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a Fitzgerald-Summertime
https://youtu.be/VZRgiuAXRAs?si=6UNBPbNQLliL-2Cj
Summertime,
여름철에는
And the livin' is easy
살기 좋단다
Fish are jumpin'
물고기가 뛰어오르고
And the cotton is high
면화는 높이 자라지
Oh, your daddy's rich
오, 네 아빠는 부자이고
And your mamma's good-lookin'
네 엄마는 미인이란다
So hush little baby
그러니, 쉿, 작은 아가야
Don't you cry
울지 말거라
이 곡은 오페라 『Porgy and Bess』에 나오는 노래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다. 배경은 1930년대 미국 남부의 가난한 흑인 공동체를 그리고 있다. 멜로디 자체는 일반적인 자장가라고 하기엔 어딘가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1930년대 미국 남부는, 당시 흑인들에게 삶 자체가 고통이었던 시기였다. 흑인과 백인은 법적으로 분리가 되어있었고, 투표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대공황이 겹치게 되면서 안 그래도 경제적으로 힘든 위치에 있었던 대다수의 흑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울한 곡조와 다르게 가사는 희망적이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 아래 평화로이 물고기들이 뛰어놀고, 면화가 조용히 자라는 그런 장소를 그리고 있다. 아이 옆에는 돈이 많은 아버지와 미인인 어머니가 있고, 그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이러한 가사가 어딘가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가사가 희망적인 것은, 현실이 너무나도 잔혹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들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자신들이 이룰 수 없는, 언젠간 얻고 싶은 이상적인 현실을 바라며 아이에게 말을 해주는 것일까.
또한, 자장가를 불러주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언젠간 이 아이가 자라 부모와 똑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될 텐데. 세상 물정 모르고 편안한 얼굴로 잠든 작은 아이의 얼굴을 그려보자니, 어쩐지 이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가 이질적인 이유에 대해서 이해가 갔다.
부모의 마음은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가 세상의 풍파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행복했으면 하는 그런 간절함. 하지만 그런 간절한 감정이 사회의 단면과 충돌했을 때, 부모의 사랑의 방향은 저출생이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저출생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진부한 주제일지 몰라도, 밀려오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을 맞이하는 입장에서 저출생이 실로 체감이 된다. ‘요즘같이 살기 좋은 시대에 굶어 죽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는 우스갯소리가 들려오곤 하지만, 그럼에도 저출생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였다. ‘힘든 세상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라는 이야기가 주류가 되어버렸다.
정말로 굶어 죽지야 않는 사회이지만, 태어나자마자 마주해야 하는 경쟁과, 이제는 잡을 수도 없는 물가와 집값. 취업을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 나가야 하는 사회. 비록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들과는 다른 양상의 고통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이름의 절망과 마주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아이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변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이 사회와 반하였을 때 나타난 결과가 저출생이 아닐까.
참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이 들고, 노래가 말하는 이질적인 면모가 수많은 시간이 흐른 현대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 재밌으면서도 가슴 아팠다. 언젠가 노래 가사에서 말하는 평화롭고 희망적인 세상이 되어서, 앞으로 미래를 이끌어갈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으로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다. 그 마음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닌 조용한 의무일지도 모른다. 이 자장가가 언젠가 정말로 평화롭기를. 그 꿈을 간직하는 일이 지금을 살아가는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