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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성경

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9편

by 곰탱구리 Mar 28. 2025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H는 마음이 급해졌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천사를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찾지? 아냐 찾아도 뭘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폭력피해자를 찾아다녀야 되나? 아니 꼭 여자라고 단정 지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천사예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고. 넌 천사다, 탈피하고 구원받자? 이렇게 물어보면 미친놈이라고 당장 신고부터 하겠지? 아냐 아냐 내가 구원자로서 준비를 먼저 해야 해.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H는 책장에서 다이어리 한 권을 꺼냈다. 2024년이라는 금박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있었다. 회사 이름도 정면에 크게 써 놓았다. 

'정일 도료 화학 주식회사'


12월 말에 H가 바쁜 성중이 대신 소방점검 나갔었던 업체였다. 소규모 기업이라 소방상태는 엉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소기업 현실 상 법적인 소방기준을 위반하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는 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대기업도 마찬가지인 형편에 소기업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에 관내에서 발생한 큰 화재사건 때문에 소방점검을 전수 실시 하라는 지시 때문에 모든 소방관이 동원되어야 했다. 그 덕에 평소에는 생략하고 지나가던 소기업까지 소방검사를 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입구부터 지적은 쏟아져 나왔다. 


"화재경보기 상태 불량, 소화기 미구비, 방화구역 임의 개조, 방화문 미설치... 뭐 이건 몇 가지 지적할게 아니고 처음부터 다 구비시키는 것이 낫겠네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작은 회사가 무슨 돈이 있어 그 많은 걸 다 구비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공장 하지 말라는 거나 다를 바 없어요. 요즘 경기도 바닥인 데다가 중국제 싸구려 제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와서 장사가 안 돼요. 자금이 돌지 않아요. 우리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관리부장이라 자신을 소개한 50대 초반의 남자는 H에게 비굴한 얼굴로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공장 전체가 70평이 채 안돼 보이는 단층 건축물이다. 녹이 군데군데 슬어있는 양철 지붕은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저도 입장이 곤란해서요. 아시다시피 얼마 전 시화공단 M사 화재 때문에 합동점검이 지시로 내려왔어요. 아무것도 지적 안 하고 가면 저도 나중에 책임져야 됩니다"

"에휴~! 저희는 망합니다. 진짜 공장 문 닫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H는 고민에 잠겼다. H가 생각하기에도 지금까지 지적한 사항을 다 과태료로 때리면 수천만 원은 족히 나올 것이다. 거기다 소방설비까지 전량 구비하려면.... 에구 방화구역 임의 개조한 거 원상 복구하는 것만으로도 최소 천만 원은 넘게 필요할 것 같았다.

"부장님~! 이렇게 하시죠. 다른 거는 몰라도 저기 천장의 방화구역 임의 개조하신 곳 하고 방화문은 중고라도 구해서 달아놓기라도 하시죠. 저건 정말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호의가 권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H는 생각했다. 

"합동점검이라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두 가지는 지적사항으로 기재하겠습니다."

관리부장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씨발 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뭐 알아서 하십시오"

그나마 회사의 입장을 고려하려 했던 H는 관리부장의 감정적인 태도에 빈정이 상해 모든 지적사항을 기재하여 점검보고서를 올렸다. 그로 인해 정일도료는 수천만 원의 과태료를 얻어맞게 되었고 6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게 되었었다.


'그런 주제에 다이어리는 더럽게 고급스럽게 만들었네'

단단한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표지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부드러웠다. 

"이 다이어리는 앞으로 구원자의 행동지침이 될 거야. 구원의 성경이라 명명하겠어"

H는 다이어리의 첫 Page를 열었다. 내부 종이도 매끈하고 순백처럼 하얀색이었다. 

 '고민해 보자 우선 천사를 찾았다고 가정하면 뭐가 필요할까?'

H는 다이어리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가기 시작했다. 2~3시간이 넘는 고민 끝에 내용을 정리했다.


천사의 조건         준비사항

1. 하늘의 기운 - 때가 도래해야 가능

2. 땅의 기운    - 바닥에 고정, 쇠사슬을 통해서 땅의 기운을 흡수

3. 불의 기운    - 화재, 방화를 통해 그 정도의 열을 방출하려면 신나 혹은 유기화학물이 필요

  

H는 자신이 기재한 내용을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었다. 

'하늘의 기운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쇠사슬은 개를 키워야 하나? 불은 뭐 신나나 휘발유 정도면 되지 않을까? 젠장 그런데 적어 넣고 보니 무슨 사이비 종교 같네'


H는 일단 집을 나섰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았으나 철물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차를 몰고 안산, 화성, 수원에 있는 공구상가를 다니며 적당한 굵기의 쇠사슬과 자물쇠를 구비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안양에서 1L짜리 휘발유 1통을 구입했다. 물론 CCTV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자를 꾹 눌려 쓰고 입었던 후드티는 헌 옷 모으는 곳에 버렸다. 기동력을 위해서는 대포차가 필요했으나 구하기도 어려웠고 돈도 부족했다. 그래서 가장 흔한 모델의 120CC짜리 오토바이를 구입해서 집 근처 으슥한 골목에 세워 놓았다. 배달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거북섬 근처로 지정하여 받았다. 이곳은 개발 지역으로 아직 원룸이 다 지어지지 않아서 골목이 한적하고 사람도 많지 않아 오토바이를 보관하기에는 적격이었다. 더군다나 가장 좋은 건 CCTV가 몇 개 없다는 점이었다. 





하루를 푹 쉬고 정상출근 하였다. 만나는 동료마다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며 내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해 줬다. 서장의 계략이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H는 순식간에 정의로운 휴머니스트가 되어버렸다. 소방일보에 기재된 홍보팀의 사연팔이는 이를 더 부채질하였다. 

'제길 이러면 따로 움직이기가 좀 그런데. 그지 같은 새끼들. 남의 불행을 잘도 이용해 먹는군. 서장이야 그렇다 치고 홍보팀은 왜 그런 거지? 서장이 돈이라도 먹였나?'

"여~! 우리의 휴머니스트 소방관님! 몸은 좀 어떠신가?"

"왜 그러세요? 놀리지 마세요. 팀장님!"

"뭐 어때? 조금 과장은 있어도 소방관에 대한 인식이 나빠질 건 없잖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암튼 고생 많았어.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서 오늘도 힘차게 일해보자고"

"넵"

지휘조사 2팀 전원이 힘차게 소리쳤다. 


며칠간 큰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소한 구조 출동만 7~8건 이상 발생되어 심신만 지치게 만들었다. 

"에휴 뭔 벌이나 잡으려고 소방관이 되었나 자괴감이 드네요"

후배인 민상이가 투덜거리며 방호복을 벗어 벽에 걸었다, 

"마~! 큰 사고 안 생기는 게 감사한 거지. 어디서 불평질이야?"

"하긴 그건 그렇지요 저번같이 큰 화재는 어휴 사양합니다."


민상이의 과장된 몸짓에 웃음을 짓기는 하였지만 H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천사를 찾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찰에 아는 지인이 있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법적으로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공식적인 정보를 알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물어보며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옸다. H가 가정폭력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자 후배 소방관인 김영철이  슬그머니 다가와 H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형님~! 형님답지 않게 가정폭력에 뭔 관심 생기셨수?"

H는 영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뜨끔 했지만 평소에 연습해 온 데로 대답했다.

"저번 사고 때 사망하신 고 길마리 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정폭력 피해자였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유가족 이야기를 들어보니 혼자 너무 불행한 삶을 살아오셨더라고. 최후까지 그렇게 비참하게 가시게 되신 걸 보니까 그분 하고 동일한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께 내가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없을까 해서..."

"그래요? 형님이 충격을 많이 받기는 받았나 보에요. 제 여자 친구가 여성인권 진흥원에 다녀요. 여성긴급전화 상담원인데 한번 물어볼까요?"

"물어보는 건 좀 그렇고. 휴무일에 내가 술 한잔 살게 너랑 같이 한번 만나자. 이것저것 이야기도 들어보고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어떤 게 있는지 생각도 좀 해볼 수 있을 것 같고"

"그러죠 한번 물어보고 가능하면 약속 잡을게요"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H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얼굴에 초췌함이 점차 늘어만 갔다. 출동이 없을 때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간단한 구조 출동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실수를 자주 저질렀다. 그나마 영철이의 여자 친구에게서 폭력피해 여성보호시설의 자원봉사를 소개받아 일하게 되었고 거기서 친해진 다른 봉사자들의 입을 통해 천사 후보자 몇 명의 이름과 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만큼은 뛸 듯이 기뻐했다. H는 그렇게 얻은 정보를 다이어리에 꼼꼼하게 기재하였다. H는 소위 '구원의 성경'이라고 명명한 다이어리에 후보자가 거주하는 건물이름을 기준으로 '가나다' 순으로 정리하여 기록해 나갔다. 소방서 사물함에 넣어놓고 가끔 펼쳐보며 하늘의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H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H 너 요즘 왜 그래? 뭔 걱정 있냐? 얼굴은 또 그레 뭐고? 뭔 고민 있어?"

"별일 아니야. 그냥 요즘 몸이 힘드네."

"돈이야 여자야? 니가 승진에 관심이 있는 놈은 아니고 돈 아니면 여자 아냐?"

"칫! 웃기는 놈 같으니라고. 니가 생각하는 게 다 그렇지"

"아이고 고차원이신 우리 H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실까?"

"쉰소리 그만하고 라면이나 내놔"


H는 성중이가 양손에 들고 온 컵라면 중 오른손에 쥐고 있던 튀김우동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야! 튀김우동은 반칙이지. 그거 내가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마 형님이 요즘 위가 좀 안 좋잖아. 매운 거 못 먹겠다. 신라면은 니가 먹어라. 근데 김치는 없냐?"

 "김치? 김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언제부터 우리가 라면에 김치를 먹었다고? 여유 좀 되세요?"

"알았다 알았어 빨리 먹기나 하자. 또 비상 걸릴라"

말이 씨가 된 것일까? 갑자기 비상벨이 소란스럽게 울렸다. 화재경보였다. 

"애애애앵 ~!!"

"화재출동! 화재출동! 정왕동 신성정밀에서  화재발생! 화재발생! 전 대원은 즉시 출동! 다시 한번 전파한다. 정왕동  신성정밀 화재 발생! 화재발생! 즉시 출동"

"에이 고놈의 조둥아리가 방정이네... 허긴 우리가 무슨 복으로 편히 라면을 끓어 먹겠냐? 야! 얼른 가자!"


H는 가슴이 갑자기 뛰었다.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였다. 혹시 천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H는 떨리는 손으로 사물함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다이어리를 펼쳤다. 구원의 성서라는 붉은 매직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오자마자 H의 가슴은 흥분으로 숨이 가빠졌다. 


"지읒 지읒 정왕동은 대상이 아무도 없어. 제길~! 아니지 이건 주거지니까 직장은 다르지. 일단 출동해 보면 알게 될 거야. 하늘의 기운이 충만해져서 천사가 나를 찾아온 것일 수도 있어. 서둘러야겠어"

H는 서둘러 다이어리를 사물함 속으로 던져버리고 방호복을 들고 뛰어나갔다. 던져져 사물함 벽에 부딪친 다이어리는 'ㅅ' 부분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신천동에 주소를 가진 두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신상명세가 기록되어 있었다. 'ㅅ' 이외의 다른 페이지에도 몇 명의 이름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며 펼쳐졌던 다이어리가 오른쪽 방향으로 쓰러지며 열렸던 페이지가 닫혔다. '구원의 성경'이라고 쓰인 글자가 없었다면 그냥 평범한 다이어리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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