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이유
지난 화에서는 군중심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일상의 경험들과 연관 지어가며 그 원리에다 살을 좀 붙어보려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매혹과 암시의 영향력을 자각하기가 한층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군중 형성과 관련된 기본 원리는 대략적으로나마 해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집단을 유기화시키는 핵심 원리인 매혹의 과정을 좀 더 구체화하면서 이론적 도식과 실제 경험 사이의 간극을 메워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매혹이란 강력한 느낌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매혹의 경험 자체만으로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먼저 당사자가 집단의 압력에 떠밀려 마지못해 매혹에 동참하게 되는 동조의 과정부터 들여다보기로 하자.
일단 동조와 관련된 경험들을 돌이켜보면서 그 태도를 구성하는 특성이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직접 한번 자문해 보기 바란다. 그럼 아마도 자발성의 포기와 연관된 어떤 수동성, 또는 소극성의 느낌이 동조라는 태도 전반을 지배한다는 점부터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태도의 저변부에는 이성적이거나 양심적인 인식을 애써 부정하고 무시하면서 자신의 자율적 결정권을 상대에게 부분적으로 위임하는 듯한 어떤 체념의 느낌이 항상 자리 잡고 있다.
이와 더불어 상대 의견에 대한 개방이나 수용, 또는 단편적 긍정의 느낌도 함께 감지되는데, 이 느낌은 물론 기존의 영역을 허물고 자신을 열어젖히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내적 전체성과 갈등을 빚는 상대의 의견이나 행동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모든 영역을 억누르거나 걸어 잠그는 지극히도 역설적 의미의 개방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개방의 느낌 배후에서 어떤 불안감이나 불확실성의 압력이 느껴지는 건 분명 이 같은 사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동조라는 태도에는 짐을 내려놓는 듯한 안도감이나 안일한 쾌감 같은 느낌이 반드시 동반된다. 비록 매우 미묘한 느낌이긴 하지만 이 소극적 만족감이 배어들지 않은 동조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느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발성을 포기한 뒤, 상대의 의견이나 태도를 향해 주의력을 놓아버리는데서 비롯되는 쾌감일 것이다. 당사자가 놓아버린 관심이 동조 대상을 향해 빨려 들어가면서 수동적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그 지점을 중심으로 모호한 형태의 만족감이나 쾌감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봐주기 바란다. 그러면 동조라는 현상이 매혹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즉, 매혹이 대상을 향해 정신을 놓아버리는 순수 인식의 측면에 중점을 둔 태도라면, 동조는 매혹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주는 양심과 내적 전체성을 억압하고 밀쳐내는 심리적 행위의 측면에 중점을 둔 태도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동조 상황에서는 관심의 초점이 행위의 영역으로 다소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동조 상황에서도 매혹은 미미한 형태로나마 이미 일어나고 있으며, 관심을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그 측면은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측면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순수한 매혹의 과정 그 자체 내에도 비판 기능을 억누르는 행위의 측면이 잠재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매혹의 효과 중 하나인 비판기능 마비는 대략 이런 식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관심의 과잉 집중, 또는 수동 집중과 수용성 증대 현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문제는 매혹에 휩쓸린 뒤에 취하게 되는 행동이나 태도를 살피다 보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일단 누군가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뛰어난 특성에 매료되어 어떤 황홀감속으로 빠져든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자. 한마디로 그는 상대와 도취적 사랑에 빠진다. 그러면 그는 아마도 상대의 온갖 특성이나 행동들을 다 좋게 받아들이면서 현실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측면이 발견될 경우에 조차 그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고, 때로는 그 문제에 동참하기조차 할 것이다. 흔히 말하듯 사랑 때문에 눈이 멀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또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일종의 감정전이 효과 때문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특정 대상에 의해 촉발된 정감적 요소는 연관된 주변 대상들의 인식 위에 덧씌워짐으로써 그 대상들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매혹의 경우 그 정감적 요소에 해당되는 것은, 대상을 단편적으로 긍정하거나 수용하는 관심 위에 그와 동일한 성질을 지닌 관심이 연쇄적으로 중첩될 때 일어나는 일종의 쾌감, 즉 좋음의 느낌이므로, 그 느낌을 머금은 주변 대상들은 긍정과 수용이란 동일한 태도를 취하도록 당사자를 자극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매혹을 통한 수용성 증대 과정을 느낌의 확산, 혹은 번짐이라는 이 효과 하나만으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무분별하다 싶을 정도로 수용성이 증폭되는 과정에서는 분명 앞서 언급한 비판 기능의 마비도 단단히 한몫을 할 것이다. 결국 이의를 제기하는 측면이 마비되지 않는 한 맹목적인 수용의 태도 역시 취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쨌든 이 같은 느낌의 확산 효과는 매혹 과정과 연관된 놀라운 현상들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비교적 흔하게 발견되는 평범한 현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측면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무분별한 수용 행위를 뭐라 부르는 것이 좋을까? 직접 한번 연관된 일상적 경험들을 되돌아보면서 그 상황에서 사용된 언어들을 검토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그런 태도에도 가끔씩 ‘동조’라는 이름이 붙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압력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외면하는 소극적 행위와, 매혹에 눈이 먼 나머지 문제가 될 수 있는 주변 대상들까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적극적 행위에 완전히 같은 명칭이 부여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건, 물론 동조라는 표현의 포괄 범위가 넓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주체적 양심의 외면과 외부 대상의 맹목적 수용이란 두 측면이 불가분의 일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언어 습관은 매혹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심리적 행위의 두 측면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적절해 보이며, 무분별한 수용의 비합리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이 글의 목적하고도 잘 부합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매혹에서 비롯된 이 같은 맹목적 수용의 태도를 칭할 때도 단순히 ‘동조’라는 표현을 사용할 생각이다. 두 종류의 동조 사이에 구분이 필요한 경우에는 각 태도의 특성을 나타내주는 수식어구를 붙여 표현을 달리해주면 될 것이다.
#매혹 #동조 #비판기능 마비 #수용성 증대 #도취적 사랑 #맹신
https://brunch.co.kr/@slouu/72
https://brunch.co.kr/@slouu/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