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식과 서양식 정원의 혼합, 헤네랄리페
힘들게 찾아온 알함브라궁전에 입장하니 정확히 3시 30분. 나시르궁 입장 예약시간이 4시 30분이니 한 시간 내에 헤네랄리페를 둘러봐야 한다. 헤네랄리페(Generalife)는 알함브라궁전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나스르왕들의 여름별궁인데, Generalife는 아랍어로 '건축가(조물주를 뜻함)의 정원', '통치자의 정원', 또는 '채원(Vegetable garden)'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자크 브노아 메상은 그의 <정원의 역사>라는 책을 알함브라 정원에서 시작해서 헤네랄리페의 찬양으로 끝낸다. 메상이 그토록 찬양한 무어인의 정원(Moorish Garden)의 대명사 헤네랄리페, 과연 어떤 곳일까?
가슴이 두근두근, 힘들게 찾아오느라 헐덕거렸던 숨을 가다듬으며 길 표식을 따라 아내와 함께 사이프러스가 양 옆으로 하늘을 찌르는 길을 걷는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알함브라궁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천천히 걷는 기분은 상큼하다.
그런데 우리를 처음 맞이해 주는 곳은 사이프러스나무를 사각모양으로 요상하게 다듬어 만든 정원이다. 군인들의 바싹 깎아 올린 머리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분재를 보는 것 같기도 해 어쩐지 알함브라스럽지 않은(?) 느낌이다. 1931년에 조성되었다는 팻말이 붙어있다.
나무들을 비틀어 억지로 만든 사이프러스 아치터널도 지나 헤네랄리페 궁 입구에 도달하니 사람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헤네랄리페궁인가 보다.
물이 중심이 되는 이슬람정원답게 연못도 있고 수반도 보이는 그럴듯한 정원들을 지나 사람들에 밀려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비로소 사진으로 익히 보던 아름다운 정원 하나가 나타난다. 헤네랄리페의 진수라는 수로의 중정(Patio de la Acequia). 폭이 1.2미터, 길이가 50미터쯤 되어 보이는 연못을 중심으로 앞 뒤로 여름궁전 건물이, 양 옆으로는 벽과 아치 문들로 둘러 싸여 있다. 연못을 향하여 분수의 영롱한 물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속삭이고, 입구에는 꽃잎 모양의 대리석 수반 위로 찰랑찰랑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연못 양 옆에는 잘 다듬어진 도금양나무가 테두리 하고 그 옆에 곱게 심어진 이름 모르는 꽃들이 정원의 봄기운을 한층 돋운다.
그런데 수반 앞에 멋대가리 없이 놓여 있는 막(?) 화분은 또 무엇인가? 사람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둔 건가? 아니면 이것도 정원의 일부인가? 정원은 분명 화사하고 아름답지만 내게는 조금은 어색하고 고개가 갸우뚱. 이것이 진정 알함브라가 자랑하는 지상의 낙원 Moorish garden 맞나?
무어인들이 떠난 후 오랜 기간 정원은 방치되거나 여러 관리자에 의해 변형되었다. 지금의 이 정원은 사실 나스르시대의 이슬람정원의 원형이 결코 아니다. 그 원형은 잊힌 체 여러 시대를 거쳐 변형에 변형을 거듭한 후, 늦게나마 최대한 원형을 찾으려 한 게 지금의 모습이다. 당근 동력 대신 네바다산맥에서 끌어온 자연의 수압을 이용하긴 했지만 연못의 분수들도 20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정원은 애초 지중해 연안 문명의 발상지인 사막지대에서 처음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에서부터 페르시아의 정원들, 사막의 그 정원들은 외적을 막기 위해 벽과 울타리로 둘러싸거나 높은 곳에 만들어졌다. 그 이후 이슬람 정복시기를 통하여 널리 퍼진 아랍의 정원양식은 우마이야왕조에 의해 다마스쿠스에서 스페인으로 옮겨져 마침내 사막이 아닌,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 풍부한 물을 가진 스페인에서 그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정원이란 말은 Paradiso(낙원)에서 기원한다. 사막생활의 고달픔에 젖어 온 사람들에게는 정원은 곧 낙원을 의미한다. 또한 정원은 코란의 내용을 충실히 지키는 이들에 대한 알라신의 보답이라 여겨졌다. 이슬람은 정원을 성채로 에워싼 폐쇄 공간에 둠으로서 천상의 낙원에 연계시켜 확실한 행복의 상징으로 만든 것이다.
서양의 정원들이 멀리 바라보기 위해 주위의 경치를 그 안에 포용하는데 비해 이슬람 정원은 외부로부터 독립하여 문을 걸어 잠근 채 주위가 아닌 중심에 관심을 가지는 향락의 낙원을 지향한다고 말한 메상의 말에 수긍이 간다. 이 수로의 중정(Patio de la Acequia) 말고도 헤네랄리페궁 내에는 크고 작은 10여 개의 정원들이 있다. 입구의 정원, 낮은 정원, 높은 정원, 술탄의 정원, 격자무늬정원 등등.
그중에서도 내가 아는 것은 전설에 얽힌 말라죽은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술탄의 정원 정도. 그 외에는 다 비슷하고 그저 그래 잘 구분하기 조차 힘들다.
궁전 건물 맨 위에 올라 서니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아름다운 덩굴 꽃들로 담을 뒤덮은 격자무늬 정원도 눈에 띈다.
헤네랄리페궁의 정원들을 대충 돌아보고 나온 느낌은 분명 아름답게 잘 가꾸어진 정원임엔 틀림없지만 정령 아랍식 정원인가? 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랍식보다는 서양식 정원에 더 가까운...
나무터널을 지나 헤네랄리페궁을 나오니 눈 아래 펼쳐진 정경 역시 아름답고 눈부시다. 좀 생뚱맞기는 하지만 알함브라궁 옆의 이색적인(?) 성당의 십자가도, 사이프러스가 일렬로 병풍을 친 화사한 화단도 여기서 보면 다 그림이다.
굳이 아랍식이면 어떻고 서양식 정원이면 어떻고 짬뽕이면 어떠리! 잘 보존된 원형이면 더 좋겠지만 최근에 복원된 것인들 어떠리! 꽃과 나무는 끊임없이 피고 지니 정원은 누군가 가꾸어야만 한다. 어차피 세월은 모든 것을 변형시키기 마련 아닌가? 이런저런 주인을 따라 더 좋게 변형된 것이 지금의 결과물이라면 누가 헤네랄리페의 정체성에 대하여 굳이 시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잠시나마 이 정원에서 즐겁고 행복해진다면 무어인들이 바라고 꿈꾸던 그 Paradise를 우리 모두 경험하는 셈 아닐까? 헤네랄리페를 뒤로 하고 나스르궁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한 층 더 가볍다. 우리도 낙원을 경험했기 때문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