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8편
찬기의 불평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돈이 많은 상류층이라 조금만 비위를 맞춰주면 떡고물이라도 떨어지리라 기대했었나 보다. 기대가 어긋나자마자 바로 불평이 쏟아지는 걸 보니 정말 상종하지 못할 속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H는 그런 찬기를 무시하고 소영에게 걸어갔다. 18세 치고는 매우 조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슬픔이라기보다는 뭔가 알 수 없는 비련미가 가득 넘치는 얼굴이었다. 소설 속에서 백혈병이나 기타 불치의 병으로 죽음을 앞둔 여주인공들이 저런 얼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상복에 아직 리본은 달려있지 않았다. 아마도 입관 전이기에 그랬으리라.
"누구시죠?"
소영은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H와 찬기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 저는 박찬기라고 하고 이 친구는 H입니다. 시흥소방서에서 나왔습니다."
박찬기는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다가 빤히 쳐다만 보는 소영의 태도에 멋쩍은 듯 고개 숙여 인사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소방서에서는 고 길마리 씨의 죽음에 깊이 애도하고 있으며 최선을 다했음에도 안타깝게 구조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심심한 사죄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H는 남자에게 했던 말을 녹음해 놓은 것처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하는 찬기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네"
아무리 이혼하고 따로 살았다고 친엄마의 죽음에 대한 딸의 반응은 너무도 차가웠다. 단조로운 한마디 답변 말고는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침묵을 이어나갔다.
"혹시 고인의 마지막에 대해 궁금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어색한 침묵이 버거웠던 H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한마디 거들었다.
"화재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네" "네"
찬기와 H는 동시에 대답했다. 두 사람은 멋쩍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영이는 계속 땅만 바라볼 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40대 초반의 한 여자가 수수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40대 아줌마였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이미 한가득 고여있었다. 가슴에 커다란 서류 봉투를 하나 품고 소영이 앞에 멈춰 섰다.
"아무리 엄마가 이혼했고 따로 살고 있어도 딸내미가 엄마 사진 하나 쯤은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니? 남이니? 아니 남 보다 못하네. 남 보다 못해. 저렇게 디져버릴거 뭐 한다고 그리 애쓰고 살려고 지랄 떤 거야? 그냥 약 먹고 죽어버리지, 아니면 맞아 죽던가?"
"미안해요 이모. 엄마 사진은.."
"알아 알아. 니 애비가 다 갖다 버렸겠지.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도, 삼대가 원수를 졌어도 그렇게는 안 했겠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천벌을 받아 디져야 될 놈은 안 데려가고 지지리 고생만 죽어라한 니 엄마를 왜 데려갔다냐? 왜?"
이모라는 40대 여자는 장례식장 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소영이도 그제야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크게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한참을 울던 이모라는 여자는 남자가 돌아오자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울느라 바닥에 떨어뜨렸던 봉투를 집어 들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고 길마리 씨의 영정사진이었다. 지금의 사진이 아니고 과거 20대 후반의 상큼한 생기가 넘쳐흐르는 사진이었다.
"니 엄마 제일 이쁠 때 사진이야. 흉하게 가지 말고 이쁘게 가라고"
H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이야 H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자신이 조금만 더 잘했다면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천사로 탈피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엄마 덕분에 아름다운 천사가 되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아름다운 천사가 되어서 하늘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다."
H는 무심결에 자신이 시체안치실 복도에서 보았던 그녀의 마지막 장면을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이모라는 아줌마가 뒤를 획 돌아보며 H에게 따지 듯 물었다. H는 그 시퍼런 사슬에 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니 그러셨을 거라고요"
"근데 누구세요? 우리 언니 지인이신가요?"
여자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나마 분위기가 좋아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찬기가 나섰다.
"저희 소방서에서는 고 길마리 씨의 죽음에 깊이 애도하고 있으며 최선을 다했음에도 안타깝게 구조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심심한 사죄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H는 뜨악했다. 박찬기의 뒤통수를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아니 뭐 진짜로 녹음기라도 튼 거야? 아니면 대본을 써서 외운 거야?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
박찬기의 영혼 없는 목소리에 화난 것은 H 뿐만이 아니었다. 돌아와 장례식장의 이것저것을 준비하던 남자도 뒤를 돌아보며 박찬기에게 한 마디 했다.
"이봐요 알았으니 그만 가보세요. 그리고 그쪽도 장례식 준비해야 하니 서두르지? 연락 돌릴 곳 있으면 얼른 연락하고. 난 여기 세팅만 해주고 가야 되니까"
"어련하실라고요. 바쁘시겠지요. 벌레만도 못한 전처 장례식 챙겨줄 만큼 자비로운 위인은 아니니까"
이모란 여자의 응대가 만만치 않았다.
"에휴! 이래서 격이 맞지 않는 것들은 상대하면 안 되는 건데. 소영이만 아니면... 소영아! 아빠가 대신해서 입관하고 장례는 상조 화사하고 비서실 사람 불러 놨으니까 넌 아무 걱정 말고 장례치르고 와"
"........ 네"
소영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엄마의 영정사진을 주시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사람을 개 패듯 패고 죽지 않으려고 경찰에 신고한 걸 가지고 의처증으로 몰아 1년 넘게 정신병원에 가둬놓고 그걸 핑계로 위자로 한 푼 없이 자식까지 빼앗아놓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장례는 치러줘야지 이 개자식아!"
이모의 악다구니에도 남자는 눈하나 깜짝 안 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밥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화장하기로 했으니 화장터에서 보자"
소영에게 이렇게 말하고 난 후 그제야 남자는 얼굴을 크게 찡그리고 이모라는 여자를 힐끗 쳐다본 후 뒤도 안 돌아보고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큰 상조기를 앞세운 상조회사 직원들이 5명 도착했다. 동시에 꽤 비싸 보이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녀 한쌍이 도착하여 소영이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비서팀에서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이제 사진이나 몇 장 찍고 가자고"
박찬기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H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H는 그런 찬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소영이에게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구해드리지 못해서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아뇨. 어쩔 수 없는 사고였잖아요."
H는 정중한 위로의 말고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소영이도 같이 고개를 숙였고 찬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H는 이모라는 여자에게도 가서 똑같이 인사를 했다. 이모라는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인사만 하고 유가족 휴게실로 들어가 버렸다.
"뭐 할 거 다 했으니 가자. 배도 고프고 퇴근시간도 다 됐네"
"먼저 가세요. 저는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요"
"알았다. 난 간다"
박찬기는 먼저 나가버린 전남편과 똑같이 전혀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H는 멍하니 그녀의 영정사진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천사였어요. 내가 잘 몰라서 구더기라고 욕했던 거 용서해 줘요. 하늘에서는 정말 행복하게 살아요.'
"식사 차려 드릴까요?"
상조회에서 나온 아주머니 한분이 멍하게 서있는 H에게 사무적인 말투로 물어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갈 겁니다"
H는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조금도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가슴은 무언가 벅찬 감정이 꽉 메우고 있었다. H는 자신이 어제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랄까? 아니면 숨겨졌던 아주 소중하고 대단한 것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성격도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식사 드실 건가요?"
또 다른 상조회 아주머니 한분이 식사여부를 물어왔다. H는 대충 어색한 미소로 얼버무리고 그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H는 1층의 화장실로 올라갔다. 한구석에 있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머리가 아직 혼란스러웠다. 정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장시간을 고민하다 정리된 내용을 수첩에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하나, 세상에는 천사가 존재하고 어떤 순간 계기가 주어지면 탈피를 해 다시 천사로 구원받는다.
둘, 천사는 죄을지어 이 세상에 내려왔기에 인간으로 존재할 때 고난과 핍박에 시달린다.
셋, 탈피의 조건은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 그리고 이를 하나로 만들어 줄 뜨거운 열이 있어야 한다. 하늘의 기운은 시기가 도래하면 자연히 충만해지고 땅의 기운은 반드시 이를 충전해 줄 매개체가 땅과 천사의 고치를 연결하여야 한다. 쇠사슬 같은... 열이야 불이 나면 저절로 생기는 거고
넷, 땅에 떨어질 때 충격과 인간세상에서의 고난과 핍박으로 자신이 천사인 줄 모르고 있고 특히 탈피하여 천사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나 같은 구원자가 필요하다
다섯, 이 땅에는 아직도 많은 천사가 벌을 받고 있으며 나는 구원자로서 그 천사들의 탈피를 도와주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H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한가득 피어났다.
"그래 바로 이거야"
말끔하게 정리된 수첩을 여러 차례 읽으며 H는 고개를 끄떡였다. 화장실 휴지통에는 마구잡이로 구겨지고 찢긴 종이들로 꽉 차있었다.
'그 이모라는 여자의 말에 따르면 고생하고 남자에게 맞고 살았던 것이 틀림없어.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남자에 의해 부당하게 정신병원까지 갔었다니 아마도 강제로 이혼당한 것이 틀림없어. 그래서 혼자 나와 살다가 탈피의 시기가 되었음에도 이를 인식 못하고 쇠사슬을 준비 못한 거야. 그래서 그날 천사로 탈피하지 못한 거야. 이제 알았다. 이제 내가 모든 천사들을 도와줘야 해. 난 구원자니까'
드디어 정리가 끝났다. 천사가 되는 조건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이 구체적으로 설정되었다. H는 급히 화장실을 나왔다. 마음이 급했다.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