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의 마지막 밤은 즐거운 파티로
오늘은 돌로미티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을 먹고 서둘러 도비아코 버스 터미널로 걸어가 443번 버스를 타고 피아짜 평원(Piazza Prato)으로 향한다. 1970m 고지의 피아짜 평원은 돌로미티 서부의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 다음으로 넓고 높은 고원지대이다. 당연히 다양한 트레킹 코스가 있어 동부 돌로미티를 찾는 트레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트레킹 명소이다. 게다가 이곳은 대중교통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비싼 돈 주고 타야 하는 케이블카 같은 것도 없다.
우리가 탄 버스는 폰티첼로(Ponticello)를 거쳐 피이짜 평원(Piazza Prato) 종점에 1시간 만에 도착한다. 여름 성수기에는 이곳을 찾는 트레커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은 9월 중순이라 철이 지났는지 사람도 별로 없다. 가끔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사실 피아짜 평원에 오는 대부분의 하이커들은 스페치에 산(Monte Specie, 2307m)에 오르기 위해 온다. 피아짜 평원에서 1시간 정도면 올라갈 수 있는 높지 않은 곳에 360도 파노라마처럼 돌로미티의 유명산들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대가 있다. 그곳에 서면 멀리 트레치메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나는 스페치에 산 조망대에 올라가 보고 싶지만 날씨도 흐린 데다 아내가 그곳까지 올라가기는 사실상 어려워 포기하고 우리는 피아짜 평원을 내려다보며 발란드로 산장(Rifugio Valandro)까지 걷기로 한다. 날씨는 흐리지만 걷기에는 딱 좋은 날씨이다. 피아짜 평원에서는 발란드로 산장까지 1시간 정도 걸으면서 내려다보는 넓고 푸른 초원의 풍광이 압권이다. 시원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길도 평탄한 마사토 길로 이어져 굳이 스틱도 필요 없다. 지나가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모습도 상쾌해 보인다.
발란드로 산장 부근에도 여러 곳의 트레일이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전진을 멈추고 산장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산장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먹구름이 가득한 돌로미티의 모습도 오늘따라 더욱 멋져 보인다. 우리는 발란드로 산장 주변에서 충분히 쉰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조금씩 비가 내리곤 하지만 걷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피아짜 평원에 있는 단 하나의 호텔(Hohe Gaisl Hotel)에 일부러 들려 점심을 먹는다. H 호텔은 내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호텔이다. 4년 전 돌로미티 동서를 잇는 롤러코스터(RCT) 트레일을 혼자 걷는 도중 세네스 산장(Rifugio Sennes)을 출발하여 길고 힘든 코스를 10시간 이상 걸어 매우 지친 상태로 늦은 시각에 피아짜 평원에 내려왔다. 더 이상 걷기가 힘들어 피아짜 평원의 첫 번째 산장인 피아짜 프라토 산장(Rifugio Piazza Prato)으로 들어갔지만 빈 침상이 없었다. 다음 산장인 발란드로 산장까지는 1시간을 더 가야 하는데 거기에도 빈 침상이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몸은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고 밤은 점점 어두어가고, 이 깊은 산속에서 어떡하지? 고민스럽게 걷는 데 바로 그때 길가에 H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 성수기였고 꽤나 비쌀 것 같은 호텔이라 당연히 빈방이 없을 거라 각오하고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웬걸 빈방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산장보다 크게 비싸지 않은 가격에 아침저녁 식사까지 포함이라니! 내 생애에 그때처럼 최고의 호텔은 없었다. 며칠 만에 샤워까지 하고 나만 홀로 등산복 차림으로 유럽의 선남선녀들과 함께 근사한 호텔 식사를 하던 그때 기분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아내와 나는 H 호텔 레스토랑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443번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뜻하지 않은 흥겨운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어제저녁과는 달리 오늘 저녁은 완전히 흥겨운 축제 분위기의 식사 시간이다.
남티롤 전통 복장을 한 악사와 종업원들이 하나씩 전통 악기를 들고 나와 악기를 연주하고 흥을 북돋운다. 사람들도 모두 나와 같이 어울려 춤을 추고 노래한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에게도 다가와 악기를 주며 같이 흔들어 달라며 손을 내민다. 자그마한 식당에는 아코디언과 더불어 요들송이 울려 퍼지고 생전 처음 보는 온갖 남티롤 민속악기들이 총출동하여 특이한 소리들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의 돌로미티에서의 마지막 밤을 축하해 주는 것인가? 우리는 몇 잔의 와인에 벌써 취해 얼굴이 붉어지고 흥겨운 노랫소리에 맞추어 손뼉 치기에 바쁘다. 이렇게 돌로미티의 마지막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