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낮추면 내가 높아진다
이전 화에서는 매력적인 대상을 직접적으로 긍정하고 높이며 일어나는 도취의 과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과정이 정반대로 일어나는 상황을 다뤄보려 합니다.
관련된 경험들을 떠올려가며 읽어보시면 의미가 와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밀쳐냄과 끌어들임
그럼 이제 이 기본적인 도취 과정과 대상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도취가 유발되는 상황들을 구체화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도취가 간접적으로 유발된다는 건 다름이 아니라 도취 대상으로 향하는 관심의 흐름이 그 대상과 반대되는 성질을 지닌 대상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는 데, 이 과정의 본성은 타인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상황, 즉 비교 우위 상황에서 가장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먼저 비교 우위가 확립되는 과정부터 간단히 짚어보기로 하자.
외부 대상과의 비교를 통해 자부심이나 우월감을 획득하는 상황에서는 일차적으로 관심 초점이 외부에 놓이게 된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당사자는 자신의 특성에 대한 별다른 인식 없이 일상을 영위하다가, 비교 대상이 우연히 눈에 들어오면, 그 대상의 부족한 특성을 짓누르듯 밀쳐 내면서 상대적인 우월감을 이끌어내곤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는 당사자 자신의 우월한 특성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 개입이 될 수밖에 없다. 비록 모호한 형태이긴 하지만, 그 우월한 특성에 대한 인식은 외부 대상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환기된 뒤, 비교 대상을 밀쳐내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오는 관심을 흡수해 들이면서 당사자를 안온한 쾌감 속에 빠뜨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도취적 관심이 모호하게 환기된 자아상징을 거쳐 그 배후에 머물고 있는 자아상으로 즉시 유입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사자는 눈에 들어온 대상의 특성을 애초에 왜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그 자신의 자아상징을 대상으로 한 매혹의 과정이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매혹을 통한 가치의 과장 및 자기 높임의 과정이 어떤 식으로든 선행되지 않는다면, 외부의 비교 대상을 낮춰보면서 거부하는 일도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높임에서 비롯된 쾌감이 낮춤과 연계된 거부감의 전제 조건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비교 과정이 기존에 발생한 도취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효과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다. 외부 대상을 낮추면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도 도취적 관심은 얼마든 충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취를 일으키는 당사자는 비교 대상을 거부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관심을 끌어들인 다음, 다시 이렇게 부풀린 자아상징으로 외부대상을 더욱 내리누르는 식으로, 상대적 가치감을 증폭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마치 과일에서 즙을 짜내듯, 비교 대상을 지긋이 짓누르면서 안도감과 우월감을 지속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비록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진행되는 과정이긴 하지만, 통상적 비교우위 상황에서는 이 같은 연쇄증폭 과정이 어느 정도는 일어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이 비교 과정 속에 어떤 공격적 속성이 배어들어있다는 점이다. 비록 도취적 쾌감에 가려져 잘 인식되지 않긴 하지만, 상대의 측면을 거부하며 밀어내는 태도는 분명 일종의 공격성에 해당된다. 이 공격성은 도취적 쾌감을 따라다니는 일종의 그림자와도 같은 것으로, 이 경우에는 관심을 당사자 쪽으로 끌어들이며 직접적 매혹의 측면을 보완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그러니까 결국, 관심의 초점이 외부로 이동됨에 따라 자신에게 직접 관심을 쏟는 측면이 약해지는 대신, 자신 이외의 대상들을 밖으로 밀쳐내며 관심을 끌어들이는 측면은 강화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정으로 인해 비교우위 상황에서는 도취의 대상에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즉, 비교우위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인 대상들까지 도취 대상의 포괄 범위 하에 놓이게 된다. 밀쳐냄의 측면에 의해 뒷받침을 받는 만큼, 관심을 끌어 모으는 힘이 부족한 대상들까지 도취적 힘을 머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상의 영역이 확대된다 하더라도, 어쨌든, 대상 인식이 모호해지는 건 결국 마찬가지다. 비교 상황에서는 관심이 안팎으로 다소 분산되어 있는 만큼 도취 대상이 모호하게 흐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좀 더 밀어붙여 보기로 하자. 즉, 관심의 초점을 더 외부로 이전시키면서 직접적 매혹의 측면을 계속 줄여나가 보기로 하자. 그러면 결국, 반대 성질을 지닌 대상을 밀쳐내는 힘만으로 도취에 필요한 관심 전체를 충당하는 지점에까지 다다르게 될 것이다. 자의식적이거나 독선적인 성질을 띤 비판을 통해 자아를 부풀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당사자는 상대가 지닌 결점이나 악덕, 문제 등을 격하게 밀쳐내고 거부하면서 그런 성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향해 관심 끌어 모으곤 하는데, 이 과정에는 도취의 대상 관련된 그 어떤 직접적 인식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사자의 관심이 전적으로 외부 대상 쪽으로 쏠려있는 만큼, 배후에 있는 도취 대상이 단순히 모호해지는 것 너머 구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흩어져버리게 된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당사자가 도취의 대상으로 관심 끌어들이기 위해 밀쳐냄의 측면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를 하기 때문에, 자체적인 매력이 부족한 비교적 중립적인 대상들까지 도취 대상의 범위 하에 놓이게 된다. 도취 대상이 관념화되는 동시에 다소 평범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상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마도 대표적인 예로는 ‘옳음’, ‘진실됨’ 등과 같은 일반 관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념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매력을 지니지 못하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지만, ‘그릇됨’이나 ‘거짓됨’ 등의 속성을 지닌 대상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는 반대되는 그 성질과의 대비효과로 인해 상당히 강력한 도취적 관심을 머금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물론 이런 대상들만 자의식적인 비판을 통해 유발되는 도취의 초점이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일반관념을 중심으로 끌어 모아진 도취적 관심은 차후 그 관념의 속성을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배후의 대상, 즉 당사자 자신의 자아상징으로 이전될 수 있다.
뛰어난 자아상징을 이미 획득한 당사자가 상대의 영역으로 옮겨가 비판을 쏟아낸 뒤, 자신의 기존 입지를 회복하며 도취적 관심을 흡수해 들이는 경우가 여기 해당된다.* 이 경우에는 당사자가 우월한 특성 자체에 기반을 둔 직접적 매혹과 열등한 특성과의 대비효과에 기반을 둔 간접적 매혹을 동시에 일으키는 만큼, 충전되는 도취적 관심 규모 또한 상당히 커질 수밖에 없다.
* 타인의 작품을 ‘난도질’ 하기 좋아하는 자아도취적 작가나 예술가 등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 도취가 유발되는 경우는 오직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중으로 관심을 끌어들여야 만족할 정도로 심각하게 도취적인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을 토대로 도취가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끌어들인 도취적 관심의 중심부에 ‘선함’이나 ‘솔직함’ 등과 같은 관념적 대상이 놓이게 된다. 관념적 형태의 자아상징을 중심으로 도취적 관심을 축적한 뒤,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자아상으로 유입시키면서 자의식을 부풀리는 과정, 이것이 비판에 기반을 둔 도취가 유발되는 전형적 방식이다.
어쩌면 이쯤에서 자의식적인 비판을 통해 유발되는 도취를 ‘도취’라 부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측면이 아닌 상대를 낮추는 측면에 중점을 둔 태도이고, 따라서 그 느낌 자체도 일반적인 도취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남을 낮추는 태도와 자신을 높이는 태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자신을 높이면 남을 낮추게 되어있고, 남을 낮추면 자신을 높이게 되어있다. 이는 각 태도와 연관된 느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도취적 쾌감이 일어나면 도취적 공격성도 일어날 수밖에 없고, 도취적 공격성이 일어나면 도취적 쾌감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즉, ‘높임’과 연관된 쾌락과 ‘낮춤’과 연관된 공격성은 하나가 다른 하나 일으키는 식으로 서로를 발생시킨다. 상호 간에 긴밀히 의존하면서 항상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임에도, 관심의 초점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그 부분만 주로 인식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자의식적 비판의 상황에서도 높임과 쾌감에 해당되는 측면들을 찾아낼 수 있다. 경직되고 과장된 확신 및 힘의 느낌이 그것이다. 이런 태도 혹은 느낌들은, 반대 대상을 밀쳐내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인 만큼, 일차적으로 자기 존재에 무게가 실리는 듯한 느낌으로 경험되다가 어느 정도 축적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도취에 전형적인 들뜬 쾌감의 성질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겉으로 표면화된다 하더라도 어쨌든 전면에 부각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배경 머물면서 공격성에다 자신의 특성 불어넣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유형의 비판이 종종 ‘신랄함’이란 특성을 나타내 보이곤 하는 건 사실 바로 이 같은 사정 때문이다. 밑바탕에 깔린 도취적 쾌감에 의해 가벼운 성질까지 함께 머금게 된 화나 분노, 그것이 곧 신랄함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 쾌감의 측면이 언제까지나 배경 역할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황 변화에 따라 관심의 초점이 타인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동되고 나면, 잠재되어 있던 도취적 쾌감이 활성화되면서 전형적 도취에서 발견되는 그 모든 특성들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실제로 도취의 중심부에 놓인 대상들, 특히 모호한 형태의 관념적 대상과 관련해 당사자가 드러내 보이는 태도는 전형적 도취의 기본 성질과 사실상 완전히 일치한다. 경솔함과 지나친 자신감, 과장된 낙천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반대 대상을 거부하고 밀쳐내며 간접적인 방식으로 유발되는 이 자의식의 강화 과정 역시 도취라는 개념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 안온한 열기가 동반되는 전형적 도취와는 달리, 공격성 이면에 잠재되었다 드러나는 도취적 쾌감은 시원하거나 속이 후련한 느낌으로 경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건 본질의 차이 때문이라기 보단 맥락의 차이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그 쾌감이 상대적으로 시원하게 느껴지는 건, 단순히 화의 화끈거리는 열기 반대편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공격성 쪽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 이런 유형의 도취를 ‘음성 도취’라고 부를 것이고, 쾌감 쪽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 도취를 ‘양성 도취’라 부를 생각이다. 비록 양자 사이의 경계가 그리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같은 구분이 상당히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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