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군중의 특성
...자유 의지들이 유기화되는 순간부터 의지들은 하나의 생명체를 닮게 된다.
-앙리 베르그송
지금까지는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도취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 도취라는 현상은, 이미 곳곳에 암시했듯이, 집단의 차원에서도 거의 같은 형태로 발견된다. 도취가 집단적 규모로 발생하는 곳에서는 집단 전체가 마치 도취를 일으킨 하나의 단일한 인격체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집단의 유기적인 성질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집단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정신은 집단 전체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일까? 도취의 개념을 집단 차원으로 정당하게 확장하려면 이런 식의 질문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집단의 본성과 기본 구조도 해명하지 않은 채 집단을 단순히 의인화한다면 철저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양한 형태의 집단들을 들여다보면서 집단의 구성 요소와 형성 원리 등을 최대한 포괄적으로 탐색해 볼 생각이다. 기본 원리의 측면에 집중하면서 대략적인 윤곽을 잡아나가다 보면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럼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집단에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한자리에 모여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겉으로만 보면 그들 사이에서는 아무 공통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땅 위에 뿌려진 모래알처럼 서로 일정 부분 거리를 둔 채 각자 자기 관심사에만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한 자극이 가해지는 순간, 마치 ‘세포들이 한데 모여 유기체를 형성하듯’*, 무리에 속한 개개인들이 하나로 융합되며 거대한 군중을 형성한다. 이 군중은 마치 하나의 의식을 지닌 단일 생명체라도 되는 양 동일한 행동 양식과 감정 반응을 나타내 보이며, 거기 속한 구성원들 개개인 역시 평소의 자신을 망각한 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 『군중심리Psychologie Des Foules』(1895).
집단을 사로잡은 어떤 힘에 의해 집단의 구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형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군중이 형성되는 모습을 약간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대략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이 군중 현상은, 비록 일상 현실에서도 가끔 경험되는 비교적 흔한 현상이긴 하지만, 그 극적인 효과와 변화 과정 자체의 불가해한 성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 개인과 집단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이 장을 이해하려면 군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 전제되어야 하므로, 여기서는 먼저 군중에 관한 핵심적인 견해 몇 가지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제시해 볼 생각이다.
주로 군중의 특성 묘사에 중점을 둔 기존 이론들은 얼핏 보면 상당히 복잡해 보이지만, 그 모든 설명은 결국 근본 원리에 해당되는 두 가지 특성으로 압축된다. 정신적 퇴행과 피암시성이 바로 그것이다.*
* 아래 내용은 주로 르 봉의 서술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설명은, 군중이란 주제를 다룬 후대의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질적으로 다른 두 과정인 ‘매혹’과 ‘감화’를 한데 뒤섞는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출발점으로 삼기엔 아무런 무리가 없다. 이 근본적인 결함은 3장 후반부에 가서 교정될 것이다.
일단 여기서 말하는 정신적 퇴행이란 의식적이거나 지적인 기능이 저하되고 본능적이거나 감정적인 기능이 강화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 주제를 다룬 다수의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듯, 군중을 형성한 개인은 평소의 성격이나 성품, 교양 수준에 상관없이 ‘무분별하고, 충동적이고, 성급하고, 무책임하고, 난폭한 성향’을 나타내 보이는 경향이 있다. 군중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성향은 군중 속에서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이 상실되는 동질화, 및 획일화 현상과도 필연적으로 맥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각 개인 구분시켜 주는 개성이란 것은 정신의 가장 세련된 측면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고유한 인격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닌 본능적 기반 위에 얹혀져있는 가장 발달되고 세분화된 측면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모든 특성들이 결국, 프로이트가 강조했듯이, 문명화된 정신의 상부 구조가 마비되고 잠재의식적 토대가 활성화된 결과라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한편, 군중의 또 다른 특성인 피암시성이란 문자 그대로 쉽게 암시받는 성향, 즉 노출된 주변의 자극에 의해 쉽게 영향받는 성향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맹신의 성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구성원들 간의 상호 암시와 전염 현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 성향은, 군중 행동의 특징인 강력한 방향성과 일사불란함을 설명해 주는 주된 요인 중 하나이다.
군중을 형성한 개인들이 평소 지녔던 분별력과 자율성을 상실한 채 외부 권위자나 주변 환경의 영향에 맹목적으로 휩쓸려 다니는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이 점에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특성 내부에는 어떤 과장 및 현실 왜곡 성향 또한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암시된 내용을 과도하게 맹신하면서 무조건적 따른다는 건, 그 암시의 출처를 무지막지하게 과대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과장 성향과 거기에 동반되는 현실 왜곡 및 무시 성향을 전제하지 않고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군중의 무모한 행동을 설명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피암시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과장 성향을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겉보기엔 달라 보여도 본질은 결국 동일한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 두 가지가 흔히들 말하는 ‘군중’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이다. 군중의 특성으로 열거되는 다른 모든 성향들도 사실은 이 두 가지 특성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간단한 이 두 가지 특성만 분명히 이해해도 군중 현상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는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중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개인과 집단 간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군중에 관한 기존 설명들은 군중 형성에 필요한 조건이나 요인들을 나열한 뒤, 그 모든 것들의 중심부에 암시라는 현상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지시해 보이는 데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들의 집합체에서 군중으로의 이행 과정이 아직 충분히 만족스럽게 해명되진 못한 것이다.*
* 프로이트,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 참조. 이 책의 전반부에는 군중에 관한 기존 견해들이 한눈에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해답을 얻어내려면, 군중에 관한 기존의 묘사 내용과 암시라는 핵심적 실마리, 그리고 이 현상과 관련된 우리 자신의 경험 기억들을 한데 모아놓고 바라보면서 그들 사이의 연관 관계를 직접 한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단 군중으로 변화된 집단들을 떠올리면서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준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럼 무엇보다도 먼저 군중 전체를 지휘하는 지도자나 우두머리의 존재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는 집단의 ‘의식’이나 ‘정신’과도 같은 인물로서 전체 집단을 이끌면서 구성원 개개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겉으로만 보면 그가 집단 전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도자가 전면에 부각되지 않거나 아예 없어 보이는 군중도 많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군중 역시 군중 현상의 그 모든 특성들을 빠짐없이 다 드러내 보인다. 어쨌든 강력한 지도자가 군중 형성의 필수 요건은 아닌 셈이다.
그러니 지도자를 군중 형성의 매개요인으로 성급하게 단정 짓기보다 구성원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다른 요인에는 무엇이 있는지 좀 더 찾아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군중이 형성되는 곳에는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된 욕망의 대상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공유된 욕망의 대상이란 점에서 앞으로 ‘공유표상’이라 부르게 될 이 요인은 구성원들을 내적으로 결집시키면서 집단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일단 정신적 퇴행과 피암시성이라는 군중의 특성 두 가지가 이 공유표상을 중심으로 발현된다고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군중심리 #르 봉 #프로이트 #피암시성 #퇴행 #상호암시 #전염 #동질화 #획일화
핵심만 추리다 보니 내용이 다소 빈약해진 것 같습니다. 군중심리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다음 화부터는 군중이 형성되는 원리를 다뤄보려 합니다.
https://blog.naver.com/slouu/222190550100
https://brunch.co.kr/@slouu/69
https://brunch.co.kr/@slouu/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