또 어떤 곳은 아침에 환자들이 건물 입구부터 계단과 복도까지 오픈런으로 줄을 서 있는데 원장이 출근하려고 지나다가 새치기한다고 맞아 죽을 뻔했다는 얘기, 마감 때면 거래 은행의 직원이 돈 세는 기계를 들고 파출을 나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도 있다.




나는 이런 전설들 옆에서는 도저히 개업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처가가 있던 울산 남구의 옥동에 개업을 했다.

행정구역상 엄연한 울산시였음에도 버스 종점과 군부대가 있을 만큼 변두리 지역이었으며 울주군청이 있었고 시골 장터처럼 일주일마다 옥동장이 섰던, 시내라기보다 한적한 울주군의 어느 시골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장날이면 시골 어르신들이 장사를 하러 왔다가 군청에 민원도 보고 치과치료를 하러 오시기도 했다.

그중 할머니 한 분이, 여기는 시내도 아닌데 왜 이리 비싸게 받냐고 따져 물으시길래,

"할무이, 그라믄 여가 시내지 옥동군인교?"

하며 되물은 적도 있다.

옥동에서 좀 더 외곽으로 나가 울산 초입의 톨게이트 부근 무거동이란 동네에 개업한 선배는

"야, 내가 개업할 때는 치과 주변에서 소가 밭을 갈았다."며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는 저리 가란다.

물론 지금은 도시의 팽창으로 옥동도 무거동도 번화해지고 부동산 값이 높은 인기 주거 지역으로 변했다.




개업할 때 옥동은 워낙 변두리라 허허벌판에 상가 건물들은 일부 지역에만 몰려 있었다.

그 블록의 건물 중 한 곳에 개업을 했다가 인근 원장님께 불려 가 혼이 났다.

같은 건물도, 옆 건물도 아닌 그냥 같은 블록에 있는 건물에 들어갔을 뿐인데 상도의를 모른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분은 당시 울산의 대단한 원로여서 온갖 리를 듣고서도 그저 죄송하다고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울산도 치과가 포화상태라 더 이상 개원 최적지가 아니며 전설들이 나오는 독보적인 자리도 없다.

블록 안에 치과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 건물 안에서도 두세 개씩 치과가 우후죽순 들어서 있다.

규모가 큰 공장 같은 대형치과들도 많이 생겼고 이들과 덤핑경쟁을 하다 보니 오히려 시내 중심가가 변두리보다 치료비가 더 싸다.

서울은 강남의 일개 구의 치과 수가 울산 전체 치과의 숫자보다 더 많고 서울 강남의 임플란트 가격이 전국에서 제일 싸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강남의 초등학교에선 치과의사 집은 불우이웃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한다.




얼마 전 후배 원장님들과의 술자리에서 의외의 얘기를 들었다.

그 자리의 한 후배님은 개업할 당시 주변의 평판에 따라 울산에서 잘 나가는 세 곳의 치과를 선정해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한 곳이 바로 나의 치과였는 게 아닌가.

나도 어느새 후배들에겐 전설이 되었나 보다.

하긴 한창 정점을 이루던 내 나이 사십 대에는 나도 하루에 환자를 백 명 넘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변두리에서도 그저 묵묵히 동네치과로 자리를 지키다 보니 그리 되었는데, 내과도 아닌 치과에서 하루 백 명 이상 환자를 본다는 것은 요즘 젊은 원장들 입장에선 믿기 어려운 얘기다.

이러다간 나도 뇌출혈로 쓰러질까 봐 젊은 페이닥터를 고용해 보기도 했지만 진료의 질적인 면에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결국 고심 끝에 길 건너 대형 건물로 확장 이전을 하고 졸업 동기 둘을 불러 공동개원을 했다.

부속 기공실도 갖추고 직원 수도 12명으로 늘어나 중견 규모의 치과로 키웠다.

아마도 그때 우리 치과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에는 전설로 비쳤으리라.

하지만 공동개원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 때의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설이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욕먹을 일이다.

좋은 시절을 보낸 선배들이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후배들과 무리하게 가격경쟁을 하고 야간진료까지 하면서 아귀다툼하는 것은 원로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바로 옆에 개업했다고 불러다 야단칠 일도 아니고 설령 그랬다 한들 요즘 젊은 후배들은 눈도 깜짝 안 한다.

오히려 개업인사도 없이 그저 선배들을 소 닭 보듯 하는 시절이다.




전설이었던 옛 영화는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멀리서 일부러 찾아주시는 환자들도 있다.

경주나 부산 등 인근 도시에서 오시는 분도 계시고 변에 학원이 많아 외국인 환자들도 가끔씩 있다.

가장 멀리는 호주에서 오시는 분 있다.

나의 단골 환자 중에 호주로 시집을 가신 분이 있는데 그 나라는 치과 치료비가 비싸다며 자기 시어머님을 모시고 오셨다.

그 바람에 벽안의 백인 할머니를 치료해 드린 적이 있다.


예전 어느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한 동네에 A, B, C 세 치과가 서로 경쟁이 붙었다.

먼저 A치과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하는 치과'라는 간판을 달아 도발을 했단다.

그랬더니 B치과가 발끈해서는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치과'라고 간판을 달았다.

그러자 C치과는 그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하는 치과'라는 간판을 단다.

우리나라 최고와 세계 최고가 다 같은 동네에 있으니 그 동네에서 제일 잘하는 치과가 결국 최고의 치과라는 셈이 아닌가.

명당자리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시골이든 변두리든 신뢰와 성실로써 꾸준하게 지킨 자리가 곧 최고의 명당일 것이다.

나도 환자층은 글로벌하지만 한 때 나마 동네 치과의 전설서 기억되기만을 바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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