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두더지의 소원

by 임용철

책방지기인 수연 씨는 김상근 작가의 <두더지의 소원>이란 동화책을 소개했다.

동화책 속에 두더지는 눈길 위에 놓인 눈덩이에게 본인도 이곳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낯설다며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곰과 여우 버스 기사 아저씨는 눈덩이 혹은 눈이라서 버스에 태울 수 없다며 지나가고 사슴 아저씨는 두더지와 곰 형상으로 만든 눈덩이를 버스에 태워줬다.

"사슴 아저씨의 버스 안에는 여러 동물이 타고 있어요. 여길 보세요. 선반에는 기다란 뱀이 수면 모자를 쓰고 잠들어 있네요."

"아, 선반에 진짜 뱀이 잠들어 있어."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나니 버스 손잡이와 같은 색깔의 잠들어 있는 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네, 아이들은 금방 알아채더라고요. 곰 옆에 앉은 두 마리의 생쥐는 곰의 눈치를 살피며 꿀단지에서 꿀을 떠먹으려 하고 그 옆에 토끼는 당근을 안고 맛있는 요리를 할 꿈을 꾸고 있네요. '드르렁' 소리를 낼 것 같은 멧돼지는 코를 골며 누워 자고 있어요. 멧돼지 위에 장난기 많은 어린 토끼가 보이고, 귀여운 토끼를 바라보는 사슴도 있어요. 두더지 오른쪽엔 고양이가 뜨개질 중이죠. 누구의 스웨터를 만들고 있는 걸까요?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이 얼마나 신나게 얘기하는지 몰라요."

따뜻하고 아늑한 버스 안에서 잠든 두더지가 깨어나 보니, 눈곰 친구는 버스에서 내렸는지 사라져 버렸다. 두더지는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 품에 안겨 눈덩이 친구 얘길 한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가 두더지에게 밖에 멋진 손님이 찾아온 것 같다고 말해준다.


<두더지의 소원>을 읽어주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큰 목소리로 "네, 네, 선생님." 이렇게 아이처럼 한 목소리로 따라 외치고 싶어졌다. 그는 두더지와 친구가 된 눈덩이 이야기를 들으며 '피그말리온'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처음에 하나였던 발자국이 나중에 두 개로 나란히 눈밭에 찍혀 있었다.


"누가 눈곰 친구를 만들어 줬을까요?" 그녀가 회원들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할머니 말처럼 별똥별이 소원을 들어준 거네." 소미 여사님이 제일 먼저 말했다.

"저도 그런 거 같아요." 이든도 여사님과 같은 생각이었다.

지혜 누나는 그녀에게 동화책을 건네받아 휴대전화로 표지사진을 찍었다. 아영이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다시 펼쳐보았다.

"여기 보면 아침에 두더지가 굴에서 빠져나왔을 때 오른쪽에 이미 발자국이 나 있잖아요." 그녀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발자국의 흔적을 가리켰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구나. 나도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보고 싶다."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이든은 독서 모임에서 수연 씨가 소개해 주는 동화를 들을 때마다 소설과는 다른 내면의 울림을 느끼곤 했다. 순수함이 깃들어 있는 동화는 어른들의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고 가볍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행간과 여백 때문일까. 아이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동화책 속에 있었다. 두더지의 소원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니 살짝 나른함이 몰려들었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란 제목의 책이 지혜 누나 앞에 놓여 있었다.

"이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하인리히 뵐이 1975년에 발표한 소설로 언론 쪽을 전공할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 할 필독서라고 합니다. 같은 해에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드라마 영화로도 제작됐어요. 이야기의 시작은 가정 관리사로 일하는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이 일간지 ⟪차이퉁⟫의 기자, 우리나라에선 기레기라고 불리죠, 퇴트게스를 그녀의 아파트에서 총으로 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요. 그녀는 카니발 시즌 댄스파티가 있던 지난 수요일 저녁에 수배자였던 루트비히 괴텐과 만나 사랑에 빠져 함께 밤을 보냈는데, 그를 미행하던 경찰은 강도 용의자 괴텐의 혐의와 상관없음에도 그녀를 연행합니다. 경찰 조사를 받는 내내 카타리나의 진술과 주변인들의 증언을 ⟪차이퉁⟫에서 철저히 왜곡해서 보도합니다. 기레기 퇴트게스는 심지어 투병 중인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가 딸에 대해 인터뷰하고 악의적으로 기사를 편집해 보도합니다. 그 기사를 읽은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사망하게 됩니다. 황색 언론이 독자들의 저속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기사로 한 개인의 명예와 인생을 얼마나 처절하게 파괴해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책은 50년 전 독일 소설인데요. 오늘날 우리는 한국의 언론에서도 반복해서 재생산되는 개인에 대한 언론의 폭력성과 대중의 마녀사냥식 가짜 뉴스를 수없이 접하게 됩니다. 가짜 뉴스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가십거리로 씹어대는 대중 누구도 그들의 피해를 보상해 주지 않습니다. 피해는 오로지 그들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카타리나에 대한 악의적 보도 이후 그녀에게 쏟아지던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눈에 보이는 끔찍한 폭력'으로. 즉, 기레기 퇴트게스의 살인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무서워요. 누군가 악의적으로 나를 헐뜯고 그게 사실인 것처럼 내 친구들에게 소문을 낸다면…." 아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어제 점심에 식당에 갔는데, 식사하고 나가시는 어떤 중년의 여성분이 '혹시, 차 약사님 아니세요?' 이러는 거예요."

"이든 오빠, 방금 약사라고 신입회원 앞에서 본인 어필함." 홍주가 아영을 쳐다보며 이든을 놀렸다. 아영은 영문도 모른 채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야. 홍주야. 얘길 끝까지 들어봐. 그분이 차약국에 약사가 바뀌었다고 주위에 소문이 다 났다. 그래서 본인도 안 간 지 꽤 됐다고 말하더라고." 그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래서 자기는 뭐라고 말했는데?" 차약국 약사가 바뀌었다는 소문이 만복동 마당발인 소미 여사님의 흥미를 돋웠다.

"근데, 저는 그 자리서 계속 약국하고 있는데요. 그랬죠."

"오빠, 이렇게 말하지 그랬어. '소문 좀 내주세요. 차 약국 약사는 바뀌지 않고 원래 하던 분이 계속하고 계세요.' 이렇게 말이야." 홍주는 이럴 땐 보통 그 소문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한번 의심해 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바뀌지 않으셨다니 조만간 다시 약국에 방문할게요. 약사님.'

'정말, 그분이 소문을 내고 다니셨을까?' 이든은 그분이 그랬을 리는 없다고 믿고 싶었다.


독서 모임 회원들은 그런 소문이 났다는 건 누군가 악의적으로 소문을 냈을 거라고.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라도 가느냐고 차약국을 걱정해 주었다.

"최근에 인근에 새로 개업한 약국은 없어? 분명 차약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라이벌 약국 짓이 틀림없어." 지혜 누나가 탐정 셜록 홈스의 목소릴 흉내 냈다. 공교롭게도 차약국과 한 블록 거리에 휴대전화 가게가 나가면서 새로 약국이 들어오긴 했다.


그는 멀쩡하게 일하고 있는데도 약사가 바뀌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을지 생각하니 간단히 웃어넘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운이 빠질 일이었다. 이러면 차약국도 카타리나 블룸처럼 명예를 잃어버린 건가.

'요새 약국 손님이 반토막 났던 이유가 이거였다니.'

약국이라는 동종업계에서 서로 협력해서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누군가를 헐뜯고 밟고 올라가 본인만 잘되면 된다는 세상인심의 민낯을 보게 된 거 같아 씁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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