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미 여사는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소설 《나를 보내지 마》, 홍주는 오정희 작가의 단편 소설집 《중국인 거리》를 소개했고, 요즘 스티븐 킹 공포물에 빠진 지혜 누나는 스티븐 킹 단편집 《옥수수 밭의 아이들 외》을 들고 와 스티븐 킹 애독자임을 과시했다.
신입회원인 아영의 앞에는 조지 오웰의《1984》가 놓여 있었다.
“제가 오늘 발표할 책은 《1984》입니다. 조지 오웰이 1848년에 무려 1984년의 미래를 상상하며 쓴 소설입니다. 다들 읽어보셨겠지만."
아영이 다들 읽어보셨겠지만 이라 말할 때 이든은 좀 뜨끔했다. 책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도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기억나는 건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것밖에 없는데...'
"《1984》를 어학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완전히 자유를 잃은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의 상징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ChatGPT에'조지 오웰의《1984》를 짧게 요약해 줘.'라고 질문해 봤습니다. "
소미 여사는 "역시 MZ세대는 책 읽는 방법도 우리랑 다르네."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제가 답변 내용을 읽어볼게요. '조지 오웰의 《1984》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상마저 철저히 통제하는 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당(Party)의 통제를 받는 오세니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진리부(Telescreen)와 사상경찰에 의해 철저히 감시받고 있습니다. 그는 당의 권력에 의문을 품고, 금지된 사랑과 반체제 활동을 시작하지만 결국 당의 치명적인 감시와 고문에 의해 무너지고, 결국 당에 복종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전체주의, 감시 사회, 개인의 자유 상실 등을 주제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중요성을 경고합니다.'라고 요약해 줬습니다."
그는 작가들이 디스토피아 소설을 출간하는 이유가 뭘까 상상해 봤다. 현대 사회가 가진 부정적인 면을 암울한 미래로 극단화해 그려낸 디스토피아.
'문명이 고도로 발달할수록 겉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국가와 사회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고 침해받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일 거야. 작가들은 그런 힘과 권력을 지닌 빅 브라더의 출현을 디스토피아 소설을 통해 미리 경고하고 싶은 거겠지.'
"《1984》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예브게니 자미아틴의 《우리들》과 함께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이래요.” 여사님이 아영의 말에 덧붙여 부연 설명을 해줬다. 그녀는 80년대 삼중당에서 발행한 사, 오백 원짜리 문고판부터 읽기 시작해서 요즘은 텀블벅 클라우딩 펀딩으로 출판하는 책을 후원해서 받아보는 게 삶의 낙인 분이셨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세상에, 1948년도 아니고 1848년에 빅브라더의 출현과 위험성을 예견하다니, 조지 오웰은 정말 천재였네요.”
이든도 아영 앞에서 한 마디 정도는 알은체하고 싶었다.
“정말 그렇네요. 고전은 그 시대 상황에 국한해 읽는 게 아닌 거 같아요. 오히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현시대에 참고하고 돌아봐야 할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블로그 오마하에 매주 책 독후감 올리고 있는 수연씨다운 통찰이 담긴 대답이었다.
"비하인드 스토리로 영국 이튼칼리지 프랑스어 교사였던 헉슬리는 제국주의자를 양성하는 이튼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학생들에게 경멸당했어요. 그때 이튼칼리지의 학생이었던 조지 오웰은 헉슬리를 좋은 자질을 갖춘 교사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천재는 또 다른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죠. 제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라며 아영은 책 소개를 마쳤다.
또래에 비해 차분하고 조리 있는 말솜씨였다. 이든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퇴근길에 아영과 만나 시원한 맥주를 마신 다음, San E, 레이나의 '한여름밤의 꿀' 노래를 들으며 나란히 걷는 상상을 해봤다.
'간지러운 바람 웃고 있는 우리 밤하늘의 별 취한 듯한 너 시원한 beer cheers 바랄 게 뭐 더 있어 한여름 밤의 꿀' 노래가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그녀와는 책 이야기라도 좋고 영화나 연극, 뮤지컬 얘기도 대환영일 텐데.
아영의 오마하 첫 데뷔무대는 성공적이었다. 회원들의 박수 소리가 그걸 보여주고 있었다.
아영이 휴대전화 화면을 켜는 사이 이든은 발표를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밤 8시 40분이었다. 책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기엔 조금 빠듯해 보였다. 신입회원이 늦게 도착한 데다 발표자가 한 명이 더 늘어서였다. 하지만, 여태 9시 정각에 맞춰서 모임이 끝난 적은 없었다. 시시콜콜한 사는 얘길 나누거나 이야기가 샛길로 세다 보면 9시 30분을 훌쩍 넘겨야 모두 집에 갈 채비를 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2017년 제8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임 현 작가의 《고두(叩頭)》라는 단편소설입니다. "
홍주가 손을 들었다.
"오빠 질문이요. 고두가 무슨 뜻이래요?" 발표 시간이 빠듯했지만, 홍주의 질문은 모두 궁금해할 만한 내용이었다.
"네, 홍주가 좋은 질문을 해줬네요. 고두(叩頭)라는 제목의 뜻을 이해하고 나면 작품을 이해하기 편하겠어요. "
"고두라고 하니까. 베트남 쌀국수에 넣어 먹는 고수가 생각나네." 지혜 누나는 입맛을 다셨다.
누나는 고수 킬러였다. 이든은 고수라는 말에 역한 곰팡내를 맡는 기분이 들었다.
"참, 고수 못 먹는다고 했지. 미안. 나는 상쾌한 냄새가 나서 좋아하거든. 또 삼천포로 빠졌네."
그는 지혜 누나가 꺼낸 고수 향이 고두의 주인공에게서도 나지 않을까 얘기하려다 그만두었다.
"고두(叩頭)에서 고 자(字)는 두드릴 고. 그래서 소설에서 고두의 의미는 '머리를 숙여 땅바닥에 대고 찧는다'입니다. 자기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는 말인 거죠. 잠깐, 소설 속 문장을 읽어 드릴게요.
'무슨 잘못을 진짜 하긴 했는지, 그걸로 미안한 감정을 가졌는지의 여부는 아무 상관없단다. 핵심은 그런 말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 뿐이거든. 나는 그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식적이라고? 진정성이라든가 진심 같은 말을 나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걸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니? 진짜는 머리를 조아리는 각도, 무릎을 꿇는 자세에서 오는 것들 아니겠니?' 이제, 고두라는 단어가 좀 이해가 되죠."
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의 줄거리는요. 어느 공립 여자고등학교 윤리 교과를 맡은 주인공이 그 학교 연주라는 여학생을 임신시키곤 그녀를 책임지지 않고 외면합니다. 시간이 흘러 사립고등학교 교사로 이직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다가 자신이 맡은 반의 전체 1등 학생을 계단에서 밀어버린 불량한 남학생 무리 중 한 학생이 바로 연주의 아들이자 자기 아들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간략하게 들려드렸는데, 나중에 따로 읽어보시면 서로 나눌 이야기가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여고 선생님이 제자를 임신시키고 나 몰라라 하다니. 진짜 말세다.” 소미 여사가 낯빛을 붉혔다. 단톡방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오늘 소개된 책들을 모아 층층이 쌓고 있던 수연 씨도 입을 열었다.
“소설 속 주인공 남자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그것도 윤리 교과 선생님이 그랬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이든은 주인공과 같은 남자라는 사실만으로 주눅이 들었다. 그는 연자를 포함해 청강생 대부분이 여성이었던 첫 글쓰기 강좌에서 한국 남자들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의 말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자리는 한국 남자들을 성토하는 자리였고 그는 화가 났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분위기에 압도당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도매금으로 취급당해서 두고두고 불쾌했다. 그 남성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란 말들은 다음과 같았다.
'하여튼 한국 남자들이란'이라거나
'돈만 밝히는 '사'자 붙은 남자들'
'돈만 밝히는 '사'자 붙은 한국 남자들' 같은 말들에 그는 기분 나빴다.
그래서 지금, 독서 모임 여성 회원들이 혀를 끌끌 차며 비난하는 윤리 교과 남자 선생님의 이야기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다음 모임은 언제가 좋을까요?" 수연 씨가 회원들에게 8월 일정에 관해 물었다.
모두 휴대전화를 꺼내서 날짜를 확인해 보고 있었다.
"8월 26일 월요일이 어때요?" 홍주가 주중에 약속들이 있어서 월요일만 시간이 된다고 말했다.
다른 회원들도 월요일 가능하다고 해서 다음 달 모임은 8월 26일로 확정되었다.
"수연 씨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 달에 봐요." 그가 백팩을 매자, 홍주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오빠, 바로 집으로 갈 거예요?"
"응, 어제 과음해서. 집에 가서 바로 쉬려고."
"모두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수연 씨도 밖으로 나와 회원들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에어컨을 켜놓은 답답한 실내보다는 역시 바람이 있는 실외 공간이 상쾌했다. 상가 주차장에서 바라본 하늘은 청명하다고 해야 하나. 멀리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달 너머로 먹구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아영 씨 혼자 자전거 타고 가는 건 위험할 거 같은데."
"지혜 언니, 친절 쩐다. 나한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홍주가 투덜거렸다.
"송도로 가는 버스는 고속버스터미널에 많으니까, 누가 태워다 주면 좋겠다." 소미 여사가 이든을 쳐다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그녀가 한사코 사양했다.
"괜찮다잖아요. 우리나 태워다 줘요. 오빠." 홍주는 지원사격을 해달라며 소미 여사와 지혜 누나를 바라다봤다.
지혜 누나는 터미널까지 태워주자는 소미 여사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우리가 안 괜찮아서."
“그럼 다 같이 타세요. 아영 씨를 터미널에 내려드리고 순회공연 한번 다녀오죠. 뭐." 이든은 차의 시동을 켰다. 하지만 아직 아무도 자동차에 올라타지 않았다. 소미 여사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모두 데려다주려면 차 약사가 한참 돌아가야 하니까. 오늘은 신입회원도 있고 하니까, 우린 요 앞에 대로변에서 버스 타고 갈게요."
홍주는 조수석에 타려고 소미 여사의 뒤에 서 있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다.
"우린 버스로 가자. 홍주 씨. 지혜 씨랑." 현행범을 붙잡은 형사들처럼 소미여사와 지혜 누나가 양쪽에서 홍주의 팔짱을 꼈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인데..." 홍주는 그가 아영을 차로 데려다주는 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홍주는 두 여형사에 의해 연행되었다. 아영이 조수석 문을 열고 타자마자 휴대전화 앱을 터치해서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걸리는 시간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어젯밤 만취한 자신을 택시에 태워주던 민주의 살가운 모습이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