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행운, 베로나 원형극장에서 오페라 구경하기
한국에서 돌로미티(Dolomiti)로 가려면 보통 두 가지 입산 루트가 있다. 베네치아(Venezia)로 입국하여 돌로미티의 동쪽 관문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로 향하가나, 아니면 밀라노로 입국하여 기차 편으로 베로나(Verona)를 경유하여 돌로미티의 서쪽 관문 볼차노(Bolzano)로 들어가는 것. 하지만 베네치아로 운항하던 아시아나 항공편이 없어져 최근에는 직항 편으로는 밀라노로 입국하는 방법뿐이다. 밀라노에서는 돌로미티까지 접근성이 좋지 않아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베로나에서 1박 하기로 계획하였다. 또 하나 우리가 베로나에 하루를 머물려 하는 이유는 혹시나 그 유명한 아레나 디 베로나(Arena di Verona)에서 오페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며칠 전 미리 예약해 둔 베로나 민박 숙소에서 갑자기 일방적인 예약 취소 통보가 왔다. 멘붕이다. 다른 숙소를 폭풍 검색해 보지만 빈방이 거의 없다. 혹시 있어도 엄청 비싼 방뿐이다. 그도 그런 것이 오늘이 금요일인 데다 오페라 시즌이 끝나는 바로 하루 전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베로나 근교의 한 시골 호텔을 겨우 예약하고 밀라노역에서 12시 35분 이탈로(Italo) 기차를 탄다. 베로나 역에 내려 간단히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고 20분을 달려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니 호텔 문이 굳게 닫혀있다. 황당하다. 전화를 걸어도 연결이 되지도 않는다. 무려 1시간이나 기다려 4시쯤 지나자 직원이 나타난다. 이탈리아에 시아스타가 있는 건 알지만 호텔까지 있는 줄은 전혀 예상 밖이다. 아마 베로나 시내가 아니고 한적한 변두리 동네라서 그런가 보다. 호텔은 널따란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는데 호텔 손님은 거의 없는 걸 보니 호텔은 그냥 부업으로 하는 것 같다.
호텔 방에 짐만 던져 놓고 베로나 시내를 향한다. 호텔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니 성장(盛裝) 차림의 한 무리의 독일인들이 우르르 타고 있다. 줄잡아 10여 명은 되어 보이는데 틀림없이 오페라를 보러 가는 사람들 같다. 우리는 그들이 내리는 지점에서 따라 내린다. 아니나 다를까 큰 길가에는 성장을 한 사람들의 무리가 한 곳을 향하여 가고 있다. 우리도 그들 틈에 섞여 10여분 쯤 천천히 걷다 보니 드디어 너무나 낯익은 아레나 디 베로나(Arena di Verona) 원형극장이 눈앞에 나타난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원형극장 앞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오고, 길 옆의 카페에도 사람들이 장시진을 치고 있다. 무슨 축제장 같은 분위기이다. 베로나 원형극장은 로마의 콜로세움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훨씬 작지만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곳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우선 극장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매표소를 찾아간다.
사실 베로나에 오기 전부터 예매표를 검색해 보았지만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겨우 남은 것은 최고로 비싼 좌석 몇 개와 맨 끝의 시야가 전혀 없는 좌석 겨우 몇 개 정도뿐. 우린 여행의 일정도 어떻게 될지 다소 유동적이었고 또 예매한 표는 취소 또는 환불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여름에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야외공연이라 자동적으로 공연이 취소되는데 이때도 전혀 환불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현장에서 표가 있으면 구입하고, 없으면 그냥 주위만 둘러볼 예정이다. 광장 뒷구석에 있는 매표소에 들어가서 남은 표가 있는지 물어보니 제일 나쁜 사각지대의 자리 몇 개만 겨우 남아 있다. 가운데 좋은 자리는 200유로가 넘는데 표값은 겨우 19유로. 우리는 망설임 없이 입장표를 구입한다. 오페라는 제대로 못 보아도 베로나 원형극장 분위기만 즐겨도 본전은 뽑는다 하며.
우리는 입장표를 구입한 후 8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중국식당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원형극장 주변을 둘러보는데 한국 여행객도 심심찮게 만난다. 드디어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1만 여석이나 된다는 좌석은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으로 꽉 차 있다. 세상에! 이처럼 오페라 애호가들이 많은 건가? 아니면 우리처럼 호기심으로 온 사람들인가? 우리 좌석은 무대에서 일직선의 사각지대 맨 꼭대기 자리이다. 보통 실내 오페라 극장이라면 무대를 반 정도밖에 볼 수 없는 최악의 자리이다. 그런데 웬걸, 아주 넓은 야외무대라서 그런지 훨씬 무대에서 가깝기도 하고 시야도 별로 막힘도 없다.
베로나 원형극장은 오페라 중에서도 스펙터클한 오페라를 많이 공연한다. 오늘 공연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도 영상물로는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직접 오페라를 보기는 처음이다. 최근 오페라의 경향처럼 복장과 무대 장식이 극도로 간소화되고 현대적이어서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사실 오페라는 듣는 재미가 우선이겠지만 고증을 잘 살린 시대 복장에 화려한 무대, 가수들의 연기와 발레 장면 등 나 같은 시골 노인에게는 보는 재미도 솔솔 한데.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노래에만 집중하려는 듯 무대와 의상이 너무 미니멀리즘(Minimalism)화되어 버렸다. 마치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바로크 미술을 보다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를 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아레나 디 베로나는 나의 시시한 불만들을 다 지워버리고도 남는다. 탁 트인 널따란 야외무대 위에 엄청난 규모의 출연진과 오케스트라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청중을 압도한다. 오페라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귀에 익은 우람찬 합창 '개선행진곡'에서부터 아이다의 '이기도 돌아오라', 라마메스의' 청아한 아이다' 등의 유명한 아리아들을 들으며 딱딱한 돌의자에 엉덩이가 불편함도 잊은 채 모두가 몰입한다.
사실 나는 그다지 오페라 애호가가 아니라서 오페라든, 보통 음악이든 집에서 편하게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쩌다가 공짜표가 생길 때가 아니라면 공연장에 가서 실황을 듣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막상 공연장에 가서도 몇 시간씩 꼼짝 못 하고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이고 때로는 졸기도 한다. 특히 오페라 공연에서는 더구나. 요즈음 나의 유일한 음악 듣기 소스는 라디오이다. 나도 한 때 제법 비싼 오디오도 거실에 거창하게(?) 모셔놓고 CD와 DVD를 장식장에 가득 채우고 뿌듯해(?)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처치 곤란한 약간의 CD들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 대신 라디오를 주로 듣는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틀기만 하면 광고도 없는 아름다운 음악이 예쁜 목소리의 아나운서의 해설까지 곁들여 흘러나온다. 더구나 핸드폰만 있으면 해외에 나와 있어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으니.
하지만 오늘 베로나 원형극장에서 보는 오페라의 감동은 특별하다. 더구나 베로나 원형극장이 좋은 것은 아무도 옷차림이나 관람 태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이다. 성장 차림의 여인들이나 반바지 차림의 관객들이나 모두 최대한 편안한 자세다. 굳이 가사도 모르는 가수의 노래를 집중해서 들을 필요도 없다. 단지 분위기 만으로도 감동적이다. 게다가 2천 년 된 원형극장의 자연적 음향효과가 상하 좌우 어느 자리에도 높이 울려 퍼지지 않는가! 사람들이 왜 한 여름철 베로나를 찾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베로나는 최근 여름철 오페라 공연 외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집(?) 등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늘 붐비는 핫 플레스 중의 하나란다. 하지만 우리는 오페라를 본 것만으로도 베로나에 온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으므로 미련 없이 베로나를 떠나도 된다. 우리는 2막이 끝난 10시 30분경 자리에서 일어난다. 4막까지 다 보려면 밤 12시도 넘는다. 숙소로 돌아갈 차편도 없을 것 같고, 아이다는 1~2막에 좋은 장면 거의 모두가 다 있어 굳이 4막까지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이다. 또 우리는 내일 일찍 돌로미티행 기차를 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