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움

by 강인한

인생은 선물의 연속. 선물의 이름은 새로움이다. 몰랐던 감정, 풍경, 관계, 아주 작은 경험들까지 우리는 다양한 순간들을 지나간다. 지금도 좋지만, 좋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더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경험들은 나에게 다가오고 그 속에서 나는 과거를 생각하고 비교하고 자책하고 때로는 또 성장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들이 쌓여간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은 이사를 준비할 때였다. 언제 받았는지도 모를 편지,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이나 힘들 때 공책을 펴고 썼던 일기들. 그런 것들은 마무리를 하는 순간에 문득 나타났다. 그럼 나는 지나간 세월들을 마주한다.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하면서 물건 하나하나 발목이 잡히게 된다. 내게 떠나지 말라고 말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떠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이것들을 발견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가야만 한다. 지나간 편지를 찢고, 일기가 적혀있는 공책들을 버려가면서. 더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이젠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이유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은 그 순간의 기억이고, 더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했다. 언젠가는 쓸 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물건을 두고, 그리고 쓸 날이 오지 않아 물건은 잊히고 그 물건은 흔적으로 남는다. 인간관계도 그랬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거나 힘들어할 때 나는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좋은 점이 있을지도 몰라. 실망스러운 모습을 앞으로 보이지 않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과정을 통해 상처받는 일도 많았지만 새로운 시작을 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24년도의 나와 25년을 마무리하는 나. 상황도, 주변 사람들도, 나의 생각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의미가 아주 없진 않아 다행이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친구의 이름. 선생님의 얼굴. 오래된 것들은 때로는 추억을 회상시키기도 하지만 안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 안 좋은 추억은 달콤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쉽게 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지만 항상 좋기만 하고 항상 힘들기만 한 일들은 없다. 대개 복합적이고 복잡한 법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버리고 떠나고 다시금 추억을 만든다. 그것들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나의 공간은 자꾸만 줄어들 것이고 계속해서 늘어나다 보면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들을 채우기 위한 준비라고들 말한다. 그럼 비워진 것들은 의미가 없단 것을 말하는 걸까. 내가 말이 길어진 이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것들은 지나간 것뿐이다. 내게 다시금 의미가 될 수도, 영향을 지속적으로 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것들을 채워나가는 이유는, 비우지 못하면서 비운다고 말하며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것은, 단지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에 아주 오래 머물진 말라고. 머물더라도 빠지진 말라고. 하다못해 머물기엔 인생은 짧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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