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의 숨겨진 보석
오늘은 아침 일찍 시외버스를 타고 20 여분 거리에 있는 라구사로 향한다. 버스가 산길을 따라 구불구불 돌 때마다 차창 밖으로 보이곤 하는 라구사의 경관은 특별하다. 모디카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회색 톤의 도시이다. 그에 반해 라구사는 깊은 계곡과 주위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파노라믹 한 경관을 자랑한다. 우리는 어디에 내려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변두리 종점까지 와버린다.
사실 우리는 별로 아는 것도 없이 라구사에 왔다. 라구사가 8개의 시칠리안 바로크 도시 중 하나이고 그중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것 외에는. 무엇을 보러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몰라 일단 시내 중심가 쪽을 향하여 걷는다. 인구 75,000의 대도시(?) 답게 시내는 제법 복잡하고 기차역 부근은 현대식 건물들만 눈에 띈다. 라구사의 바로크는 도대체 어디에 있지?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물으니 이브라(Ibla)로 가라고 한다.
라구사(Ragusa)를 보러 왔는데 이브라로 가라니! 다시 물으니 바로크는 버스로 30분쯤 걸리는 구도시 관광지구인 이브라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행인이 가르쳐준 11번 버스를 무작정 탄다. 버스는 산골 마을을 오가는 우리나라 시골 버스와 거의 비슷하다. 주름이 깊게 파인 작달막한 시골 노인네와 아낙들이 내리고 타며 서로 인사들을 하고 차 안에서도 수다가 계속된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긴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오래된 산골 동네들을 좁은 도로로 지나며 구불구불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아래로는 푸른 계곡이, 계곡 너머에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들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 나타난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브라(Ibla) 임을 알겠다.
이브라는 마치 계곡 속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아마 수백만 년 전에는 실제로 섬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로크를 보기도 전에 이브라에 먼저 혹한다. 계곡 속에 우뚝 솟은 바로크 도시 이브라(Ibla). 계곡에 안개라도 끼이면 구름 위의 떠 있는 듯한 환상 속의 이브라가 될 것 같다. 라구사 역시 높은 라구사(Ragusa superiore)와 낮은 라구사(Ragusa inferiore)로 구분된다. 구도시 이브라(Ragusa ibla)는 낮은 라구사에 위치한다. 1,693년 대지진으로 이브라(Ibla)가 거의 파괴되자 사람들 대부분은 높은 라구사로 옮겨가 신도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파괴된 이브라는 그 곁에 새로운 바로크 도시를 건설함으로 오랜 역사의 이브라를 그대로 이어갈 수 있었다.
버스를 내리니 아담하고 우아한 산 주세페 교회(Chiesa di San Giuseppe)가 나온다. 이어 4월 25일 거리를 따라 조금 걸으니 야자수 나무가 멋지게 펼쳐진 두오모 광장이 나오고 그 앞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산 조르지오 교회(Chiesa di San Giorgio)가 서 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모디카의 산 조르지오 교회와 이름도 똑같고 모양과 분위기도 거의 비슷하다. 알고 보니 이 두 교회는 인근 노토 출신의 유명한 바로크 건축가 로사리오 갈리아르디(Rosario Gagliardi)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브라 지구를 찬찬히 둘러보는데 역시 좁고 구부러진 골목들이 많다. 하지만 골목길들이 모디카처럼 가파르지도 않고 계단도 별로 없어 아내와 함께 걷기가 아주 좋다. 유니크한 바로크 조각으로 장식된 팔라죠(귀족이나 유력자들의 집)도 보이고 평범한 골목길 사이로 삐꿈이 보이는 산과 계곡들, 모디카에서는 느낄 수 없던 이브라의 상쾌함이다.
점심때가 되어 길가에 보이는 한 식당으로 들어간다. 시칠리아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먹물 파스타와 정어리 스파게티를 주문하고 화이트 와인 한 잔씩으로 기분을 낸다. 이탈리아 요리만큼 쉬운 요리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프랑스 요리가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것이라면 이탈리아 요리는 신선한 해산물과 제철 재료를 사용하여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기만 하면 된다. 시칠리아 파스타는 당연히 맛있어야 하고 먹어 보니 사실 맛있다. 기분 좋게 나오는데 계산서가 40유로다. 파스타 한 접시에 10유로라 적어 놓고 와인 한 잔에 10유로라니! 허허! 이젠 이 정도의 바가지(?)쯤이야 여행의 일부이니 애교로 받아드려야지. 여기는 시칠리아 관광지 아닌가? 그래도 이브라는 아름답다. 기막힌 경관 위에 세워진 바로크 건축물, 화려한 바로크를 더욱 빛나게 하는 옛 도시 이브라에서 자연과 바로크의 절묘한 조화를 보는 것 같다. 이브라는 시칠리아에서 아름답고 때 묻지 않은 숨겨진 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