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 남자의 변명, 그 여자의 사정

by 임용철









이든은 2020년, 서른 살이 돼서야 어머니가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민주는 삼성서울병원에서 전공약사로 근무를 마치고 부모님이 미리 분양받아 놓은 마곡지구 클리닉 건물에 민주약국을 오픈했다. 목이 좋은 민주약국은 페이 약사 2명에 직원 4명으로 종일 바쁘게 돌아갔다. 그녀는 약국을 인수하려고 준비 중인 그에게 함께 약국을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그도 둘이 결혼해서 부부약사로 일한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는 생각에 흐뭇했다.

이든은 서른 살 생일을 며칠 앞둔 5월 7일 화요일에 민주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평창동을 방문했다. 다음 날이 어버이날이기도 해서 백화점에서 한우 소갈비 선물세트를 사들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민주가 어렵게 마련한 점심식사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나가버리셨고 어머니마저 아침 먹은 게 얹혀서 밥생각이 없다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주가 안방으로 들어가 엄마와 다투는 사이 그는 말없이 그녀의 집을 빠져나왔다.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서러웠다.

당황한 민주는 전화와 문자로 그를 설득해 보려 애썼다. 이든은 토라진 아이처럼 자신만의 동굴을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록 그녀에게 다시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말없이 그녀의 집을 나간 이후에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은 나중에 곱씹어 봤을 때도 성숙한 서른 살 남자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부모님과의 식사자리를 마련한 그녀에 대한 미안함. 감정적으로 집을 뛰쳐나온데 대한 후회와 더불어 자신이 민주의 부모에게 그런 대접을 받았다는 자괴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이 흘러 버렸다.


7월 20일 토요일, 이든은 단짝 친구 현수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오랜만에 민주의 소식을 들었다.

"이든아, 민주 약혼한대. 강남에서 성형외과하는 의사라는데." 그와의 연락이 끊긴 후 민주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간 선 자리에서 성형외과 의사를 만났고 이제 약혼날짜가 잡혔다고 했다.

"개네 부모님이 의사사위 노래를 부르더니 소원대로 됐네." 현수 앞에서는 별 일 아닌 척 흘려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가늘게 떨렸다.

"너, 괜찮아?" 그래도 약혼하기 전에 전화 연락이라도 해 봐."

"연락은 무슨. 됐어."

그녀의 약혼 소식에 이든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4년이란 시간 앞에서 놓여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아니 반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말이 맞았다.


7월 24일 수요일 밤이었다. 전주 국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민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 지 4년 만이었다.

"선배, 내일 약속 없으면 저랑 저녁식사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바로 어제 집 앞에서 헤어진 연인처럼 다정하고 활기찼다. 이든은 잠시 동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약혼을 앞둔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생약반 동아리방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던 날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녀의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4년 전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이든은 이제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순수한 사랑을 믿었던 과거의 그는 이니스프리 섬으로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행 우주로 가는 통로를 찾는 다면 4년 전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민주가 예약한 이탈리안 식당은 시멘트 건물 골조가 그대로 드러난 노출 천장으로 시공돼 있어 층고가 높고 시각적으로도 넓어 보였다. 여름이라 시원한 개방감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위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아늑하기보다는 공조 시설과 전기 설비, 소방배관 등으로 인해 삭막하고 스산해 보였다.


민주가 예약한 자리는 대로변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였다. 이든이 안내받은 자리에 앉은 지 몇 분만에 민주가 입구 쪽에서 걸어 들어왔다. 저녁 7시 약속이었지만 둘 다 20분가량 빨리 약속장소에 도착한 셈이었다. 민주는 파스텔 색상의 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 흰색 니트 라탄 그물 숄더백을 메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민주야."

"선배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그녀는 숄더백에서 을 와인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다리를 꼬고 앉아 오른발에 걸려 있는 버건디 색 샌들을 리드미컬하게 까딱거렸다.

"나 없이도 잘 지냈나 봐요. 4년 전 모습 그대로야."

"잘 지내진 못했어. 너는 더 예뻐졌네."

“약국일에 치여서 폭삭 늙었어요." 그녀는 와인을 가르치며 말했다. "여기 와인 콜키지 프리거든요. 우리 오늘 둘 다 마시고 죽는 거예요.”

이탈리아산 스키아바 와인 두 병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나 차 가지고 왔어. 민주야.”

“빼는 것도 여전하시고. 대리 부르면 되죠. 아니면 제 오피스텔이 여기서 가까우니까, 게스트 하우스다 생각하고 편하게 자고 가요.”

그녀의 드립을 이든은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민주는 식당 직원을 불러 얼음 통과 와인잔을 부탁했다.

“말이 그렇다고요. 나 지금 엄청 배고파요. 종일 바빴거든요."

"그럼 음식부터 얼른 주문하자."


민주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자를 때마다 접시에 핏물이 새어 나왔다. 그는 속이 메스꺼워져서 얼른 와인잔을 집어 들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레드와인을 마시며 웃을 때마다 앞니에 붙어 있는 립스틱 자국이 눈에 거슬렸다.

“선배,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온 날. 왜 말없이 그냥 가버렸어요? 엄마, 아빠 때문에 화났던 거예요?”

“그런 상황이 너무 싫었어.”

"이해는 돼요. 아마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그래도 말없이 가버려서 서운했어요."

그는 갑오징어를 포크로 찍어 그 위에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그 와중에 갑오징어의 통통하고 쫄깃한 식감이 적당히 잘 삶아진 파스타 면발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저는 선배가 우리 부모님을 설득시켜 주길 기대했어요. 지금은 형편이 좋지 않지만, 믿어주시면 앞으로 민주와 멋지게 잘 살아낼 자신이 있다고...”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말해보려 했지만, 연거푸 마신 와인 탓인지 달큼해진 입술만 달싹거렸다.


민주는 두 번째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열고는 비어 있는 이든의 와인잔을 채우며 물었다.

“선배, 요즘에도 단편 소설 써요?”

“작년까지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나서는 접었지. 어차피 깜냥도 안 되는 걸 뭐.”

"그래도 선배 학보사에 실은 단편 소설 나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래? 신춘문예 최종심사까지 몇 번 올라가긴 했지. 근데 거기서 더 나아가진 못했어."

그는 클리세 같은 심사평에 신물이 났다. 애정 어린 충고나 조언 따윈 없었다.

'소재는 흥미로우나 서사의 긴밀성, 구체성이 부족했다.'거나

'주제가 모호하고 인물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동기 설정이 너무 극적이어서 억지스러웠다.'라는 심사평이 주였다.

"만화가가 꿈인 사촌 오빠가 미국에서 쿠버트 스쿨에 다녔거든요. 설립자인 조 쿠버트와 면담신청을 했대요. 재능이 없어서 그만두려고요. 조 할아버지가 만화를 사랑하냐고 묻더래요. 그래서 재능은 없지만 만화는 사랑한다고 했더니... 그럼 너는 만화가로 재능이 있는 거라고 하더래요.

'내가 지불하는 수업료가 아까워 어리숙한 동양인 청년을 사탕발림으로 꼬드기는 말이구나.'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 곱씹어보니 그 말 때문에 그래도 쿠버트 스쿨에서 버텨낸 거 같다고 웃으며 말하더라고요."

이든도 삽화가와 만화가를 교육시키는 쿠버트 스쿨 설립자인 조 쿠버트에 관한 일화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사랑과 열정만으로 타고난 재능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식당 안에는 정말 인간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인지 싶을 정도로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높은 데시벨의 소음은 뱀처럼 온몸을 휘감더니 온몸의 구멍으로 순식간에 죄다 밀려 들어왔다. 빛의 부재가 몰고 온 어둠의 안락함은 사라지고 테이블 위에는, 모세가 파라오에게 예언했던 두 번째 재앙, 개구리 떼가 올라와 콧구멍과 입을 막아 폐를 부풀리며 경쟁적으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이든은 주먹 쥔 두 손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버티다가 '쾅'하고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제발, 좀 시끄러운 주둥아리 닥치고 얌전히 식사하면 안 되겠니?' 불쾌함을 감추지 않는 남자들과 놀라서 겁을 먹은 여성들 표정 사이로 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냐, 아무것도.”

민주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이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가 최근에 모임에서 들은 얘긴데, 소설 쓸 때 소재로 한번 써 볼래요.”

“무슨 얘긴데?”

소설이란 말에 그가 관심을 보이자 그녀는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태양을 태양이라 부르는 이유는 지구와 가까이 있는 별이기 때문이래요. 태양이 지구와 멀리 떨어진다면 더 이상 태양이라 부르지 않고 별이라고 불러야 한대요. 어때요? 되게 근사한 말이죠.”

“그러니까 지구 곁에 있어야 태양도 그 존재가치가 인정되는 거네.”

"그렇죠. 바로 우리처럼요. 주위에서는 우리가 왜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서로를 밀어내고 있는지 궁금해하거든요." 와인을 마시던 그는 그녀의 눈동자너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우리', '결혼', '밀어내다'라는 단어가 부메랑이 되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이든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가녀린 목선과 진주 귀걸이를 한 귓불에 쏠려 있었다.

"현수가 해준 얘긴데..."

"광명에서 약국 오픈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선배가 뭐라고 했는데요?"

"우리가 사는 태양계는 우리 은하계의 가장자리에 있는데, 은하계 안에는 태양계를 비롯하여 1,000개의 항성, 성단 및 성간물질로 이루어져 있대. 그러니까 은하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단위의 하나인데, 은하계는 우주의 수많은 은하 중에 하나일 뿐인 거지."

민주도 뭔가 할 말이 생각났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외계인들이 빛의 속도로 이동해 지구를 침공하고 싶어도 항성 간 여행에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해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현수가 들려준 우주망원경에 대한 얘기도 그녀에게 들려줬다.

"허블 우주망원경이 관측할 수 있는 것보다 100분의 1 정도로 어두운 천체까지 관측할 수 있는 게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래. 이 우주망원경의 핵심 목표 중에 하나가 빅뱅 이후 우주에 나타난 최초의 별과 은하에서 오는 빛을 탐색하는 건데, 지구에서 46억 광년 떨어진 은하단의 사진을 보면 이 빛 가운데 일부는 131억 년 초기 우주가 시작되었을 때 만들어진 빛으로 추정된다고 해. 그래서 빛이 오는 동안에도 수많은 행성이 소멸을 하게 된대. 전체 망원경으로 찍은 광대한 우주를 들여다보면 지구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먼지 같이 작은 존재인지 몰라."


그도 요즘 현수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사람은 빈 손으로 왔다가 어느 날 빈손으로 가는 보잘것없는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말이다. 욕망은 붙들려고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아서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펴보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었다. 반면에, 손바닥을 펴면 그 안에 하늘이 담긴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민주는 이든의 말을 듣는 동안 이따금씩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 거렸다. 다이아몬드 표면의 테이블과 커팅된 크라운 부위로 들어간 천장 조명 빛이 아랫부분의 큘렛에 도달할 때까지 내부에서 전반사를 일으키며 반짝거렸다. 무지개 빛깔의 아우라를 뽐내며 그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는 와인잔을 천천히 흔들어 와인향을 음미한 뒤에 잔을 비웠다.

“나 자주 가는 바에 가서 술 한잔 더해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그래? 그럼 가볍게 한 잔 더.” 그는 정신을 차려보려고 눈을 크게 떠봤지만 몸까지 비틀거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저 정도 크기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세팅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 속없이 쓰잘머리 없는 질문을 그녀에게 던져보고 싶었다.

그녀는 숄더백을 메고 계산대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하이힐 소리 때문에 그녀의 뒤태는 더 섹시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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