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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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야근을 계속했다. 배달음식은 질렸고, 유튜브 쇼츠는 금세 지루해졌다. 한편으로는 주어진 프로젝트를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얼른 2년간의 단순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김 과장 또한 매일같이 야근을 했다. 조용하고, 어두운 사무실에서 사각사각 연필소리와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묘하게 어울렸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날로그 김 과장이 다가왔다.
“자네, 저녁 먹었나?”
귀신이라도 본 듯,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김 과장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차갑기만 한 사람이 웃으며 저런 말도 할 수 있다니. 적응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는 주변에 자신이 잘 아는 단골집이 있는데 그곳에서 간단하게 술 한잔 하는 게 어떻냐고 했다.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 또한 없었기에 우리는 마무리 정리를 하고 회사 밖을 빠져나왔다.
김 과장의 단골집은 허름한 대폿집이었다. 외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비주얼이지만 내부로 들어갔을 땐 꽤 아늑했다. 그곳엔 이모님 한 분이 계셨는데, 술을 시키면 안주를 가져다주는 방식이었다. 김 과장은 소주 한 병을 가져와서 자리에 앉았다. 이모님은 김 과장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술은 좀 하나? “
김 과장은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술을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마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갓 만들어진 부침개 하나가 나왔다. 모락모락 김을 내면서 먹음직스러운 향을 내뿜고 있었다. 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한 잔을 들이켰다. 하루의 걱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김 과장의 표정 또한 좋아 보였다. 가게에서는 유재하의 <지난날>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가볍게 잔을 교환하며 그 노래를 가만히 들었다.
“자네 유행곡과 명곡의 차이가 뭔 줄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유행곡은 시대에 몰락하지만, 명곡은 시대를 초월하지. “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지만, 아날로그적 방식을 고집하는 그의 나름의 철학이 아닐까 짐작하며 남은 한 잔을 들이켰다. 다음 안주로는 오징어 볶음이 나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술병은 비어있었고 우리는 새로 한 병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술기운이 올라왔다. 약간의 자신감도 생겼다. 노래는 어느새 조용필의 <단발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노래는 점점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시대는 어쩐지 더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거리의 사람들도 다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거리엔 한적함만이 가득했다. 김 과장은 꽤 취한 듯 보였다. 횡설수설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에서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그 또한 어떤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 기분을 안다.
신세대가 되지 못해 마지막까지 운동장에 남아있었던 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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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무리해서 먹은 탓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일찍 출근했다. 김 과장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제 술을 그렇게 먹었는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제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밝게 인사했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 이내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그의 행동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야근을 할 때마다 김 과장과 몇 번 밥을 같이 먹었다. 회사에서는 차가운 사이었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단순한 형 동생 관계로 지내게 되었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까 싶었지만, 지금 이 상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는 느리지만,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진행되었다. 사람들 또한 대면 회의에 차츰 적응을 해 나갔고, 별 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각자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보다, 생각을 모아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방식은 꽤 효율적이었다. 다양한 좋은 아이디어들이 나왔고 우리는 그중 몇 개를 추려 최종 안에 넣기로 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사람들 간의 대화의 주제가 넓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서로 이야기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점심시간의 이야기 주제는 김 과장에 대한 욕에서 ‘어떤 디자인이 더 나은지’ ‘어디서 회식을 진행할지’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마트에서 사 온 여러 가지 재료들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요 며칠간 배달 음식을 시켜 먹지 않았다. “요리는 직접 해 먹어야 질리지 않아”라는 김 과장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말은 옳았다. 직접 만든 음식에는 배달 음식에 들어가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식사를 마친 뒤 유튜브 쇼츠를 볼까 했지만, 그냥 빨리 잠에 들기로 했다. 불을 끄자 방 안에는 깊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많은 생각들이 그 모습을 슬그머니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 과장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다. 언젠가 그는 내가 그와 닮은 면이 있다고 말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그의 행동들은 일상에서도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생각이 하나씩 내 머릿속을 지나갈 때마다, 그것은 빛을 내며 사그라들었고 그렇게 방 안의 어둠은 점차 걷혀갔다.
다음날, 회사 앞에서 김 과장을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사무실에서도 시계를 한 번 쳐다보다 발표 자료를 읽기 시작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목적 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자료를 읽는 행동을 반복했다. 회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 빈도는 점점 짧아져만 갔다. 반면 주변 사람들은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기계적인 일을 반복했다. 회의 시간이 다가왔다. 회의 장소로 걸어가는 김 과장의 뒷모습은 어쩐지 다시 외로워진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도 김 과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회의가 길어지는 듯했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늦을수록, 불길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과정이 어찌 되었던 늘 결과가 중요한 법이다. 그럼에도 몇 개월동안 열심히 일했던 과정이 단순히 누군가에게 평가받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김 과장은 퇴근시간이 다 되어갔을 때쯤 돌아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다. 상부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조금 더 수정을 거쳐 생산까지 바로 진행한다고 했다. 김 과장의 경직된 입술이 풀어져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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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프로젝트가 끝난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 또한 반복되는 단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몸은 더 힘들었지만 일의 목적과 의미를 명확하게 찾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한 동안 새로운 일들을 진행하며 시간을 묵묵히 녹였다.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김 과장의 방식을 많이 참고해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부서에선 효율적이고 빠른 일처리를 원했다. 그렇기에 바뀐 환경에서 한 동안 다시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또한, 김 과장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그거 들었어요? 김 과장 퇴사했다던데요. “
“저번 프로젝트에서 좋은 실적 내지 않았어요? 승진할 줄 알았는데.”
직원들의 대화에는 뭐 하나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퇴근하자마자 김 과장에게 연락했다. 몇 번의 통화음 끝에 그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갔다고 했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김 과장의 표정은 내가 예상한 바와 달리 밝았다. 오히려 회사에 있을 때 보였던 경직된 모습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몇 잔을 가볍게 주고받았다. 왜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 이전부터 나가라는 압박은 들어왔었다네. 더 남겨두고 싶은 생각이었으면 승진을 벌써 시키고도 남았겠지. 이번 프로젝트는 나에게 있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잘 마무리했는데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건 없더군.”
그는 버려진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한잔을 깊게 들이켰다. 김 과장은 이내 ‘후-‘하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이 한숨이 술을 마신 뒤에 나오는 한숨인지, 씁쓸함의 한숨인지 나로서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상부에서도 인정했는데 대체 왜..”
“자네. 내가 정말로 아날로그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김 과장의 질문 의도를 명확하게 짚을 수 없었다. 내가 바라보는 김 과장은 분명 아날로그적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걸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내 생각을 담담하게 전달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입에 머금다, 이내 조용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나도 자네와 비슷한 나이 때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어. 오히려 내가 다른 사람들이 시대에 뒤처졌다고 비판했지. 당시에는 잘 몰랐었어. 가진 것은 객기뿐이었거든. 그 사람들의 방식이 답답해 보였고, 더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우월성을 증명받기 위해 노력했었네.”
그는 소주 한잔을 비운 뒤 다시금 얘기를 시작했다.
“결국엔 그 사람들을 넘어서고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어. 하지만 세상이 그렇듯 아래에서 치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어. 살아남기 위해선 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달려야만 했네.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세상은 나에게 무언가를 하나씩 요구했어. 그리곤 무엇을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되었지. “
“내가 대체 무엇을, 왜 잃어버린 걸까. 한 동안 고민을 하면서 지냈다네. 일은 점점 더 빨리 끝나고 편해지지만 그것뿐이었어. 얻으면 얻을수록 자꾸만 공허해지는 느낌. 자네는 알겠지. 어느 순간부터 달리는 것을 잠깐 멈추기로 했네. 그제야 내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명확해졌어. 난 그것을 지키고 싶을 뿐이야. “
“그렇다면 균형을 맞추면 되는 것 아닙니까? “
”아쉽지만 단순히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문제가 아닐세. 균형을 정확하게 맞출 수도 없고 말이야. 나는 기술이 싫은 게 아닐세. 하지만 기술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조절할 수 없게 돼. 더 똑똑해지면서도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되는 걸세. “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옆에서 가만히 들어줄 뿐이었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모아둔 돈과 퇴직금을 더해서 작은 가게를 차린다고 했다. 다시 젊어진 기분이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사회에 가진 것 없이 내던져졌으니 옛날 같은 패기와 객기가 다시 생겨나는 것만 같다고 했다. 그래도 그가 퇴사하고 새로운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내심 안심했다. 이 사람은 어딜 가도 잘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기에. 늘 그렇듯 느리지만,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본인의 삶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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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 세상은 소란스럽게 변화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Chat GPT’라는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검정 터틀넥 아저씨를 찾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GPT는 보고서를 써달라고 하면 보고서를 써주고, 검색하지 않아도 세상 모든 지식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이었지만 나에게 있어 GPT는 골칫거리였다. 자료 조사를 지시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GPT를 이용해 정보를 찾아왔다. 신입 사원들의 인공지능 사랑은 이내 점점 대담해지더니,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인공지능을 활용하다 덜미가 잡혔다. 이후부터 회사에서는 ’GPT 금지령’이 떨어졌다. 사람들에게 금지령을 내렸던 김 과장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반면, 김 과장의 부고소식은 조용하게 다가왔다. ‘고인 김 덕 중‘ 짧은 메시지와 함께 장례식장 위치만 전송되었다. 사실 이전에 몇 번 그에게 연락이 왔지만, ‘한번 밥이나 먹죠’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엔 사람들이 적당히 남아있었다. 영정 사진 속 김덕중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애도를 표한 뒤, 소주 한 병과 육개장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왜 죽었대?”
옆 테이블에는 남자 두 명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이야. 장사도 안되지, 결혼 생활 절반을 기러기 부부로 지냈는데 보내는 돈 떨어지니까 이혼까지 겹쳤어. 그 뒤의 일이야 뭐…”
김덕중은 매일 술로 지내다가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깊고, 천천히, 정확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가슴속에서 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의 환한 표정을 볼 수록 그 불편함은 심해져만 갔다. 스스로 밥을 지어먹는 것. 서로 마주 보며 만들어 가는 관계. 순간의 여유와 깊이 있는 사고.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아날로그적 방식들은 내 공허함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마무리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새벽 5시니까, 빠르게 밟으면 늦지 않게 도착할 것이다.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 쇼를
야이야이야이야이야-
새벽의 시골길은 캄캄했다. 가로등은커녕 희미한 불빛조차 없었다. 오직 헤드라이트 하나에 의지한 채 어둠을 밀어냈다. 창문을 열자,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대가 금지했던 곡은 명곡일까, 유행곡일까?”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 쇼를 한다는 이미지는 선정적이라 금지가 되었다고 언젠가 그는 말했었다. 요즘 시대에 나오는 노래 가사들을 생각해 본다면 터무니없는 말이다. 시대는 일탈을 억압할 수 없었다.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그럼에도 정직한 김 과장의 시대는 분명히 갔다. 그도 그걸 인정해야만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인공지능이라는 차가운 파도는 세상을 뒤덮었고, 이제는 만나지 않아도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시대다.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그 흐름 속에 뒤처진 사람들의 따뜻함은 들을 수 없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하지만 어둠 속에서 잊힌 사람들에게도, 긴 밤이 지나면 따뜻한 햇살이 비친다. 늘 그렇듯, 다시 아침은 찾아온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지키고자 했던 것들은 결코 무의미한 것들이 아니었다.
차는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는데, 노래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쩐지 차가 느리게 달려가는 것 같았다. 속도를 더 냈지만, 자꾸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았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아니, 그는 어쩌면 시대에 뒤처진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둠 속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차를 멈춰 세웠다. 플레이리스트도 마지막 곡을 끝으로 멈췄다. 차 안에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신호등은 빨간 불을 깜빡, 깜빡거리며 조용히 내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신호등의 양 옆으로 갈림길이 보였다. 어디로 가야만 할까. 이상하게도 돌아가는 길이 생각나지 않았다. 몇 번을 떠올리려고 노력을 해 봤지만 헛수고일 뿐이었다. 순간, 시골에서 보았던 김덕중의 마지막 말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금 다시 와서 생각해 보니, 금지곡은 그래도 명곡이 되었으면 좋겠어. “
”왜 그렇습니까? “
”시대의 억압을 버티고도 다시 세상에 나와서 불리잖아 “
어느새 신호등은 초록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희미한 초록빛은 깊은 어둠을 점차 걷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