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작은 시골에 수많은 교회가?
노토(Noto)는 모디카에서 제법 멀다. 9시 30분에 출발한 버스는 여러 곳을 들락날락하더니 아주 작은 시골 마을 한 낡은 카페 앞에 선다. 운전기사는 10분간 쉬어 간다면서 카페 안으로 사라진다. 대부분 현지인들인 승객들도 우르르 내려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도 따라 카페 안으로 들어가 보는데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래된 시골 카페 안에는 70은 넘은 듯한 노인 한 사람이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다. 카페 주변 거리도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시골 기사)>에 나오는 가난하고 척박한 시칠리아 시골 모습 딱 그대로이다. 거리 어디에선가 베니아미노 질리가 부르는 고달프고 삶에 지친 <시칠리아 마부의 노래>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우리가 이렇게 느려 빠진 버스 여행을 불평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시골 풍경 때문이다. 가장 시칠리아다운 시칠리아는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노토는 라구사처럼 큰 도시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버스 정거장에 내리니 바로 중심가로 이어진다. 레알레 문(Porta reale)을 들어서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의 눈과 입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미인대회의 미녀들처럼 온갖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좌우로 서 있는 교회와 팔라조, 극장과 공공건물들. 거기엔 바로크의 화려함, 우아함, 황홀함, 유니크함 등이 모두 다 드러나 있다. 그것도 흩어져 있지 않고 모두가 한자리에. 노토를 빼놓고 어떻게 시칠리안 바로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구 2만 3천 명의 작은 도시 노토에서 시칠리안 바로크가 비로소 화려한 꽃을 피우고 마침내 완성된다. 노토의 바로크 역시 1,693년도 대 지진의 산물이다. 이탈리아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는 1,693년의 시칠리아 대지진은 무려 6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남부 지방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발 디 노토(Val di Noto) 지역의 시칠리아 후기 바로크 도시 8개는 지진 당시 최대의 피해지였다.
대지진 이후 이 도시들은 재건 사업에 나서는데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으로 도시를 새로 짓다시피 한다. 이 독특한 양식의 잘 보존된 건축물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시칠리안 바로크(또는 지진 때문에 생겼다 해서 지진 바로크)이다. 그중에서도 다른 도시와 달리 노토는 이 고장 출신의 R. 갈리아르디(Gagliardi) 등 유명 건축가들을 동원하여 완전히 새롭게 계획된 도시를 만든다. 기능과 미관을 함께 고려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를 축으로 도시를 선형으로 구획하고, 그 위에 바로크의 화려함을 입힌다. 당대 건축가들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노토의 바로크이다.
바로크(Baroque)는 16세기 중반부터 로마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간 음악, 미술, 건축 분야를 망라한 지배적인 예술 양식이다.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의 바로크(Baroque)를 1~2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임영방의 <바로크>라는 책은 무려 9백 페이지가 넘는다). 르네상스 양식이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다면 바로크 양식은 생동감, 풍요로움, 웅장함, 움직임 등 4가지로 특징 지을 수 있다(하인리히 뵐프린). 형식이나 틀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자유로운 정신을 구현하려는 바로크건축은 종국에는 화려함과 기교의 극치로 귀결된다.
바로크건축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전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덕분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수세에 몰리자 이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교황들은 화려한 바로크 교회당을 짓고 유명 화가들의 성화(聖畵)와 조각들로 교회를 꾸민다. 바로크는 가톨릭 교회의 웅장함, 위대함, 화려함을 과시하여 신을 믿게 하는 선전도구로서 발전한다. 우리가 보는 오늘날의 로마는 대부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바로크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동기가 어떠했던 그들이 남긴 바로크 건축물들과 그림들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지금 우리를 즐겁게 하고 있지 않는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Corso vittorio Emanuele)의 바로크 건물 하나하나가 5월의 찬란한 태양 아래 막 비저 놓은 조각처럼 아름답고 눈부시다. 특히 건축물에서 뿜어 나는 매우 특이한 돌의 색조, 꿀 색조(honey tonity)는 그 아름다움을 배가한다. 이 돌들은 모두 이 지역에서 나오는 석회석 돌이다. 신기하게도 황금빛 광선을 흡수하여 부드럽고 산뜻한 꿀 색조로 변환시킨다. 그래서 노토를 <돌의 정원(Giardino di pietra)>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돌의 한 가지 단점은 무르다는 것이다. 1,996년 중심가의 대성당(Basilica di San Nicolo-Cattedrale)의 돔이 내려앉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단단하지 못한 돌 때문이라고 한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고 이 돔은 2,001년에 복구된다.
성직자들이 거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 말고도 귀족들이 거주한 윗동네와 서민들이 거주한 아랫동네도 볼거리가 넘친다. 그런데 노토를 종일 돌아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로마도 아니고 가난하고 척박한 시칠리아 조그만 시골 땅에 왜 이런 화려한 바로크를 지었을까? 인구 겨우 2만 3천(당시는 훨씬 더 적지 않았을까?)의 시골 마을에 이런 바로크 교회와 종교시설이 무려 50개, 귀족들의 궁전이 15개, 마치 정원의 꽃들처럼 화려하게 지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의문은 바르지니(L.Barzini)의 책(The Italians)을 읽은 후에야 조금 해소된다. 바르지니는 그것을 이탈리아인들의 의식 속에 있는 쇼(Show) 기질이라고 말한다. 뭔가 보여주기 위한 것, 허세, 겉치레. 이탈리아 사람들은 집안에 보다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 이처럼 좋은 날씨에 어떻게 집안에 쳐 박혀 있겠는가? 밖에서 살다시피 하니 가진 건 없어도 자연히 남에게 멋있게 보이려 한다. 멋있는 옷, 멋있는 행동, 멋있고 웅장한 건물, 스펙터클한 구경거리 등. 요즈음 이런 전형적인 이탈리아인들의 속성을 Bella figura(멋있게 보이기?)라고 부른다. Bella figura는 오늘날 이탈리아를 세계 최고의 예술의 나라, 디자인 왕국으로 만든 동인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오랜 세월 외세의 지배(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아래 지내면서 주류로서 성공할 수 없는 이탈리아인들이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길은 예술뿐이었다. 최고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가 삼류 국가로 전락하고 별 볼 일 없던 주변 나라들에 의해 힘 한번 못 쓰고 짓밟혀온 것에 대한 굴욕감. 그래서 그들은 예술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고 그것은 또한 외세에 저항하고 복수하는 수단이기도 했다는 해석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가끔 회자되곤 하는 영화 <제3의 사나이>의 명대사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이탈리아는 30년간 보르자 가문의 압제하에서 전쟁, 테러, 살인, 피바람을 격었지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르네상스를 탄생시켰지. 스위스는 형제애의 나라지. 그들은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를 누렸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게 무엇이지? 뻐꾸기시계'.
숙소에 돌아오니 조르조가 우리를 정원으로 부른다. 정원의 바비큐 대에는 벌써 돼지고기와 소시지가 한창 구워지고 있다. 정원이 참 아름답다. 숙소 이름 <만다린 정원 민박(B&B il Giardino dei mandalini)> 그대로 정원에는 레몬과 만다린(귤 종류)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사흘이나 머문 모디카의 마지막 밤, 조르조는 우리를 위해 온 식구들을 다 불러 모았다. 부인과 두 딸과 사위를 인사시켜 준다. 우리는 서로 말은 잘 안 통하지만, 딸들은 짧은 영어로 우리는 짧은 이탈리아어로 웃고 떠든다. 시칠리안들의 푸근한 인정이 절로 전해온다. 조르조는 나와 비슷한 연배이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어 와인 잔을 연이어 부딪는다. 즐거운 밤이고 잊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비큐가 와 이리 짜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