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자신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왜 생겨났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들이 지구에 살기 전부터, 그들이 본 적 없는 동물과 식물들이 지구를 채웠을 때 보다도 더 전부터, 어떤 생명체도 없던 때부터 바람은 항상 어딘가에서 불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타난 인간들은 가을엔 바람을 좋아했다가, 겨울엔 바람을 싫어했다. 봄에는 잠시 좋아하는 듯했다가 딸려온 모래를 보고는 괜히 바람을 탓했다. 그러고선 여름에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반겼다. 바람은 그들이 변덕스러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들의 짧은 생이 조바심과 불평을 만들었겠거니 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들은 말에는 왜인지 너무도 화가 났다. 아이들 몇이 모여서 재잘거리는 작은 공원을 지날 때였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바람이 되고 싶어"라고 한 아이가 말했다. 자신이 되고 싶다는 말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귀 기울여 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바람은 어디로든 갈 수 있잖아. 바다 위를 마음껏 달릴 수도 있고, 수풀 사이를 빠르게 지나갈 수도 있고. 힘들게 산을 오르지 않아도 작아진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고, 밤하늘의 별도 엄청 가까이 볼 수 있어!"
"매일매일 가고 싶었던 곳을 가 보고, 아름답고 좋은 풍경만 보고, 난 그렇게 자유롭고 신나게 살고 싶어. 아, 그리고 언제든 도망갈 수 있다는 게 최고야. 무서운 일이 있을 때에는 멀리 날아가 버리면 그만이잖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때때로 바람에게 그런 날이 주어질 때가 있었다. 들꽃이 가득 피어난 들판을 가로지를 때, 그 파스텔 색감으로 펼쳐진 꽃잎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감을 주었다. 햇볕에 널어놓은 이불 빨래를 지날 때도 좋았다. 그 포근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자신에게도 묻어나는 기분이어서, 그 위를 몇 번이고 스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날이 많지는 않았다. 바람 역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일부이고, 이곳의 힘에 따라 움직여졌다. 무거운 공기층에 치이면 언제든 가기 싫은 곳으로 밀려가야 했고, 그곳이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이든, 끈적한 녹색의 괴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늪지대든 자신을 밀어내는 힘이 끝날 때까지 달려야 했다. 넓은 벌판을 지날 때에야 마음의 여유도 좀 생기고 하지만, 좁은 틈새를 지나야 할 때는 뾰족하게 예민해졌고, 마음이 급해졌다. 분지 같은 곳에 처박힐 때에는 옴싹달싹 나오지도 못하고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그리고 쓰레기 매립지에는 바람이 안 부는 줄 아나? 그곳을 가로질러 나가면 인간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이리저리 자신을 쳐냈다. 무엇보다 가장 최악인 것은 그 모든 행선지를 미리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이 달콤한 하루가 될지 진흙탕 위의 하루가 될지 모르는 채로 하늘을 떠도는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때로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바닥에 끌릴 듯이 무거운 몸으로 밀려다니다가 후련하지도 않은 눈물을 뚝뚝 흘릴 때, 자신을 위로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지 않았는가. 쏟아지는 비에 자신들의 머리를 감싸기만 급급하였다.
그런 자신에게 자유롭다느니,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존재라느니 하는 말들을 붙여 놓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바람은 일부러 힘껏 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얼굴에 달라붙었다. "으, 갑자기 이게 뭐야!"하고 아이가 소리쳤다.
바람은 유유히 다른 곳으로 불어갔다. 바람의 삶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그 아이는 언젠가 알게 될까 생각하며. 어디론가 자꾸 향해야 하고, 그곳에 닿으면 좋은 지도 알 수 없다. 싫은 곳에서도 계속 나아가야 하고, 힘들게 다다른 곳에서 천대받기도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뭐 때때로 좋은 날이 있고, 운이 좋으면 그런 날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바람은 죽지 않으니 아이처럼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지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존재로 태어날 기회가 생긴다면 무엇을 선택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결정했다. 돌멩이. 자신은 돌멩이로 태어나서 바닷가의 가장 좋은 경치를 바라보고 앉아 수평선 위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매일 바라볼 것이다. 더 이상 떠돌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서 물결이, 바람이, 새들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어차피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이, 인간도, 바람도 제 뜻대로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돌멩이, 이리저리 굴러도 단단한 돌멩이가 제일 낫지 않겠는가. 바람이 다시 어딘가로 불어 간다.
[고래가 드리는 글]
어른이 되어도 아이처럼 울고 싶은 날들이 있습니다. 저는 눈물이 가득 차오른 날에는 자유로운 바람이 되어 하늘을 가로지르며 눈물을 비로 쏟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바람이 비를 뿌리는 것도 슬픔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바람의 생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바람을 흔히 자유로운 존재로 이야기하지만, 막상 생각해 보면 바람은 더운 곳도 추운 곳도 어두운 곳도 가파른 곳도, 어디든 밀려가야 하고, 모래바람이나 찬바람이 되면 제 탓도 아닌데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비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 눈물을 우산으로 가리고 돌아설 때는 몹시 서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때로는 봄바람이 되어 꽃향기를 머금고, 푸른 들판을 내달릴 때가 있으며, 하얀 눈송이를 싣고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 바람은 행복을 느낄 거라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네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바람의 생입니다. 그대가 지금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다면, 꽃향기를 머금고 푸른 들판을 달리는 날이 찾아올 거란 말을 건네며, 이 글이 그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