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사랑하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한국과 완전히 구분할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 놓아둔,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행동들에게 조심스레 눈길을 돌려본다. 남들의 눈을 의식한 것도 있고 또 도통 상황이 도와주질 않아 못 해본 것들도 있겠다. 대학교 동기들과 2025년의 프랑스를 꿈꾸며 농담을 던진다. 나, 리옹에 도착하면 벗고 다닐 거야. 한국 마인드도, 한국 마인드가 가득한 옷도.
가장 갈망하는 것은 자유롭게 입는 것이다. 한국에서 꿈꿔왔지만 쉽사리 걸치지 못했던 옷들이 있다. 나이키의 바이커 쇼츠에 짧은 기장의 후디, 넥라인이 깊게 파인 셔츠에 미니멀한 목걸이, 7cm 정도의 굽을 가진 스틸레토 힐 따위의, 한국이라면 분명 내가 원치 않는 한두 마디의 문장도 함께 걸치게 되는 것들. 한국은 키 큰 여자가 힐 신는 것에 참 관심이 많은 나라다. 매번 실감한다. 온몸으로.
아무튼 바란다기 보다 꿈꿔왔다는 표현이 더 가깝겠다. 파리에서의 내 옷차림은 서울보다 더 “나”스럽고 싶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가 가장 만족한다는 느낌은 날 더욱 흥분하게 만든다.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알 수 없는 욕망과는 꽤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왔다. 얼마 전 이태원에서 재미 삼아 들었던 사주풀이, 가벼운 어깨로 들어가 무거운 발자국을 남겼다. “현지 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해외로 떠나고 싶었어요. 한참 전부터 벌써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에요.“
가만히 서서 주먹을 쥐고 고민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나인 줄 알았는데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니… 대체 무엇이 날 그렇게 부추겼을까?
아마 파리의 빈티지숍이 아닐까? 누군가 나에게 옷의 구매처를 물어봤을 때, 수줍지만 무심하게 “파리에 있는 빈티지숍에서 샀어.”라고 말하고 싶은 그 마음. 계획도 기대도 없이 들어간 빈티지숍과, 그곳에서 여생을 함께하고 싶은 만큼 예쁜 옷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파리가 가장 야릇하게 느껴진다.
또 하나는 주거지에서의 미니멀리즘이다. 한국에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짐의 양도 한정된 데다가, 가난한 교환학생은 프랑스의 물가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고….. 프랑스로 떠난 나에게 서울에서 가져온 짐들은 가끔 서울을 그리워할 때 도움을 받을 장치 정도로만 여기고 싶다. 이불 한 장과 베개 한 개, 접시 두 개와 한 벌의 포크&나이프. 가장 아끼는 머그컵 한 개. 꼭 필요한 것만 추린 세면용품, 후에 프랑스를 추억할 수 있도록 새로 구매한 30ml짜리 향수 한 병.
내가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할 사치는 오직 옷, 그리고 특별한 날 바를 푸른색 매니큐어 한 개뿐이다.
프랑스의 개인주의가 가장 잘 구현된 도시는 단연코 파리라고 배우는 와중에, 개인주의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참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번쯤은 개인주의로 가득 찬 사람을 만나 많이 아파보고 싶다. 되돌아갈 곳 없는 사랑이라서 프랑스를 미워하게 만드는 사람, 내가 바라던 니스nice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부터 닦게 되는 사랑. 그리곤 작게 중얼거릴 것이다. 그래… 사랑을 하겠다 선언하는 건 결국 시간을 지불해서 아픔을 사겠다는 결정이었구나, 이런 게 내가 원했던 사랑이었고… 하면서.
끝이 확정되어 있기에 “보고싶어”라는 그 흔한 말조차 머뭇거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결국 터뜨려버리고 집으로 뛰어와서 듣는 심장소리. Tu vas venir me
voir?나 보러 올 거야? Mon parfum ne te manque pas?내 향수 냄새 안 그리워? 따위의 말들로 대체하던 그 원형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겪었기에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그런 사랑. 미몽처럼 흐릿한 사랑을 프랑스는 분명 뚜렷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어버리고 싶다.
꿈꾸던 곳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어떨지 실없는 걱정도 해보면서,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의 나는 자주 가던 헤어숍에서 컬이 도드라지는 히피펌을 받고, 오른 콧볼에 자리한 피어싱은 보란 듯이 더 반짝이는 피어싱으로 바꾸어 낄 것이다. 하지만 더 아픈 쪽은 콧볼이 아니라 꼬리뼈일 것이다. 지루하고 긴 비행에 시작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붙이고 나면, 그 이름표를 잊지 않기 위해 꼬리뼈의 통증 정도는 내어줄 수 있겠다. 기체의 떨림은 내 심장의 떨림과 동일하게 여겨질 것이고… 기체가 안정되면 작은 가방에서 키보드를 꺼내 꾸밈없는 글자들을 써낼 것이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내내 최선을 다해 나다워질 수 있는 도시를 꿈꾸면서.
2024년 2월. 파리를 기다리는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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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여겨볼만한 파리의 빈티지숍 세 곳을 소개합니다.
Thanx God I’m a V.I.P.
12 Rue de Lancry, 75010 Paris, France
“스태프들의 성격이 러블리해요”라는 리뷰가 인상적이었던 곳.
Vintage by Ramin
64 Rue de la Verrerie, 75004 Paris, France
구글맵에 LGBTQ+ 친화적이라 써둔 무지갯빛 스팟. 리뷰에 달린 감사인사들, 빈티지 의류와 더불어
Ramin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Urban Vintage Paris
50 Rue du Faubourg du Temple, 75011 Paris, France
의류의 퀄리티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을 보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종종 “파리에 있는 빈티지숍에서 샀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