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양식이 필요한 이유
지난 화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1) 행위에 매몰된 의식과 2) 그 배후에 자리 잡은 자아상, 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자아상의 영역도 몸처럼 지속적인 영양 공급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이번에도 초반 내용이 일부 중복되니 이점 참고해 주세요.
(...)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아상의 발달을 통해 획득된 여분의 공간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본능의 충족을 넘어선 정신적 활동까지도 함께 수행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온갖 것들의 의미를 숙고하는 그 모든 인간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바로 배후에 발달된 이 영역 덕택이다.
우리는 그 지점으로 물러나, 마치 몸을 가지고 신체 활동을 벌이듯, 기억의 총체를 가지고 사색 활동을 벌일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내적 조건은 신체적 태도에도 상당 부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잘 알다시피, 인간은 상체를 들어 올린 상태에서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기 때문에, 땅으로부터 일정 부분 거리를 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방된 두 손을 활용해 여분의 활동을 수행할 수도 있다.
행위자 의식에 매몰된 상태에서 벗어난 모습은 직립 보행으로, 배후에 있는 여분의 공간으로 물러나 사색을 하는 모습은 자유로운 손놀림으로 각각 표현되어 나온 셈이다. 그러므로 행위자 의식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자아상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문명화된 의식의 측면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설명만 들으면 자아상을 순전히 정신적인 성질만 지닌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인간은 동물에 비하면 상당히 정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아상이란 것에는 어떤 신체적 속성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자아상은 사실 고양된 신체, 혹은 정신적 차원의 몸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적 상태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한 인류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기 바란다. 당시 인간은 본능적 필요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해방됨에 따라, 자유로워진 두 손을 활용해 기본적인 신체 유지 수단 위에다 문화의 흔적을 새겨 넣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더 나은 음식과 더 안락한 거주처, 더 아름다운 옷가지, 더 편리한 도구 등을 만들어냄으로써, 단순히 몸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배후에 있는 자아상까지 살 찌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생존이란 급박한 문제로부터 정신을 일정 부분 해방시킨 결과, 그 여분의 정신력을 활용해 응축된 정신력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게 게 된 것이다.
이후 이 문화적 산물은 아마도 그것을 물려받은 다른 집단 구성원들의 기억 영역으로 흘러들어 가 그들의 정신력을 각성시켰을 것이고, 이렇게 고양된 정신은 다시 축적된 기존의 문화적 산물들 위에 부가되어 더 고차원적 문화적 산물을 형성해 내는 식으로 일종의 순환 고리를 형성했을 것이다.
즉, 외부에 축적된 정신력의 응결체와 구성원들의 내면에서 다시 활성화된 정신력의 총체는 서로 뒷받침하고 강화하면서 함께 발달되어 왔을 것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한 셈이다.
앞서 자아상을 정신적 차원의 몸이라 한건 바로 이 같은 사정 때문이다. 문화란 것이 기본적인 신체 유지수단의 고양된 측면이라면 그것을 향유하며 발달되어 온 자아상은 고양된 신체, 혹은 연장된 신체에 해당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양된 양분, 또는 정신적 양분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아의 한 측면으로, 몸이 음식 속성 반영하듯,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문화의 양과 질을 상당 부분 그대로 반영해 준다.
그렇다면 몸은 물론 자아상까지 함께 살찌우는 그 정신적 양분은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 이런 의미를 나타내주는 적합한 용어가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문화적 성과’ 등과 같은 기존의 용어들은 그 대상의 속성을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하므로, 지금부터는 그것을 편의상 ‘자아상징’이라 부를 생각이다. 그것은 배후에 자리 잡은 자아상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주체 자신의 상징적 대응물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이 같은 비교는 단순히 유비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아상은 실제로도 어느 정도 ‘신체적’이다. 왜냐하면 자아상 역시 몸처럼 지속적인 영양 공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동물이 사냥과 채집으로 획득한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몸을 유지해 나가듯, 인간도 자신의 자아상에 걸맞은 사회 문화적 성과물인 ‘자아상징’을 추구하고 향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아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 사회 문화적 성과라고 해서 반드시 겉으로 드러날 필요는 없고 주변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건 개인적이고 내적인 차원의 충족감이다. 따라서 그것이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에서 비롯된 실질적 성과이기만 하다면, 외적 형태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자아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획득된 기억이 소멸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현실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그 효력이 시들해지기 때문에, 자아상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획득물로 양분을 재공급해 줄 필요가 있다. 만일 이 과정을 소홀히 한다면 전반적인 자기 가치 관념이 저하되어 정신적 빈곤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실로 인간에게는 자아상의 보존이라는 이 과제가 몸의 보존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과정에서도 일종의 부작용이 발생하곤 한다. 획득된 사회 문화적 산물, 즉 자아상징을 구성하는 신체적 측면은 몸으로 흡수되거나 단순히 사용되면 그만이지만, 문화적인 측면은, 정신적인 그만큼, 배후의 기억 영역에 저장되었다가 언제든 다시 되살아날 수가 있는데, 바로 이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 정신적 획득물을 공유하거나 심화시켜 나가는 대신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반복적으로 되새기면서 자기 만족감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도취적 반복*은 실체 없는 공상적 포만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아상을 유지하고 고양시켜 나가는 정상적이고 온전한 과정으로부터 당사자를 이탈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도취가 비난을 받는 건 사실 이런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 반복이 항상 도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의력의 긴장이 수반되는 반복은 대상의 가치를 심화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3부에 가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도취란 느낌이 일어나는 기본 바탕인 우리 자신의 내적 구성은 어느 정도 밝혀졌을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의식이 배어있는 이 몸 위로 일상 행동을 주도하는 의식의 측면인 행위자 의식이 솟아나 있고, 몸과 행위자 의식의 배후에는 이 둘 모두를 포괄하면서 넘어서는 자아상이 드리워져 있다. 이 자아상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성질을 지니는 인격의 중심부로, 물질과 정신, 양자의 속성을 다소간 모두 머금고 있다.
한편, 이 세 요인으로 구성된 인격체 외부에는 자아 반영물이라 할 수 있는 자아상징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정신적 차원으로 고양된 양분과도 같은 것으로, 개체는 주기적으로 그 요인을 흡수하고 내재화함으로써만 신체적 힘과 정신적 활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이 처해있는 기본 상황이다. 도취의 본성을 해명하는 1장에서는 자아상과 자아상징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게 되겠지만, 행위자 의식과 자아상 사이의 구분 역시 집단 이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인이므로, 이 전체상을 반드시 함께 기억해 주기 바란다.
#자아상 #사회문화적 성과 #문화생활 #정신적 충족감 #자아도취
오늘도 찾아주신 독자님, 글벗님들 감사합니다.
평안하고 행복한 추석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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