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_ Adlaide
감기가 지독한 모양이다. 어제 충분히 잠을 자둔다고 자 두었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열감과 목의 깔깔함이 오늘 하루도 쉽지 않을 것 같음을 암시했다.
더욱이 이제 체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인가 보다. 어제는 자면서 두세번의 잠꼬대를 한 듯하다. 내 스스로 깜짝 놀라서 깰 정도였으니 함께 방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부담스러운 소리로 들렸으리라. 꿈을 꾼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잠꼬대를 해대는 나를 보니 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돌아다니기만 했던 나에 대한 칭찬(?) 아닌 칭찬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아침에 체크아웃을 한 후에 비행기를 타고 에들레이드 공항으로 가서 그곳에서 날을 밝히면 되는 일정이었다. 8시에 일어나 느긋하게 커피 한잔과 빵 한조각으로 아침을 보낸 후 잠시 기타도 만져봤다.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큰 강아지(?)를 괴롭히기도 하고, 감기에 대한 걱정도 조금은 하면서 아침을 즐겼다.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비행기를 한시간 반 정도 비행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잠 밖에 잔 기억이 없다. 어디선가 날아오는 냉기를 피해서 창가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창가로 내리비치는 햇살에 기대어 잠을 청했는데, 눈을 떠보니 승무원들이 착륙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비행기에 내려 짐을 찾고, 안내데스크에 가서 공항이 24시간 개방되는지를 물었다. 나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했건만, 안내원의 친절한 말투와는 달리 그 대답은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11시에 공항을 폐쇄하고 다음날 새벽 4시 30분에 문을 연다는 것이었다. 밤에는 기온이 10도까지 내려간다는 말도 들었다.
'음... 다소 고된 새벽시간이 되겠지. 나 말고도 이곳에서 밤을 청하는 사람이 있겠지? 뭐 얼어 죽는 것 말고 험한 일이 또 일어나겠어?'
공항 주변을 한바퀴 쭈욱 돌아보았지만, 이곳에서 찬이슬을 피할 만한 곳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11시까지는 공항 안에서 버티다가 5시간만 밖에서 버티면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공항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간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
2005년도에 읽었던 책 같은데, 오늘 다시 읽어보니 그 책이 주는 또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근래에 들어서 나의 삶에 대하여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나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나름의 방법을 책이 다시금 건네어 주고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결국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고, 인생 속에서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노력하면서 살아야 할까. 아직 책 전체를 읽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 책을 통하여 다시금 뭔가를 생각 할 수 있는 계기를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감기기운이 가시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더워지면서 땀이 나고 있다. 나름대로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는 위장으로 공항에 머물기를 생각했지만, 단지 돈 35불을 아끼기 위해서 이 곳 공항에서 잠을 자기에는 너무 큰 리스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 노숙보다는 어딘가에 들어가서 편하게 잠을 자고, 또한 시내에 가서 감기약을 구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분의 시간도 채... 바로 짐을 싸서 공항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 비행기가 도착한 시간이라서 공항버스 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쩜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로 향하는 무리의 모습이 나에게도 천장과 침대가 있는 공간을 원하게 했는지도...)
시내에 있는 한 숙소(Annie’s Place)에 짐을 풀고 곧장 약국을 찾았다. 애들레이드 시내에는 시드니, 멜버른처럼 한인이 많이 사는 모양이었다. Central Market이란 곳에서 어렵지 않게 한인 상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물어물어 약국을 찾았고, 생소한 단어를 들먹거리면서 감기약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약 14불. 우리 나라에서는 2,3천원이면 구할 수 있는 이 약들이 이 곳에서는 이렇게 비쌀 수가. 그래도 타지에 나와 험하게 아프기 보다는 이렇게라도 약을 먹고 빨리 나을 수 있다면 그게 더욱 바람직하겠지. 약을 산 후에 그 인근에 있는 한인마트를 찾아서 잠시 구경을 했다. 작은 원룸 규모의 그 가게는 정말 한국의 가게에 온 듯, 내가 지금 갖고 싶고 먹고 싶은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특히 소주. 참이슬 Fresh라고 써있는 그 술을 9.5불에 팔고 있었다. 당장이라고 사서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었따. 하지만 감기도 그렇고, 내일 일정도 있고 해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5일 후에 다시 이곳에 왔을 때 반드시 저 술을 내 품에 꼭 안으리라는 생각을 남기고 돌아설 뿐... 참, 더불어 그곳에서 정말 반가운 물건을 하나 사왔다. 감기로 낑낑거리는 나에게 정말 산삼처럼 다가오는 그것. 바로 쌍화탕이었다. 1.3불에 파는 것을 주저없이 가져왔다. 오늘밤 잠들기 전 따뜻하게 데워서 먹어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시장 안에 한인 식당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뜨거운 국물과 밥을 먹으면 감기에 더 좋겠다는 생각에 선미네 김밥이란 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문을 닫는 중이었다. 다른 곳에 한국 식당이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갑자기 아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왜 이럴까. 돈이 그렇게 중요한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궁상맞게 행동할까. 난 아직도 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밥 한끼 제대로 먹지 않으려는 내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푸짐한 김치찌개나 육개장 대신 숙소로 돌아와 뜨거운 신라면 하나로 식사를 대신했다.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는 믿음에 오늘 저녁으로 준비했던 식빵 6조각도 함께.
약국에서 사 온 감기약을 먹었다. 12알이 들어있길래 이 정도면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픈 것 같다. 아니 아프다. 저녁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겠다. 따뜻하게 몸도 보호하고, 쌍화탕과 함께 약도 먹고. 타지에 나와서 고생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스스로 어설픈 감상에 젖지 않기 위해서도 나는 빨리 이 감기로부터 탈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훌륭한 일상이 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오늘 공항에 있지 않고 시내로 들어온 것은 정말 훌륭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칭찬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