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TV 시리즈 '천국 바로 아래'의 배경 마을
우리는 어제 돌로미티 서부에서 4박 5일간의 여유로운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도비아코로 다시 돌아왔다. 도비아코 유스 호스텔의 낯익은 직원들은 우리를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고 친절하게도 방도 지난번 머물던 전망 좋은 같은 방(402호)으로 다시 배정해 준다. 산타 크리스티나에서 4일간 머물면서 직원과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폰으로만 대화하던 B 아파트와는 완전 딴판이다. 맡겨두었던 캐리어를 찾아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여니 며칠간 우충중하기만하던 날씨가 어느새 활짝 개고 멀리 백운암 산군들이 더없이 가깝게 다가온다. 며칠 만에 벌써 푸르기만 하던 초원은 조금씩 누런색으로 변하고 있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우리는 오르티세이의 번잡함보다는 도비아코의 고즈넉함이 훨씬 더 편하고 좋다.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가니 식당 종업원들도 며칠 만에 보는 동양 노친네를 무척이나 반가운 듯 인사를 한다.
돌로미티의 필수(?) 관광지를 대충 다 둘러본 우리는 오늘부터 도비아코를 베이스캠프로 해서 주변의 가볼 만한 여행지를 한가롭게 다녀볼 계획이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바쁘게 와서 몇몇 주요 관광지만을 휙 둘러보고 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시간 부자인 우리는 며칠 더 도비아코에 머물며 모처럼의 느긋한 여행을 즐겨볼 생각이다. 도비아코 인근에는 다른 여행객들이 잘 모르는 아름다운 산속 마을들과 돌로미티의 숨겨진 명소들이 여럿 있다. 우리가 굳이 도비아코에 일주일이나 머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반갑게도 창문을 여니 날씨가 화창하다. 우리가 오늘 먼저 찾아 나선 곳은 돌로미티의 숨은 보석 같은 마을 산 칸디도(San Candido, 독일지명 Innichen). 도비아코에서 기차로 불과 5분 거리에 있다. 산 칸디도는 우리나라 어느 케이블 TV에서도 장기간 방영된 적이 있는 이탈리아 국영방송(RAI)의 인기 TV 시리즈 <Sky Rangers, 원제:Un Passo dal Cielo(천국 바로 아래)>의 주무대가 된 마을이다. 돌로미티의 산 칸디도와 브라이에스 호수, 그리고 친퀘 토리(Cinque Torri) 등, 숨 막히는 돌로미티 절경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로맨틱 스릴러인데 이탈리아에서 무려 10년 이상 시리즈로 방영된 인기 TV 드라마이다. 드라마의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계속 펼쳐지는 돌로미티의 황홀한 풍경에 매료되어 나도 매주 빠지지 않고 보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의 원제목 <Un Passo dal Cielo(천국 바로 아래)>은 돌로미티야 말로 바로 천국과 다름없다는 의미인가 보다.
화창한 날씨 아래 산 칸디도 역에 내리니 소문대로 산 칸디도는 자전거 천국이다. 역 바로 옆의 자전거대여소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자전거들이 도열해 있다. 자전거를 빌리려는 행열도 아침부터 줄을 잇고 있다. 바로 인접한 오스트리아 리엔츠(Lienz)까지 45km의 길은 환상적 자전거 도로로 유명하다고 한다. 나도 이 길을 자전거로 한 번 달려보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난다. 하지만 나는 이팔청춘이 아니지 않은가? 아내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르고 나도 자전거 타본 지가 까마득해 애써 참고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첸트로(시내 중심가)로 향한다.
산 칸디도는 도비아코에 비해 훨씬 더 고즈넉하면서도 좀 더 오스트리아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다. 8세기에 세워졌다는 교회건물도, 가옥들도 이탈리아 건축양식이 아니다. 오히려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 모습이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오스트리아 땅이었고 지금 주민들도 대부분 오스트리아 후손들이니까. 나는 편안하고 아늑한 이 마을이 마음에 든다. 도비아코와는 달리 중심가에는 차량이 다니지 못하고 도보로만 걸을 수 있다. 게다가 찾아오는 관광객도 거의 없어 현지인들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어 좋다.
중심가는 마침 토요일 오전이라 마을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들 노천카페에 앉아 이웃들과 담소를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인구 불과 3,000명 정도 산골 마을이니 다들 이웃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마을의 보기 드문 동양인 여행객이라서 그런지 짧은 거리를 1~2번 왔다 갔다 하니 모두들 아는 척(?)한다. 우리는 작은 광장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한 야외 식당에서 점심도 먹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주변에는 아름다운 산책로도 있고 놀거리도 많다지만 마을 구경한 것만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다시 역으로 나와 세스토(Sesto, 독일지명 Sexten)로 가기 위해 리엔츠(Lienz)행 기차를 탄다. 돌로미티의 동쪽 세스토 지역(Sesto Dolomiti)에 있는 피스칼리나 계곡을 찾아가기 위하여.
돌로미티에서는 숙소에서 무료로 주는 Guest Pass를 소유하면 1주일간 모든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리엔츠행 완행열차는 그림 같은 남티롤 알프스 산골을 지나가는데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도 세스토(Sesto) 역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지역은 독일어 사용권이라 모든 길 표지나 안내판이 독일어로 되어 있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상해서 옆자리의 사람에게 물어보니 세스토는 기차로 갈 수 없고 산 칸디도로 돌아가서 446번 버스를 타야 한단다. 아뿔싸!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어느 역에서 내려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고 도비아코를 지나 다음 정거장인 빌라바싸(Villabassa) 역에 내린다. 이 주변의 마을들은 다들 아기자기하고 비슷한 풍광의 아름다운 마을들이다. 내리고 싶은 어디에 내리든 후회할 일이 없다. 뭐 특별히 바쁜 일정도 없고 시간도 넉넉하니 아름다운 남티롤 알프스에서 기차를 잘 못 타도 억울할 일도 아니다. 게다가 차비도 공짜가 아닌가? 우리가 언제 이렇게 한가로운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때로는 길을 잃을 때 뜻밖에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이왕에 빌라바싸(Villabassa)에 왔으니 마을 구경이나 하고 가자며 기차역에서 200여 m 떨어진 중심가로 걷는다. 마을 한가운데에 이르니 마침 브라이에스(Braies) 호수로 가는 442번 버스가 정차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도비아코 도착 첫날 가려다가 온라인 예약을 못했다고 태워주지 않던 바로 그 442번 버스이다. 빈자리가 보이기에 우리는 이번에는 공짜표 카드를 보여주고 서둘러 버스를 탄다. 버스는 산속을 달려 20여분 만에 브라이에스 호수에 도착한다. 호숫가 주차장은 차들로 꽉 차 있고 호수 주변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브라이에스(Braies) 호수는 돌로미티에서도 이름난 관광명소라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호수가 넓고 아름답다. 우리는 천천히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곳곳에서 한국말이 들려오기도 한다. 호수는 거대한 백운암 산을 배경으로 에머럴드색을 띠며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호수에는 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여유 있게 호수 둘레를 거닐다가 저녁 무렵 호스텔로 돌아온다. 이제 점점 돌로미티가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