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이 과장되게 퍼져나가는 이유
지금까지 도취의 초점이 '내 것'(자아상징)과 '나'에 맞춰질 때 각각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도취의 초점이 반대되는 성질을 지닌 외부 대상(타인의 결점)으로 이전될 때 일어나는 일들을 묘사해보려 합니다.
8, 9화를 함께 보시면 내용이 더 와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관심의 초점을 주체의 외부에 위치시키는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관심의 초점을 외부에 둔다는 건 기본적으로 도취 대상과 반대되는 성질을 지닌 타인이나 대상을 향해 관심을 기울인 상태에서 행동을 이어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일단 이렇게 관심 중심이 외부로 이전되고 나면 당사자는 도취적 쾌락의 반대편에 놓인 대상을 밀쳐내고 거부하면서 비판과 공격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이 같은 공격성의 측면에는 자아상징과 자아상을 중심으로 한 도취의 영향력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아에 중심을 잡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인식과 행위의 특성이 외부 대상에 대한 인식과 거기서 비롯되는 행동 양식에도 그대로 배어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 특성이 완전히 같은 형태로 발현된다는 말은 아니다. 자아에 중심을 잡은 상황에서는 초점이 두 개로 갈리는 반면 외부 대상을 대할 때는 초점이 하나로 합쳐지는 만큼, 이 경우에는 자아상징과 자아상에 중심 잡을 때 나타나는 두 가지 성향, 즉 자기 복제와 팽창의 성향이 한데 뒤섞인 채로 나타나게 된다. 도취의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머금은 독특한 형태의 공격성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처럼 성질이 역전되고 뒤섞인다 해서 도취의 고유한 특성 자체가 변형되는 건 아니다. 각각의 특성은 분명히 식별 가능한 형태로 유지가 된다.
먼저 자아상징 중심으로 한 자기복제 성향은 대상에 중심을 둔 상황에서 공격적 언사의 반복과 확산이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의 문제점을 향해 도취적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부감을 자극하는 그 인식 내용을 되풀이해 재생산해내거나, 아니면 좀 더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비판하며 자신의 공격성을 주변인들에게 주입해 넣는 성향을 나타내보이곤 하는데, 이는 자아상징에 중심을 잡은 사람의 태도하고도 잘 들어맞는다.
즉, 인식 측면에서 일어나는 과시는 상대의 문제와 관련된 소문 등을 퍼뜨리는 비방이나 중상의 태도로, 행위 측면에서 일어나는 모방 요구는 자신의 비판에 함께 동참하도록 하는 일종의 부추김, 즉 선동으로 각각 전환되는 것이다.
한편 자아상에 중심을 둔 팽창 성향은 일차적으로 상대의 결점이나 문제를 과장하는 인식 왜곡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런 성향에 휩싸인 사람은 어떤 충동에 떠밀린 나머지 상대의 문제를 과장해서 보게 되는데,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건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부풀리는 도취적 자아의 성향이 대상 인식 영역에 반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과장된 인식이 상대의 결점을 부풀리는 성향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악을 과장하면서 흥미와 흥분을 느끼는 태도 속에서 가장 뚜렷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얼핏 보면 이런 태도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부풀리고 과장하는 건 그 자신의 화와 거부감을 자극하는 불쾌한 인식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태도가 완전히 불합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 전반에는 대비 효과에 대한 인식, 즉 ‘과장을 통해 외부에다 악이나 문제점 등을 뚜렷이 고정시킬수록, 그 반대편에 있는 선이나 옳음, 온전성 역시 더욱 선명히 강조된다’는 인식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차후 공격성 분출하는 과정에서 외부에 고정시킨 그 측면 거부하며 밀쳐낼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 쪽으로 최대한 관심 끌어 모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결국 그가 과장을 하는 건 이 끌어모음의 측면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상에 중심을 잡은 도취의 성질 결정짓는 건 바로 이 두 속성이다. 반복과 과장이라는 이 두 속성은 한데 합쳐져 도가 넘는 비판 끊임없이 쏟아내는 음성 도취 성향으로 굳어지게 된다. 일단 이런 성향에 휩쓸리고 나면 단순히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 비판 과정 자체를 내심 즐기는 지경까지 나아가기 쉽다.
물론 이런 비판이라고 해서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비판의 밑바탕에는 문제가 되는 측면으로 주의를 환기시켜 그 문제점을 교정하도록 촉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취적 성향을 걷어낼 때 모습을 드러내는 비판의 이런 측면 역시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온전성의 외관을 가장하는 건 단순히 무책임하고 기만적일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조차 있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비판적 태도에 건설적인 면이 있다고 해서 모든 비판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도취적 자의식이 배어든 비판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현실을 정반대 방향으로 왜곡하는 과장된 형태의 비판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대개 문제가 되는 측면과 그 배후에 놓인 가치를 제대로 구분 못하며, 따라서 종종 폐단을 바로잡는다면서 그 배후에 있는 가치까지 함께 훼손시켜 놓는 경향이 있다. 비판 역시 도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질을 띨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음성 도취적 공격성의 예로는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 아마도 가장 극적인 사례는 마녀 사냥이나 집단 따돌림 같은 현상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본성이 일치하는 이런 집단적 공격 행위들은 둘 다 개인적 차원의 거부감이나 경계심 같은 비교적 사소한 반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일단 여기에 음성 도취 성향이 유입되어 그 영향력을 행사하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기 시작한다.
즉,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그 인식 자극은, 한편으로는 소문이나 험담 등의 형태로 복제되며 확산되어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음모론적 성격을 띤 흥미나 쾌감의 영향 하에 변질되면서 그 내용이 비현실적으로 과장하고 왜곡된다. 말하자면 특정 개인으로 향하던 사적인 차원의 반감이 도취의 두 측면의 영향을 받아 증식과 팽창을 거듭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집단적 차원의 혐오와 분노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과정이 중간에 제지되거나 완화되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닫는다면, 집단을 장악한 공격성이 중심에 놓인 한 개인으로 수렴하면서 그의 인격이나 생명 전체를 파괴해버리고 말 것이다.*
* 이 전체 과정을 집단적 차원의 배설 행위에 빗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점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 분명해질 것이다.
도취적 비판은 이처럼 교정 의도를 맹목적 파괴 충동으로 변질시켜 놓는 경향이 있다. 문제를 단순히 밀쳐내 놓고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도취적 안일함이 극에 달한다면, 상대를 짓누르거나 짓밟으면서 솟아오르는 이런 공격성조차 정당하고 무해한 것으로 간주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밀쳐냄을 통해 관심 끌어들이는 음성 도취 성향이 항상 비판이나 비난의 형태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성향은 양성 도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박탈과 중첩의 측면으로까지 연장되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박탈은 과잉 추구를 위한 박탈이 아니라, 과잉 추구에 매몰된 개인이나 집단이 박탈해간 측면을 재박탈해오는 것에 해당된다.
이런 일은 강제력, 즉 힘을 필요로 하는 만큼 영향력 있는 권위자의 머릿속에서 시작되어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로 확산되어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그가 내세우는 주장은 주로 ‘올바름’이라는 도덕적 가치로부터 힘을 공급받는다. 즉, 그는 ‘박탈을 해가면서까지 성과를 축적했으니 이제 추구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그 몫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재박탈을 정당화하곤 한다.
그렇지만 이 같은 재박탈 행위는, 그것이 음성 도취에서 비롯된 ‘재박탈’인 한, 역시나 문제가 될 수 있다. 그 역시 도취 특유의 과장된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상대의 악을 과장하는 과정에서 부당함에 대한 인식이 과장되면, 정당함에 대한 인식도 과장되어 상대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기 쉬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가 자기 요구의 팽창된 측면 인식 못하고 고집을 부린다면, 정당함과 올바름이란 가치를 토대로 상대의 재원을 ‘박탈’해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양적 측면은 문제의 외관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동기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음성 도취에 휩쓸린 당사자가 강압적으로, 하지만 수적으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외관상의 정당함을 실현한다고 해보자. 겉으로만 보면 이 과정은 완전히 합리적이고 합당해 보일 것이다. 어쨌든 잘못된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들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런 태도에도 여전히 뭔가 어긋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즉시 감지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박탈을 해갔다고 해서 다시 박탈을 해오는 이런 행위는 뺨을 맞았다고 해서 즉시 상대에게 보복을 가하는 것만큼이나 조급하고 근시안적인 조처이다. 분노에 토대를 둔 이 같은 단순 반작용은 집단적 동기 및 의욕의 측면에 해를 끼치기 쉽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런지는 집단의 문제를 짚어본 뒤에야 비로소 뚜렷해지겠지만, 어쨌든 화와 공격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교정 행위가 근본적 해결책이 못 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해둘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완력으로 외적인 상황만 교정하는 경우와, 상대의 인식과 공감을 자극해 자발적으로 태도를 교정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비교해본다면 그 파괴적 영향력이란 게 어떤 것인지 좀 더 감이 잡힐 것이다. 아무튼 일단 여기서는 내적 동기의 측면이 중요하다는 사실, 이거 하나만 분명히 강조해두기로 하자.
#음모론 #마녀사냥 #집단 따돌림 #양성 도취 #음성 도취
혹시 몰라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이 글은 '내면에서 이런 충동이나 태도가 일어날 때 거기 휩쓸리지 말고 바라보는 태도를 취해보자'는 취지의 글입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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