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르- 사르륵. 프랑스 니스해변 위에 나란히 앉아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우린 이런 낭만적인 대화를 나누었더랬다. 대화가 멈춘 빈 공간은 파도 소리로 채워졌고 우린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사실 나는 파도 소리보다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느라 차마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와 보내는 니스에서의 둘째 날 밤이었다. 그날은 유독 별이 빛나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
남프랑스 휴양도시 니스(Nice) 해변
홀로 여행한 지 8일 차. 사시사철 따사로운 햇볕이 비추는 프랑스 남부 지방의 휴양도시인 니스(Nice)에 도착했다. 이날은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로 기차와 비행기를 오가며 약 10시간에 걸친 지루한 이동의 날이었다.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프랑스의 첫 도시에 입성했다는 사실만으로 들떠있을 때쯤 호스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한국인을 만났다. 오늘 하루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니스에서 만난 첫 한국인이였던 그에게 선뜻 맥주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도 흔쾌히 좋다고 말을 했고 우린 시내로 향했다.
자정이 돼가는 시간, 4 Non Blondes의 What's Up 노래가 흘러나오는 술집에 우리도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이미 기분 좋게 취해있었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그들을 따라 얼른 취하고 싶었다. 피로감은 사라지고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4 Non Blondes - What's Up
만남은 자연스레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오늘의 목적지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모나코(Monaco)로 향했다. 1시간 반가량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여정이었는데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결국 바로 자리에 앉지는 못했지만 짧은 시간이 아닌 만큼 간간이 한 자리씩 빌 때마다 입맛을 다시며 빈자리를 쳐다보곤 했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여행한다는 것. 버스에 한자리가 비어도 서로 자리를 양보하다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겨 아무도 앉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것. 어쩌면 불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혼자라면 누구도 신경 쓸 것 없이 재빨리 자리에 앉아버리면 될 것을 둘이 되면, 그것도 그 사람이 만약 낯선 사람이라면 함께한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
마침 모나코에 다다르기 몇 분 전 두 자리가 비어 우리는 조금이라도 앉아 갈 수 있었다. 편안해진 몸으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끝없는 바다의 향연을 보며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여서 가능한 여행. 좋은 풍경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 그 나라의 고유한 음식들을 다양하게 시켜놓고 함께 맛볼 수 있다는 것, 잔을 부딪치며 음식의 품평을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혼자일 때보다는 덜 외롭다는 것. 그것이 둘이어서, 혼자보다는 둘이여서 좋은 이유이다.
모나코는 규모는 작지만, 지난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조사한 1인당 평균 순 자산이 가장 많은 나라로 꼽힐 만큼 부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경찰서마저 우아한 그 나라의 화려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쯤 1초에 한 대씩 번쩍번쩍한 슈퍼카들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차들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다 보면 바다를 마주하게 되는데, 바다에도 역시나 휘황찬란한 요트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 화려함을 과시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조화로운 정말이지 완벽한 부호들의 세계라는...느낌을 받았다.
그 세계를 벗어나 니스로 돌아왔다. 우리는 저녁에 니스 해변 앞에서 마실 와인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마트에 들렀다. 프랑스는 와인의 고장인 만큼 마트에서 아무 와인이나 집어도 성공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하나하나 따져보며 신중히 와인을 골랐다. 화이트 와인과 치즈. 오늘은 너네로 정했다.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를 나누던 수평선이 무너져 하늘이 곧 바다였고, 바다가 곧 하늘 같았다. 그리고 우리도 한잔 두잔 부딪혀가며 우리 사이의 경계를 조금씩 조금씩 무너뜨려 갔다.
사르르-사르륵.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오늘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걸.
그날은 유독 별이 빛나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와 보내는 니스에서의 둘째 날 밤이자 마지막 밤이었다. 그가 떠나간 다음 날, 나는 그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르르-사르륵. 자갈들 사이를 파도가 사르르 끼어들어 왔다가 사르륵 하고 뒷걸음치는 소리. 이 소리구나. 파도 소리를 들으며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를 느꼈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여행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된다는 건 그 사람의 빈자리를 느끼며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로운 일이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 그렇게 둘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