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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머금은 고통, 고통을 머금은 쾌락

도취적 쾌감과 공격성은 서로를 지탱한다

by 이정표
5화와 6화에서 본 것처럼 도취나 자만, 교만 등으로 불리는 태도는 1) 쾌감에 초점을 두는 양성 도취와 2) 공격성에 초점을 두는 음성 도취,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큰 그림을 하나 그려보려고 합니다.

이번 화는 분량이 좀 많으니 쉬어가며 읽어주세요.




3. 쾌락을 머금은 고통, 고통을 머금은 쾌락


지금까지 설명한 도취의 유발 방식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기 바란다. 그러면 상대를 짓누르며 올라서는 태도인 비교우위를 매개로 자기 예찬과 자의식적 비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우위에서 공격적 측면을 강화할수록 자의식적 비판 쪽으로 기울게 되고, 쾌감의 측면을 강화할수록 자기 예찬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어느 한쪽 측면이 전면에 부각된다 하더라도 그 안에 그와 정 반대되는 측면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 속에 내재된 그 반대 속성은 적절한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 드러나 도취라는 태도의 역설적 성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일 것이다.


따라서 이 도취라는 태도의 본성과 그 효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도취의 전 과정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전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이 도취라는 과정을 각각의 도취가 일어나는 구체적 현실 상황에서 떼어내어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보기로 하자. 이 도취적 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원리, 또는 심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찾아보기로 하자. 그러면 아마도 당사자의 관심이 중심부에 놓인 한 점으로 흡수됨과 동시에 사방으로 공격적으로 확산되기도 하는 아주 독특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게 될 것이다.


쾌락을 일으키는 한 지점을 향해 강력하게 빨려 들어가는 힘과 그 쾌락을 중심으로 급격히 확산되어 나오는 힘이 서로를 완전히 지탱해 주는 이중적 과정, 그것이 바로 도취라는 현상의 본질이다.



ChatGPT Image 2025년 9월 13일 오전 02_29_06.png 자신만 긍정하고 나머지 모두를 배척하는 자기 중심성.



이 같은 관심의 흐름은 인간 행동의 거의 모든 영역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와도 같은 것으로서, 높임과 낮춤, 긍정과 부정, 긺과 짧음 등과 같은 개념 차원의 대극 쌍이 느낌의 차원으로 확대되는 방식을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렇다면 이 심상을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마도 도취 과정 자체의 내적 역동을 드러내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나르키소스의 운명을 다룬 서구의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신화에는 쾌락과 공격성을 동시에 촉발시키는 도취적 관심의 이중적 흐름이 아주 극적이면서도 생생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나르키소스는 수많은 요정들의 구애를 차갑게 거부한 죄로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이다. 그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로부터 저주를 받은 이후 강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눈 떼지 못하고, 마치 그 영상에 기를 빨리기라도 하듯, 점차 쇠약해지다가 결국은 죽음 맞이하게 되는데, 이 같은 그의 운명에는 도취적 쾌감과 공격성, 혹은 파괴성 사이의 연관성이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일부 저자들은 도취적 쾌감으로부터 공격성이 발현되어 나오는 방식을 한 층 더 구체적 서술하기도 한다. 예컨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는 물 위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만지려 시도하다 그 영상이 계속해서 흩어지는 걸 보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비통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물 위의 영상이 그 비실재성으로 나르키소스의 구애를 거절하는 것이다. 이 같은 매혹과 거절의 연쇄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데, 이는 자신에게 매혹당한 요정들의 구애를 매몰차게 거절한 그 자신의 공격성이 그대로 되돌아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나르키소스의 태도를 보면 이런 저주받게 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수다쟁이 요정 에코의 구애를 거절하며 이렇게 소리친다. “이 손 치워! 차라리 죽지. 너 같은 것의 품에 안겨?” 이 말을 들은 에코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안겨.....”라는 말을 내뱉고는 굴욕감에 숲으로 숨어들어 여위어가다 결국 몸의 형체를 잃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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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신화에는 나르키소스의 차가운 거절 행위와 도취 성향 사이의 연관관계가 다소 거꾸로 묘사되어 있다. 즉, 현실에서라면 나르키소스의 공격적인 태도를 그의 도취 성향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님프들의 구애를 차갑게 거절하며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는 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 경우 도취적 쾌감과 공격성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은 오직 나르키소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흩어져버리는 물속 영상의 상징적 ‘거절’ 행위를 통해서만 확인된다. 도취라는 정신 과정의 본성을 뚜렷이 드러내주는 매력적인 신화이긴 하지만, 도취적 쾌감으로부터 방출되어 나오는 공격성 대한 묘사가 그리 적극적이진 못한 것이다.


그러니 관련된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기로 하자. 도취적 쾌감과 공격성 사이의 연관성이 더 부각된 사례는 『장자』 내편에 등장하는 ‘요’ 왕과 ‘순’ 왕 간의 가상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자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전달함과 동시에 성군으로 칭송받는 요 왕의 덕이 완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 두 인물을 화자로 등장시킨다. 먼저 요 왕은 순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종, 회, 서오 세 나라를 치려하오. 내가 왕위에 오른 후 이 나라들이 마음에 걸려 꺼림칙하니 웬일이오.”

이에 순 왕이 이렇게 답한다.


“이 세 나라의 왕들은 아직도 잡풀이 우거진 미개지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꺼림칙해하십니까? 전에 해 열 개가 한꺼번에 나와서 온 세상을 비춘 적이 있습니다만, 임금님의 덕을 비춘다면 어찌해 같은 데 비길 수 있겠습니까?”


대화는 이것으로 종료된다. 여기 나타나 있듯이, 요 왕은 왕위에 오른 후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주변의 미개발 국가들을 꺼림칙해하면서 그들을 공격하려 든다.



004-20250922-223145.jpg "내가 왕위에 오른 후 이 나라들이 마음에 걸려 꺼림칙하니 웬일이오?"



그렇다면 요 왕은 왜 왕이 되기 전에는 신경도 안 쓰던 이런 나라들에 갑자기 거부감을 품게 된 것일까? 그건 아마도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자기 나라의 지위에 도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국의 위상에 스스로 매혹되어 도취적 쾌감 속으로 빠져 들었기 때문에 그 도취의 대상과 정반대 되는 성질을 지닌 세 나라에 반감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왕도 자신이 느끼는 거부감을 스스로 의아하게 여긴다. 왕위에 오른 것과 이런 나라들에 거부감을 품게 된 것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요 왕이 스스로 일종의 자기만족 속으로 빠져 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더라면, 자신의 심경 변화를 그렇게 낯설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이 이야기에는 하나의 대극 쌍에 해당되는 도취적 쾌감과 도취적 공격성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이 대화가 반대되는 것들의 상호 의존성을 다룬 「제물론」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이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도취라는 현상의 가장 큰 윤곽은 어느 정도 명백해졌을 것이다. 여기 제시된 도취의 전체 상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들의 기본 토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전체적인 틀을 잡느라 그 안에 든 내용을 다소 소홀히 한 것 같다. 그러니 이제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 현상의 의미를 드러내 보기로 하자.


먼저 비교우위란 태도에 다시 주목해 보기 바란다. 앞서 말했듯이 이 태도를 취하는 당사자는 비교대상을 지긋이 짓누르면서 그 상대에게서 관심을 쥐어짜 내는 경향이 있다. 즉, 그는 반강제적으로 상대방의 관심, 또는 존재성을 박탈한 뒤, 그 관심을 자신의 자아에다 중첩시키면서 우월감을 느낀다. 개인적 차원의 심리적 고양감을 위해 상대방에게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006-20250922-223145.jpg 비교우위 상황에서 감지되는 관심의 흐름.



하지만 이런 태도를 ‘공격’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비교당하는 상대방이 자신의 열세를 스스로 인정하고 어느 정도는 관심을 자진해서 내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의 우월성에 매혹되는 정도만큼 자신의 존재 가치나 존엄성의 일부를 스스로 포기하다시피 한다. 따라서 이 과정은 ‘공격’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박탈, 즉 빼앗음 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비교우위라는 내적 태도가 외부로 발현되어 나오는 방식을 살펴본다면 이점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예컨대, 상대적으로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상대방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암묵적 이득 취하는 상황을 떠올려 바란다. 이 경우 상대의 관심이나 재원 등을 박탈하는 당사자는 자신의 지위나 권력으로 상대를 압박하긴 하지만, 대놓고 공격성을 표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박탈당하는 그 관심에 의해 지탱되던 본능적 필요나 욕구 등을 거부하며 밀쳐내는 건, 관심을 박탈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의 권위나 우월성에 동조한 상대 인격의 한 측면이다.


결국, 말하자면, 이 경우에는 상대로부터 관심이나 재원의 일부를 박탈하는 당사자가 자신에게 동조하는 상대 인격의 의식적 측면에게 박탈 과정에 동반되기 마련인 공격적 거부나 억압의 행위를 위임하다시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박탈 과정이 공격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 상황에서 상대의 매혹과 동조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박탈 과정에 강압성이 배어들면서, 이 행위는 다시 공격성과 도취적 쾌감의 양극단으로 근접해 들어가게 된다.


즉, 암묵적 동조 하에 이루어지는 소극적 형태의 빼앗음은 중간 단계라 할 수 있는 강탈이나 수탈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자의식적 쾌감을 위해 동원되는 노골적 파괴 행위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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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렇게 관심의 박탈 과정이 공격성으로 완전히 수렴된다 하더라도 이 속에는 여전히 빼앗음과 박탈의 측면이 내재되어 있다. 예컨대, 상대에게 굴욕감을 안기며 비밀스런 쾌감을 이끌어내는 공격 행위는, 그것이 상대의 존재를 파괴하는 정도만큼 자의식적 존재감을 얻어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존재성이나 존엄성의 박탈로 볼 수 있고, 심지어는 생명의 파괴 행위조차 그 과정상에서 도취적 쾌감을 이끌어내는 한 생명의 ‘빼앗음’으로 볼 수 있다.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는 순전히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이 도취의 전 과정을 관심의 박탈중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도취에 내재된 파괴성과 쾌락의 측면도 결국 박탈과 중첩이란 이 원리가 극화되어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관점을 첨부시킨다면 화와 쾌감으로 윤곽을 그린 도취의 원리가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심상을 하나 더 첨가해 보기로 하자.


어떤 관심의 장이 원형으로 퍼진 채 숲을 감싸고 있다. 이 관심의 장은 숲 속에 있는 나무들에게 생기와 활력을 공급하면서 숲 전체의 생명을 유지해주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중심에 놓인 거대한 나무 하나가 숲 전체로 퍼져야 할 관심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흡수해 들이기 시작한다. 숲 전체의 생명을 지탱하던 관심은 그 나무를 향해 빨려 들어가면서 고도로 집중된 형태의 생기, 즉 쾌감을 발산하고, 인접해 있는 나무들도 어느 정도 그 생기의 혜택을 누린다. 하지만 관심을 빼앗긴 다른 나무들은 서서히 시들기 시작하고, 관심을 완전히 박탈당한 변방의 나무들은 급속히 시들다가 결국 말라죽고 만다.


도취라는 현상이 하나의 생명체나 집단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면 대략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빼앗아 더함, 즉 박탈과 중첩이라는 이 기본 원리가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소모적 쾌락과 변방으로 분출되는 파괴성을 어떻게 포괄해 내는지 눈여겨봐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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