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더 운치 있는 알페 디 시우시 걷기

돌로미티에서 가장 걷기 좋은 고산 평원

by 남쪽나라

어제는 하루 종일 숙소에서 쉬었다. 쉬는 것도 여행의 일부이니까. 빈둥빈둥 늦잠을 자기도 하고 오후에는 아내와 함께 동네마트에서 장을 봐 숙소에서 고기도 굽고 와인도 마시며 그저 쉬기만 했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산타 크리스티나(Santa Cristina)의 아파트형 숙소이다. 대부분 여행객들은 돌로미티 서쪽 들머리인 오르티세이(Ortisei)에 숙소를 잡는다. 하지만 오르티세이는 숙박비도 비싸고 번잡하다. 우리 같이 호주머니가 얇고 한 끼 정도는 꼭(?) 밥을 먹어야 하는 노인네에게 적합한 숙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산타 크리스티나는 오르티세이에서 불과 4km 떨어진 비교적 한적한 동네이고 수시로 버스가 다녀 교통도 불편하지 않다. 우리가 4일간 머문 숙소는 차가 없으면 불편한 위치에 있는 대신 숙박료는 저렴하다. 숙소는 넓고 쾌적하고 부엌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게다가 창밖으로는 사소 룽고(Sasso Lungo)가 바로 코앞이라 전망도 좋아 하루쯤 숙소에서 쉬어도 답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까지 그 좋던 날씨가 오늘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로 나서려니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20230914_184003.jpg?type=w1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사소 룽고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한 숙소는 처음에는 걸어서 오르내리기가 우리 같은 노인네에게는 꽤 불편했지만 하루 이틀 지나니 차츰 익숙해져 그런대로 오르내릴 만하다. 큰 길가 버스정거장에서 352번 버스를 타고 오르티세이로 향한다. 고맙게도 이 지역의 숙소에서는 투숙객들에게 Val Gardena Guest Pass를 무료로 제공한다. 이 무료 탑승권은 1주일 동안 남티롤 지역의 모든 대중교통(완행열차 포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 같은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너무 고마운 혜택이다. 나중에 귀국할 때까지 우리 부부가 무료 혜택을 받은 금액을 나중에 대충 계산해 보니 무려 200유로 정도나 된다. 하지만 이 카드는 오르티세이 등 서부 돌로미티 숙소에서만 제공되고 도비아코나 코르티나 담페초 등 동부 쪽 숙소에서는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부 돌로미티에서도 통용은 다 된다.


20230913_110420.jpg?type=w773 안갯속의 알페 디 시우시 평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르티세이 시내를 지나 케이블카를 타고 Seuc 승강장에 내리니 사방은 운무로 가득하다. 기대를 잔득하고 왔는데 아쉽게도 그 좋다는 알페 디 시우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산들은 다들 짙은 운무 속으로 숨어버리고 안개 자욱한 초원만 눈앞에 펼쳐 저 있다. 우리는 안갯속을 스틱에 의지하여 6A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데 그래도 알프스를 걷는 기분은 난다. 운무 속에서도 발아래 가끔씩 초록빛 넓은 평원이 보이기도 해 트레킹을 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날씨다.


비는 여행에서 언제나 상수이다. 여행지에선 언제 어디서나 비가 올 수 있기 때문에 날씨를 탓해봤자 나만 손해다.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다. 준비 안된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라는 스코틀랜드 속담처럼.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여행이다.


비가 오면 걷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 좋다. 비가 오면 초록은 더욱 채도를 높여 짙푸름을 자랑하고 멀리 보이는 것이 없으니 평소에는 간과했던 작은 풀잎과 야생화들이 더욱 눈을 즐겁게 한다. 주의를 집중해서 걸으면 모자와 고어텍스 재킷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더하여 자신의 발자국 소리까지 생생히 들리기도 한다. 주위가 안개로 자욱하면 도시인들에겐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때로는 내면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길 위에서는 해가 뜨면 해피! 비가 오면 해피&해피!' 라고한 어느 블로거의 글이 생각난다.


20230913_111838.jpg?type=w1 길섶의 철 늦은 야생화

알페 디 시우시는 세체다와 더불어 서부 돌로미티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명소 중 하나이다. 돌로미티에서는 매우 드물게 해발 2,000m가 넘는 넓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광대한 초원지대이다. 주위로는 사소 룽고와 사소 피아토 등 웅장한 바위 산들이 둘러싸 있어 날씨가 좋은 날이라면 환상적인 풍광 속을 걷는 최고의 트레킹 루트이다. 거의 평지와 나지막한 구릉으로만 되어 있어 트레킹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체력에 맞춰 몇 시간씩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다양한 트레일이 있다.


csm_seiser-alm-sommer_8dddf6e4d0.jpg 맑은 날의 알페 디 시우시 평원(사진 출처: Val Gardena 홈페이지)

산허리를 가로지르던 길은 이제 평지로 이어지는데 제법 넓은 차도를 따라 편안하게 길은 계속 이어진다. 2,000m가 넘는 고원 지대에 위치한 알페 디 시우시는 넓은 평원이라 버스도 다니고 일반 평지와 다름없다. 우리는 일단 다시 6번 길을 따라 비교적 쉬운 코스라는 살트리아(Saltria) 호텔까지 걷기로 한다. 중간에 많은 비가 내려 버스 정거장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도 하고, 길가의 멋진 알프스식 호텔에 잠시 들려 화장실을 실례하기도 한다. 호텔 식당에는 자전거 동호인들이 가득해 앉을자리조차 없다. 알페 디 시우시는 트레커뿐만 아니라 자전거 라이더에게도 천국과 다름없는 장소이다. 자전거로 이런 광활한 알프스 풍광 속을 가로지르는 것은 모든 자전거 라이더의 꿈이 아닐까? 미리 이곳의 호텔을 예약한 자동차 여행객이라면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도 자동차로 진입할 수 있다고 한다. 숙박비가 상당히 비싸긴 하지만 이런 환상적인 풍광 속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0230913_130506.jpg?type=w773 운치 있는 비 오는 날의 알페 디 시우시

자전거는 아니지만 늦여름의 비를 맞으며 알프스를 걷는 것도 매우 운치 있고 색다른 경험이다.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상쾌하다는 기분이 든다. 이곳이 알프스라서 그런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길은 산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오솔길을 지나기도 한다. 제법 경사진 길을 내려가다가 둘이서 같이 미끄러지기도 한다. 다행히 아내는 위태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빗길을 잘도 걸어 내려가 준다. 드디어 살트리아(Saltria) 호텔까지 무사히 하산한다.


우리는 잠시 호텔 주변에서 쉬다가 11번 버스를 타고 콤파츠(Compatch)로 향한다. 콤파츠(Compatch)는 꽤 큰 마을이라 주변에 숙소와 상가도 많고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다. 여전히 주변은 운무로 가득하고 비도 계속 내리고 있다. 우리는 빗속이지만 알페 디 시우시를 3시간 30분 동안 무사히 걸은 것으로 만족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니 곳곳에 한국말소리가 들린다. 단체 여행객들이 여기저기 많아 보여 돌로미티가 요즘 한국인에게도 인기 여행지임을 실감한다. 172번 버스로 오르티세이까지 온 후 다시 352번 버스로 산타 크리스티나에 도착한다. 이제 높기만 하던 숙소도 내 집처럼 편안한 기분으로 걸어 올라간다. 며칠간의 돌로미티 걷기로 아내도 이제 제법 트레커가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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