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인식은 자아도취의 전제 조건이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고타마 붓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태도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자만이나 오만, 거만, 교만 등으로 표현되는 이 태도를 부덕하고 해로운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런 성향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서로에게 직간접적으로 신호를 보내준다.
그렇지만 이런 도취적 성향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성향이 왜 문제가 되는지, 어떤 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는지 충분히 명확하게 말해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걸 분명 느끼긴 하지만 그 태도의 본성과 의미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도취라는 이 문제를 이렇게 모호한 상태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이 간단해 보이는 문제 하나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갈등과 충돌이 다 파생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갈등과 분쟁의 뿌리와도 같은 것으로서, 모든 인간적 갈등의 저변부에서 항상 발견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독특한 정신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최대한 상세하게 해명해 볼 생각이다. 아마도 이 문제의 주위를 맴돌며 그 윤곽을 더듬다 보면, 그것이 생각보다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도취라는 이 태도는 자기 자신의 뛰어난 측면을 향해 관심을 끌어 모을 때 발생한다. 인격의 모든 측면을 고르게 감싸며 유지하던 관심을 강제로 끌어당겨 탁월성을 보유한 한 부분으로 중첩시킬 때 일어나는 정신의 팽창 상태,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도취’이다.
이 도취라는 과정이 일어날 때는 가슴이 가볍게 들뜨고, 머리 중심부에서 달콤한 쾌감이 발생하며, 상체 부근이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얼굴에 기묘한 화색이 드리워지기도 한다.
이 화끈거리는 흥분은 종종 안일한 만족감과 우월감으로 이어지면서 자기 가치감, 즉 자의식을 잔뜩 부풀려 놓는데, 이 느낌은 결국 신체 전반으로 배어들며 몸의 말단부로까지 퍼져나가다가 종국에 가서는 번식 욕구, 즉 성적 욕망을 넌지시 자극해 놓는다.
아마 도취와 연관된 경험들을 돌이켜보면서 당시 자신의 상태가 어땠는지 점검해 본다면, 대체로 이와 유사한 기분과 느낌들을 식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도취에 수반되는 이 축축 미지근한 쾌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술에 취했을 때 느껴지는 그 느낌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 마치 축적된 정신적 자원 중 일부가 부패하여 내면 어딘가에서 발효가 되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자기 자신에게 ‘취한다’, 즉 도취된다는 말도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이 같은 도취 성향은 극복이 필요한 미숙한 태도로 간주됨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이거나 동물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의식 기능과 자기 인식 능력이 일정 수준 이상 발달된 우리 인간종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정신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에게서는 이런 태도가 좀처럼 관찰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물이 이런 성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동물이 드러내 보이는 도취 성향은 그 빈도나 강도 면에서 인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사고 능력과 마찬가지로, 인간 특유의 정신적 조건하에서만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발현되는 다분히 인간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은 대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도취에 대해 이런 취약성을 지니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다면, 도취라는 현상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상당 부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도취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이 점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선 우리 자신이 지닌 기본 조건들을 간단히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일단 우리는 몸이란 것을 지니고 있다. 삶과 경험을 가능케 하는 기본 토대가 되는 것이 바로 여기 자리 잡고 있는 이 몸이다. 이 몸은 우리 자신을 현실에다 단단히 고정시켜 주는 일종의 뿌리인 동시에, 외부 세상과 작용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최초의 근원적 매개체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는 의식이란 것도 지니고 있다. 이 의식은 한편으로는 몸 전체를 골고루 감싸면서 몸에다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그 몸을 뚫고 솟아나기라도 한 듯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주변을 환히 밝혀주기도 한다. 몸의 상체 부분, 특히 머리 부근에 중심을 잡고 빛을 발하는 인식 기능의 중추, 그것이 바로 흔히들 말하는 그 의식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사실 보기만큼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의식이란 것도 그 성질과 기능에 따라 대략 두 부분 정도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의식의 전면부에는 일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앞으로 밀착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행동을 지시하고 이끄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의식의 측면은 일상적 관심사에 매몰된 채 행위를 이끄는 활동적인 의식인 만큼, 주체 인격의 중심부로부터 다소 괴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정신없이 눈앞의 일들을 처리해 나갈 때 자신의 의식 상태가 어땠는지 떠올려 본다면 이 의식의 속성을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의식의 이 측면을 행위를 주도하는 자아의 한 측면이란 점에서 간단하게 ‘행위자 의식’이라 부를 생각이다.
한편, 일상 활동에 사로잡힌 이 의식의 배후에는 보다 정적이고 섬세한 의식의 측면이 자리 잡고 있다. 축적된 기억의 총체와 함께 좀 더 깊은 곳에 머물고 있는 심층 자아, 또는 자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측면, 혹은 영역은 현실 활동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나와 있는 측면인 만큼, 머리보다는 주로 등 뒤쪽이나 가슴 부근에서 감지되며, 행위자 의식에 중심을 잡은 상태에서 뒤로 기대면서 전체적인 느낌을 더듬을 경우 전반적인 자기 가치 관념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끔씩 자아의 이 측면에다 ‘자아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곤 하는 건 아마도 주로 이 같은 사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식의 이 영역이 활동과 무관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적절한 상황이 조성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한층 더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그 영역으로 물러나 좀 더 본래적인 자신으로 머물면서 내외부 상황을 전체적으로 관조할 수도 있고, 축적된 기억들을 포괄적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추상적 사고 활동을 벌일 수도 있다.
게다가 설령 머리에 밀착한 그 행위자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 배후에 머물던 기억을 불러들여 현실에 유입시킴으로써 가능한 반응의 폭을 넓힐 수도 있다. 배후에 발달된 이 영역 덕분에 보다 고차원적인 활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쨌든 자아의 이 측면이 정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활동적이기보다는 사색적이고, 행위에 참여하기보다는 행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행위자 의식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따라서 일상 용법에 따라 이 부분을 단순히 ‘자아상’이라고 불러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동물과 인간을 비교해 보면 이 구분이 한층 더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니 먼저 동물이 처한 조건을 한번 떠올려보기 바란다. 동물은 이동 시 네 발을 다 사용하기 때문에 머리를 땅 쪽으로 숙이고 다닐 수밖에 없다. 동물은 이 상태에서 거의 전적으로 생존을 위한 신체 활동에만 전념한다.
아마도 감각과 본능에만 몰두하는 모습, 즉 행위자 의식에 완전히 매몰된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을 것이다. 의식이 행위자 의식을 향해 꽉 조여져 있는 만큼 신체 유지 이외의 다른 활동에 좀처럼 관심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아상의 발달을 통해 획득된 여분의 공간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본능의 충족을 넘어선 정신적 활동까지도 함께 수행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온갖 것들의 의미를 숙고하는 그 모든 인간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바로 배후에 발달된 이 영역 덕택이다.
우리는 그 지점으로 물러나, 마치 몸을 가지고 신체 활동을 벌이듯, 기억의 총체를 가지고 사색 활동을 벌일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내적 조건은 신체적 태도에도 상당 부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잘 알다시피, 인간은 상체를 들어 올린 상태에서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기 때문에, 땅으로부터 일정 부분 거리를 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방된 두 손을 활용해 여분의 활동을 수행할 수도 있다.
행위자 의식에 매몰된 상태에서 벗어난 모습은 직립 보행으로, 배후에 있는 여분의 공간으로 물러나 사색을 하는 모습은 자유로운 손놀림으로 각각 표현되어 나온 셈이다. 그러므로 행위자 의식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자아상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문명화된 의식의 측면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 언급된 ‘행위자 의식’과 ‘자아상’은 불교 유식학의 6식과 7식에 거의 그대로 대응된다. 의식의 이 두 측면을 구분하는 추가적인 근거는 집단 심리를 다룬 2장의 내용을 참조할 것.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직립보행 #자기 인식 #자아도취 #행위자-의식 #자아상 #사량식
의식의 이 두 측면은 집단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됩니다.
실무를 담당하는 사장과 그 배후에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회장, 실질적 실권을 쥔 총리와 집단의 상징적 존재에 해당되는 국왕 등(행동대장과 보스..)을 떠올려 볼 수 있겠지요.
이 내용은 2장에 가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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