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발가락

오늘따라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네요.

by 허용수

나는 태어나자마자 폐렴으로 죽다 살아 난 것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잔병치레를 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유소년기에는 폐결핵을 앓아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병약한 아이였고, 걸핏하면 편도선이 붓고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사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성인이 되어서는 정신병이나 다름없는 신경성 위장병과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안과질환인 황반변성과 요로결석이 있었고, 운동이랍시고 골프를 시작한 후로는 만성적인 허리디스크와 족저근막염이 왔다.

적당히 게으르고 무절제한 식생활 탓에 지금은 고혈압과 고지혈증 약을 비타민처럼 매일 복용해야 하는 복부비만의 중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 번도 수술로 입원을 하거나 암이나 심장병 같은 절체절명의 심각한 질병은 없으니 짧고 굵은 몸으로 참으로 가늘고 길게 살아는 중이다.

이렇듯 나의 온몸은 마치 종합병원처럼 안 거쳐간 질병이 없었는데 양쪽 엄지발가락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왼쪽 엄지발가락은 심한 발톱 무좀과 함께 파고드는 이른바 내성 발톱으로 고통을 겪었고,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너무나도 끔찍한 통증을 동반하는 통풍을 앓았다.

내성 발톱쯤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엄청 고생을 했다.

하지만 통풍이야말로 내가 경험한 최고의 고통이었다.

평소엔 별로 의식하지 못하다가 통풍 발작을 일으킬 때면 나의 모든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다 엄지발가락으로 쏠리게 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듯했다.

나를 아는 지인들이 지금도 통풍 여부를 안부로 물어볼 만큼 나를 대표하는 질병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아버지의 장례식 때문인 듯하다.

급성 통풍발작이 일단 시작되면 아무리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소용없고 꼬박 일주일 동안은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한다.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에도 나는 급성 통풍 발작 중이었다.

맏상주인 내가 발에 얼음주머니를 찬 채 조문객들과 맞절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서 목례만 해야 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 속에 육신의 고통마저 더해져 도대체 슬퍼서 운 건지 아파서 운 건지 모를 만큼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 그렇게 아픈 발가락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에 우리 집은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집이었다.

'요꼬'라는 편물업을 가내공업으로 했던 부모님은 애기들의 '백일복'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아버지는 당시 '포니' 자동차를 구입해 우리 동네 최초의 마이카 시대를 연 유지였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타고 난 성품 자체가 사업과는 맞지 않은 분이셨다.

가내공업이 가진 한계도 있었지만 사양화되어 가던 '요꼬'를 다른 패션산업으로 발 빠르게 다각화하거나 공장 증설 등으로 가내공업에서 탈피해 중견기업으로 성장시킬 사업가의 마인드가 없었다.

전문 인력의 영입도 없이 그저 동네의 처녀, 총각들을 직원으로 고용하고 이웃집 동네 아줌마들에게 바느질 하청을 맡기는 전근대적인 경영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상을 졸업한 여직원 한 명이 주판을 놓으며 공장 전체의 회계를 담당했을 만큼 주먹구구식이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해 자금 융통이나 공장 경영에 관한 일체는 어머니와 공장장에게 일임하고, 아버지는 통장으로서 점잖은 유지 소리를 들으며 마을 주민들의 일에만 발 벗고 나섰다.

귀는 또 얇아서 남의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 부동산 투자에서도 사기를 여러 번 당했다.

공장의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고 채권자들이 집으로 몰려와 매일 소란을 피우게 되자 부모님 사이에도 다툼이 잦았다.

무너져가는 사업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던 아버지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백방으로 금 융통을 하러 다니던 어머니에 대한 의처증으로 가정 폭력이 심해져 갔다.

급기야 삽으로 가구를 때려 부수는 등 점점 심해지는 아버지의 광기 어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적개심을 불태웠고 어서 빨리 어른이 되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공장은 부도가 났고 집안 곳곳에 압류 딱지가 붙었으며 결국 집도 경매로 넘어갔다.

자가용에다 식모를 둘씩이나 두며 궁핍을 모르고 살던 우리 가족은 처음 맞는 가난에 적응이 안돼 힘들었다.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문틈으로 들이치는 겨울 찬바람에 웅크려 선잠을 자야 했고 스며든 연탄가스를 마시고 모두 죽을 뻔하기도 했다.

집요한 채권자들 때문에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하시고 어머니는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가셨다.

이미 중년의 나이에 체격은 왜소해서 험한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버지는 이때부터 인생 최악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세탁소, 택시운전, 광고회사 용역잡부, 자가용 운전수, 화학공장 노동자 등등 살기 위해선 온갖 육체적 노동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자학하듯 엄청난 흡연으로 달픈 삶을 하루하루 버티며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절망 속에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마침내 나에게 대학을 그만두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기를 종용하셨다.

막내는 아직 어리고 둘째도 대학을 보낼 형편이 안되니 인문고가 아닌 실업고를 보내야겠다고도 하셨다.

당시 아버지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대책을 말씀하신 거지만 나는 무능한 소리를 한다 아버지께 대들었다.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아버지 도움 따윈 필요없다고 했고 동생들 공부도 내가 시킨다고 큰소리쳤다.

그 후로 아버지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며 마침내 나와는 대화가 끊어졌다.

나는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도 받고 휴학을 해가며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안 해 본 게 없다.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오고 학교 휴게실에서 거의 기숙을 하다시피 했으니 당시 어머니나 나는 그야말로 각자도생이었 거다.

당시 부 채권자들은 학교까지 나를 찾아와 치과의사가 되면 부모님의 빚을 대신 갚겠다는 각서를 요구하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수업도 자주 빼먹는 은둔형의 소극적인 학교생활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와 가여운 동생들만 집을 지키며 고생을 했는데,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었던 둘째 동생이 방황을 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실제로 고생이야 막내 동생이 제일 많이 했고 부모님 사랑도 가장 받지 못했지만 그는 태어나 보니 이미 가난한 집이라 자신의 처지를 당연하게 여기고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방황을 하진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삼 형제 중 어머니를 가장 그리며 애틋이 여기는 효자 막내다.




아버지의 고생은 내가 치과를 개업하고서야 끝이 났다.

우리 집보다는 아버지를 위한 아파트를 먼저 장만했고, 돈 벌러 가신댔지만 그저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겨웠던 어머니도 모셔와 아버지와 다시 합치게 했다.

호강이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말년에 잠시 편안히 지내시다 얼마 안돼 폐암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무능한 아버지를 원망도 하고 당신처럼 살지 않겠노라 발버둥 쳤지만, 나도 아버지랑 닮은 삶을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업가가 아닌 치과의사로 살아온 만큼 경제적인 부침은 없었으나 나 역시 남에게 속아 부동산 투자 사기도 여러 번 당했다.

자식들과는 애정 어린 살가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도 니다.

치과의사회 등 타인을 위한 봉사에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았으니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소홀한 점이 많았다.

아버지는 힘든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도 끝까지 집 가족을 지키며 가장으로서의 책임마저 내팽개치진 않았다.

내가 치과의사가 되어 통영의 무의촌 보건지소로 발령을 받게 되었을 때다.

회사 말단 잡부로서 용달 트럭을 몰던 당신께서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책상과 전공서적 등 몇 안 되는 나의 이삿짐을 통영까지 실어다 주셨다.

고물 트럭이라 본네트에서 연기가 나며 몇 번이나 도중에 멈춰 서야 했지만 기어이 그렇게 말없이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우리의 몸 가운데 가장 밑바닥에서 더럽고 냄새난다고 홀대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몸의 하중을 견디는 소중한 발.

그중에서도 아버지 발가락인 엄지발가락의 고통을 등한시했더니 온몸이 다 휘청거린다.

무시와 원망을 받는 고통 속에도 말없이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엄지발가락.


유난히 무더웠던 올여름이지만 이제 추석도 머지않았다.

좀 선선해지면 아버지를 모신 하늘공원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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