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볼 수 없었던 몽블랑
뉴욕 타임스가 발표한 2022년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52 곳' 중 쿠르마예르(Courmayeur)가 알프스의 수많은 산악마을 중 유일하게 13위로 선정되었다. 쿠르마예르(Courmayeur)? 어디더라? 이탈리아를 꽤 여러 번 와본 나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얼마 전 몽블랑 둘레길(Tour du Montblanc)을 걷기 전까지는.
쿠르마예르는 이탈리아 서북부 알프스 몽블랑 남쪽 기슭에 있는 아름다운 알프스 산골도시(1224m)이다. 근대적 의미의 알피니즘이 시작된 프랑스의 샤모니(Chamonix)와는 불과 16km 거리, 몽블랑 터널을 통하면 자동차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지호지간이고, 발레 다오스타(Vale d'Aosta)의 주도 아오스타(Aosta)에서는 매시간마다 시내버스로 오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왜 쿠르마예르가 내로라하는 쟁쟁한 알프스의 마을들을 제치고 선정되었을까? 짐작건대 순전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접한 알프스의 제1봉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알고 보니 쿠르마예르는 이탈리안 알프스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 리조트 도시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하이커들로, 겨울철에는 스키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관광객들이 붐비는 도시이다. 또한 몽블랑 둘레길(TMB)을 걷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리게 되는 통과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는 크지 않다. 1~2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 쿠르마예르(Courmayeur) 중심가라 해봤자 1km도 채 안 되는 골목길이 전부이다. 하지만 알프스 거점 도시답게 유명 아웃도어 상점들과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고 거리는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거리 한 켠에는 오래된 성당 건물과 산악 가이드협회 건물도 보인다. 그 근처 자그마한 광장에는 유명 산악 가이드들의 흉상도 나란히 서 있다. 마치 산악 도시로서의 쿠르마예르의 자부심을 보여주려는 듯.
내가 찾은 8월 말 어느 날 비 개인 오후, 알프스 산들을 병풍처럼 뒤에 품은 쿠르마예르는 오후의 햇살 아래 반짝반짝 보석 같이 빛나고 있었다. 큰 길가에는 몽블랑 둘레길 울트라 마라톤(UTMB) 아치가 세워져 있고, 거리 도처에는 깃발이 나부끼며 축제 분위기 일색이다. 쿠르마예르는 유명 산악 리조트 도시답게 물가와 호텔비도 당연 비싸다. 가장 싼 호텔도 대부분 100유로가 넘는다. 내가 예약한 C호텔은 그나마 제일 싼데도 별 4개짜리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묵은 숙소 중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편이다. 직원도 친절하고 중심가에서 멀지도 않다.
샤워를 끝내자마자 시내 구경부터 나선다. 대충 시내 중심가를 한 바퀴 둘러보고 점심을 제대로 못 먹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식당부터 찾아 나선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간이 바(Bar)는 있지만 문을 연 식당은 보이질 않는다. 호텔 직원이 소개해 준 유명하다는 현지인 식당(Viex Pommer)에도 찾아가 보는데 모두 7시 이후부터 문을 연다고 쓰여있다. 그나마 다행히도 중심가 골목길에 자그마한 크레페(Crepes) 식당이 6시에 문을 연다고 적혀있다.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들어가 맥주 한 잔과 식사류를 시켰더니 무려 43유로. 관광지에서 밥 먹지 마라는 말을 또 잊었나 보다.
쿠르마예르에서 몽블랑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면 몽블랑 터널 입구 근처에 있는 스카이웨이 케이블 카(Skyway Cable Car)를 타고 푼타 헬브로너(Punta Helbronner,3466m)까지 올라가 360도 전망대에 서는 것이다. 그곳에 서면 몽블랑, 마테호른, 몬테 로사 등 알프스의 고산 준봉들을 아주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다. 단 날씨가 좋아야 하고 꽤 비싼 케이블카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1인당 60~70유로 정도).
하지만 나처럼 호주머니가 가볍고 시간이 많은 사람에게는 하이킹을 하면서 몽블랑을 바라보는 것이 최고이다. 고맙게도 쿠르마예르는 알프스 최고의 둘레길인 TMB가 통과하는 동네라 주변에 다양한 하이킹 코스가 있다. 시간과 체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하루 정도 시간 여유가 있고 걷기를 좋아한다면 몽블랑 둘레길(TMB)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가장 좋은 코스는 시계 반대 방향의 TMB 길을 따라 알프스의 준봉을 바라보며 보나티(Bonatti) 산장까지 걸어보는 것. 보나티 산장에 빈방이 있으면 하룻밤을 그곳에서 자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고, 빈방이 없다면 페레 계곡(Val de Ferret)으로 하산하여 버스로 쿠르마예르로 돌아오면 된다. 시간은 5~6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대체로 이 코스는 어렵지 않아 한국에서 주말등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트레킹 코스 안내는 시내의 관광안내소에 가거나 호텔 직원에게 물으면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나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나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몽블랑 둘레길(TMB)을 걷기 위해 사흘 전 프랑스의 샤모니(Chamonix)를 호기 있게(?) 홀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예상외로 나의 트레킹은 순조롭지 못했다. 첫날은 종일 내리는 비로, 다음날은 8월에 내리는 폭설로 2000m가 넘는 알프스 고지를 오르내리는 동안 굉장히 힘들었다. 화이트아웃으로 앞을 볼 수 없었고 눈길에서 길을 잃고 해메이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오늘 오후 쿠르마예르에 도착하자 날씨마저 개이니 쿠르마예르는 지금 나에게 천국처럼 느껴진다.
쿠르마예르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보나티 산장을 향하여 다시 길을 나선다. 호텔 직원이 알려준 대로 지도를 들고 첨탑이 있는 성당과 산악 가이드 협회 건물 사이의 진입로를 따라 걷는다. 보나티 산장까지 14km, 보통 사람이라면 4~5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나 같은 노인네야 당연 더 걸리겠지만. TMB 진입로 표시가 나올 때까지는 꽤 경사진 동네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TMB 입구를 제대로 찾아들어서도 방심하면 길을 놓칠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TMB 진입로에서 베르토네 산장(Rifugio Bertone,1987m)까지는 상당히 가파른 깔닥고개를 1시간 정도 올라야 한다. 하지만 베레토네 산장을 지나면 그때부터는 산 허리를 따라 편안한 길로 이어진다.
점심시간대의 베르토네 산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등산객들로 꽉 찼다. 잠시 쉬면서 산장 발코니에서 북면 산을 바라보지만 구름이 오락가락하여 몽블랑이 어디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옆자리의 젊은 트레커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단다. 나는 며칠을 TMB를 걸어왔지만 날씨 탓인지 아직 한 번도 몽블랑을 보지 못했다. 도대체 몽블랑 너는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베르토네 산장을 막 지나면 2개의 길 표시가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팽(Sapin) 고개. 보다 장엄한 알프스의 풍광을 즐길 수 있지만 길이 험하여 다소 힘든 코스이다. 왼쪽 삭스(Sax) 능선 길은 경치도 좋고 쉽고 무난한 코스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삭스 능선길로 향한다. 길은 산 허리를 따라 완만한 경사를 오르내리는데, 페레(Ferret) 계곡을 사이에 두고 북면으로 4000m가 넘는 알프스의 유명한 침봉들이 줄이어 나타난다. 나 같은 초보 트레커도 그 이름은 들어본 적 있는 그랑 조라스( Grand Jorasses, 4202m), 거인의 이빨(Dent du Geant, 4013m) 등 등. 이 길이야 말로 TMB의 하이라이트이자 알프스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몽블랑을 보지 못하면 어떠리! 이 아름답고 장엄한 풍광 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행복하다. 이렇게 2~3시간을 걸으면 보나티 산장(Rifugio Bonatti,2025m)이 나타난다. 자고 갈 것인가? 페레 계곡으로 하산하여 돌아갈 것인가? 그것은 보나티 산장에 빈방이 있는지 여부에 달렸다.
보나티 산장은 TMB 산장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산장이다. 특히 쿠르마예르에서 접근성이 좋고 전망이 뛰어나기 때문에 산장 예약하기가 어렵기로 소문나 있다. 나도 여러 번 온라인으로 예약신청을 해 봤지만 번번이 빈방 없음이라는 회신만 받았다. 그래서 빈방이 있으면 자고, 없으면 돌아가기로 하고 왔다. 그런데 헐!, 예상외로 빈방이 많이 남아 있다. 현금 60유로를 내고 안내받은 숙소는 우리나라 군대 내무반 같다.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20~30명이 함께 잘 수 있는 기다란 침상이 놓여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는 걸 보니 200명 이상은 잘 수 있는 대형 산장임이 분명하다. 당연히 친절과 서비스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나마 하룻밤 자리가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이니. 여름철 TMB에서 산장 예약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식당문으로 들어 서려는데 바깥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린다. 무슨 일인가 하고 밖으로 나와보니 일출이 알프스 산봉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왜 사람들이 보나티! 보나티! 하는지 알 것 같다. 이런 풍경은 알프스 산속이 아니고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자연묘사의 대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의 교향시 <알프스교향곡> '해돋이' 장면에서 그리던 바로 그대로이다.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점차 윤곽을 드러내고, 밤의 정적을 깨고 해가 뜨면서 알프스의 산들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순간, 슈트라우스는 금관악기를 총동원하여 이 장면을 장엄하고 감동적으로 묘사했었지.
아침을 먹고 나자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스위스로 가기 위해 산장 윗길로 무리 지어 움직인다. 하지만 나는 느긋하게 채비를 하고 폐레 계곡으로 하산하기 시작한다. 나의 TMB 트레킹은 여기까지이다. 나는 처음부터 TMB를 완주할 생각이 없었고 여기까지 반만 걸을 예정이었으니까. 비교적 완만한 길을 쉬엄쉬엄 1시간쯤 내려오니 드디어 버스 정거장이 나타난다. 대형 Arriva 버스는 나만 실은 체 텅 빈 채로 페레계곡 유원지를 벗어나 쿠르마예르 터미널로 향하고 있다. 고맙게도 여름 철 성수기에는 버스는 무료로 운행한다. 이렇게 하여 나의 고생스러웠던 TMB 트레킹은 마지막 코스에서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몽블랑을 못 봤으면 어떻고 완주하지 않았으면 어때! 몽블랑 둘레길 70여 km를 무사히 걸었으니 더없이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