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처럼 될라
나는 예전부터 체력이 약해 조금만 무리를 하면 편도선이 자주 붓곤 했다.
건조한 겨울철에 특히 심했는데 목이 부으면 침도 삼키기 어렵고 전신에 열이 올라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비인후과 신세를 자주 지게 되는데 잘 낫지 않고 증상이 오래 끌면 한의원을 찾기도 한다.
나을 때가 되어서인지 침술 효과가 좋아서인지 침을 맞고 나면 신기하게도 거뜬히 회복되곤 했다.
내가 단골로 가는 한의원은 원장님이 연세가 많으신 중국 화교분인데 환자도 별로 없어 사모님이 간호사 겸 두 노인네가 소일하듯 소소하게 병원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내가 가면 적적하셨는지 인자하신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시고 진료도 오랫동안 꼼꼼히 잘 봐주셔서 자주 들리곤 했다.
그러다 원장님께서 연로해 돌아가시고 한의원은 간판이 바뀌며 새로운 분이 인수를 하셨다.
의사가 바뀌었어도 예전 할아버지 원장님 생각에 여전히 그곳에 들렀다.
새로운 원장님은 아주 젊은 분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양의사와 한의사 두 가지 면허를 다 가지고 있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 자격을 따고 다시 한의대를 나와 한의사 자격도 딴 것이다.
이중면허가 있어도 개원은 양. 한방을 모두 표방할 수 없기에 한의원을 개원한 것 같았다.
나는 동. 서 의학을 망라하신 분이기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한 땀 한 땀 침을 놓을 때마다 원장님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고 침을 놓는 자리마다 피가 나고 너무 아팠다.
내가 아파서 움찔하고 신음소리를 낼 때마다 원장님의 호흡은 거칠어갔고 급기야 책을 펼쳐놓고 보기까지 하는 게 너무나 불안했다.
개업선물로 수건 한 장만 받고는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 한의원은 불과 일 년도 못 버티고 결국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른 곳에 가서는 한의원으로 개원했을지 일반의원으로 개원했을지 궁금하다.
비록 아직 임상 경험이 부족해 침술에 능숙하지 못하긴 했겠지만 한 번도 들어가기 힘든 의대와 한의대를 다 졸업했다는 사실은 대단해 보였다.
세상에는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예전에 사시, 행시, 외무고시를 다 패스한 이른바 고시 3관왕도 있었다.
우리 치과계에도 치과의사이면서 변호사인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의학과 법학에 두루 정통하여 변호사업에서도 의료 분야에 특화된 강점이 있고, 변호사를 넘어 정치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민주당 최고위원인 전현희의원, 김영환 충북도지사도 치과의사이다.
이외에도 의사나 치과의사이면서 타고난 재능을 살려 다른 분야에서 탁월한 활동을 하는 재주 많은 사람들이 많다.
'중증외상센터'라는 웹소설과 드라마로 유명한 한산이가는 의사보다 작가로 더 유명하고, 개그맨으로 방송에서 친숙한 김영삼 씨는 개원한 치과의사이다.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영화 주인공이었던 원로 영화배우 신영균 씨도 치과의사였다.
패티김과 혜은이를 키운 작곡가 길옥윤 씨도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논문까지 발표해 치의학 석사학위가 있는 치과의사이다.
이외에도 셰프, 가수, 작가, 연구원, 사업가 등 다양한 투잡 치과의사들이 많을 것이다.
대입시험 성적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아도 부모님의 기대에 의해 의대나 치대에 갔다가 뒤늦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된 경우일 것이다.
내가 대입시험을 볼 때만 해도 우리 학교의 이과에서 성적이 우수한 친구들은 다른 대학의 의. 치대보다는 서울대를 더 많이 갔다. 전교수석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갔고, 우리 반 일등은 서울대 생물학과에 진학해서 지금은 울산대 교수가 되어 나에게 치료를 받으러 온다.
신설 고등학교라 서울대 입학생 수를 늘리려는 학교의 입시 전략이 있기도 했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의. 치대보다 공대와 과학분야 학과가 더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너 나 할 것 없이 의. 치. 한. 약대 등 의약계열을 선호하고 있다.
유치원에서부터 의대 진학반이 있다지 않은가.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로봇과 우주산업, 첨단 AI반도체를 개발하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 영재가 더 필요하지 않겠나.
도대체 임플란트를 잘 심는데 얼마나 엄청난 두뇌가 필요할까.
첨단과학과 산업기술이 국가 경쟁력의 척도가 되는 오늘날에 공대에 인재가 몰리는 중국과 의대에 몰리는 우리나라의 실정을 비교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돼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방송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은 다들 공감했겠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만큼은 공대보다는 의대에 가기를 바란다.
심지어 의. 치전원 제도가 생기면서 이공계 박사인 과학도들조차 의료계로 진학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자도 결국은 월급쟁이이고 공무원인데 반해 의사는 그래도 자영업자니까 수입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정 갈등에서 의사들이 결사적인 투쟁을 하는 걸 보다시피 병원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여건이 예전 같지 않다.
수도권의 대형병원과 이른바 빅 5에 환자들이 몰리면서 이곳의 의사. 교수들도 결국 거대자본에 종속된 월급쟁이다.
분기마다 과별로 실적 비교를 해서 수입이 적은 과는 추궁도 당하고 눈치도 보는 영업맨인 것이다.
의료의 상업화와 영리화가 가속화됨으로 인해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필수의료과와 응급의학과, 중증외상학과 등의 위험하고 돈 안 되는 비인기과는 유지할수록 적자를 본다고 하니 외면받고 구색 갖추는데만 급급하다.
수도권의 거대병원 쏠림 현상 때문에 지방의 비인기과는 의사를 구할 수 없고 개원의는 점차 영세해지고 고사되는 실정이다.
이제는 사람을 잘 고치는 의사보다 돈 잘 벌어주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다.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의료광고를 허용하다 보니 의료의 상업성과 영리화는 점차 가속화되어 각종 기사성 광고로 이 땅엔 명의들이 넘쳐나고 있다.
게다가 어디 양의사만 있나.
그에 준하는 만큼 한의사까지 있으니 실로 의료의 천국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하던 사람들은 자꾸 환자가 되고 있다.
의사들은 격무에 시달리고 간호사들은 환자를 돌보기보다 컴퓨터로 차트정리하기 바쁜 가운데 병원만 돈을 번다.
필리핀에서는 치과대학 문턱이 낮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치과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다.
치과의사의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치과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택시기사 등 투잡을 뛰는 치과의사들이 많다고 한다.
재주 많은 우리나라 치과의사들의 투잡과는 다른 양상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우리나라 의사들도 언젠가는 필리핀과 같은 이유로 투잡을 뛰어야 할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