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종합버스터미널로 가기 위해서는 상가 주차장을 나와 우회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든은 신입회원인 그녀를 터미널에 내려주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가긴 싫었다. 그녀만 괜찮다면 조금 더 차 안에서 같이 얘길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람 안에 삼라만상의 우주가 깃들여 있다고 그는 믿었다.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조심스럽고 때로는 범죄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자신과 동일한 생명체가 은하계 가장자리에 위치한 지구 행성에 81억 6,197만 명이나 산다고 생각할 때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가 세상 그 어떤 소설보다 재미있다는 사실을, 인터뷰를 직접 해보며 깨달았다. 그래서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나 존 윌리암스가 쓴 <스토너> 같은 작품을 사랑했다. 읽고 나면 그 감동이 몇 달에 걸쳐 지속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영의 입장에서도 혼잡한 터미널에서 다시 송도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 타려면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검색해 보니 터미널에서 송도 1동 행정복지센터까지 가는 303번 좌석버스가 있었다. 그녀는 네이버 길찾기를 통해 터미널에서 송도로 가는 버스 시간을 조회해 보고 있었다.
차 안에는 향수와 화장품 향이 섞여 좋은 냄새가 났다. 두 팔을 벌려 꼬옥 안아줄 것만 같은 향기. 힘든 하루를 보상하고 위로해 주는 향이었다. 그의 차 안에는 방향제가 없지만, 이런 냄새라면 조향사에게 특별히 의뢰해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졌다. 그는 차량용 방향제나 캔들 세트를 선물 받으면 약국 직원이나 친구들에게 다시 선물로 주곤 했다. 밀폐된 차 안에 방향제를 걸어두거나 오피스텔 안에 향초를 피우는 걸 원치 않아서였다.
“아영 씨만 괜찮다면 제가 송도까지 태워 드릴게요. 터미널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잖아요.”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모임이 9시엔 끝날 줄 알고 소개팅 약속을 잡았거든요."
“선약이 있으셨군요.” 소개팅이라는 말에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목소리에 실망감이 묻어났다. 처음 만난 여자의 소개팅에 서운하고 실망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연구소 동기가 해주는 소개팅인데요. 같은 부서 선임연구원이래요. 집안도 좋고 엄청 부자라나 뭐라나."
'미니스커트에 크롭티를 차려입고 온 이유가 있었구나.' 그의 뺨은 스커트 아래로 매끈하게 뻗은 그녀의 다리와 크롭티 아래 감춰진 볼륨 있는 가슴을 떠올리고는 발그레해졌다.
“송도 어디로 갈까요?.”
"캠퍼스타운역요.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이든 씨도 그렇고 선생님이란 호칭도 별로라서요."
"오빠요?" 오빠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아무튼 싫진 않았다.
차는 물 흐르듯 상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호구포로에 진입하여 속도를 냈다. 10시 전에 캠퍼스타운역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도로 위로 스멀스멀 밤안개가 피어올랐다. 전방 가시거리가 30m도 되지 않았다. 어젯밤 달무리가 져 있더니 하늘은 금세 비라도 뿌릴 듯 어두컴컴해졌다. 창문을 내리니 공기 중에 비릿한 흙먼지 냄새가 났다.
"안개가 너무 심한데요."
“최대한 빨리 가볼게요."
그는 상남자처럼 자신 있게 말했지만, 사실은 터미널에 그녀를 내려주고 돌아가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다. 그랬다면 지금쯤 집에서 편하게 OTT를 보면서 맥주 한잔하고 있을 텐데. 밤안개 속을 뚫고 송도까지 달려야 하는 지금은 아무래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사고 나면 안 되니까 천천히 가요.” 그녀는 가늘고 흰 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달래듯 두드렸다. 그녀의 손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무더운 여름날이어서라기보다는 젊고 건강함에서 기인한 뜨거운 체온이었다.
'나도 이십 대 때 이랬었던가.' 손바닥의 온도는 언젠가부터 미지근하다 못해 냉랭해졌다. 추운 날씨에 장갑을 끼고 있는 게 방한에 별 도움이 안 될 정도로. 잠자는 숲속의 왕자처럼 공주님이 '짠'하고 나타나 키스라도 해주면 체온이 더 오르려나 상상해 본 적도 있었다. 체온 면역에 대해 알아보니 체온이 1도 떨어지면 대사 능력이 12%, 면역력이 30% 저하된다고 했다. 체온을 조금 올려야 감염에 반응하는 세포 시계가 더욱 빨라져 감염에 대한 면역력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대문 앞에 아무렇게나 포개져 버려진 연탄재까진 아니지만, 그녀처럼 지금 활활 타오르는 연탄이 아니라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어젯밤에 달무리가 보이더니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모양이에요."
그녀도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네, 공기 중에 흙냄새가 나요. 우리 할머니가 흙냄새나면 비가 올 거라고 그러셨는데. "
이든의 휴대전화에서 미뉴에트가 흘러나왔다. 그는 수신된 문자를 확인했다.
'이든아, 잘 지내고 있지. 네가 데려오는 여자라면 무조건 오케이. 엄마는 우리 둘째 아들만 믿는다.'
문자메시지를 보는 순간 그는 숨이 턱 막히면서 짜증이 올라왔다. 혼자 있다면 화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크게 소리라도 질러보겠지만 그럴 수 없어서 그는 운전석 창문을 열고 천천히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약국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 때면 이렇게 조제실로 들어가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길게 호흡하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 상황이 자주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은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약사가 된 게 후회될 때도 있었다.
조제실 내부를 CCTV로 녹화하는데도 며칠 지나 약국에 방문해서는 포장한 알약의 개수가 부족하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르다 못해 약 포장지를 뜯어서 세어보라고 얼굴에 약봉지를 던지는 무례한 손님, 접수대 위에 놓여 있는 낱개로 파는 피로회복제를 무슨 마트 시식코너에서 비엔나소시지를 집어 먹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따서 마시는 얍삽한 사람, 약국에서 추천해 준 영양제를 먹고 멀쩡하던 위를 다 버려놨다고 소리 지르며 방방 뛰다가 접수원 밀치며 삿대질하는 진상 인간 때문에 이든은 그때마다 번아웃이 오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30년 넘게 한 자리에서 약국을 운영하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무례한 손님 얘길 전해 듣고 엄마가 속상해하면 아버지는 약국에 오는 손님이 어떻게 늘 좋은 사람만 오겠느냐고 하셨다.
'이 사람아, 맑은 날이 있으면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눈도 내리고 돌풍이 부는 날도 있지. 오히려 궂은 날씨에 손님들을 더 따뜻하고 친절한 얼굴로 맞이해 주면 그 손님도 자기 형편이 나아졌을 때 우리 약국을 기억하고 좋은 입소문을 내줄 수도 있잖아. 물론 모든 손님이 다 좋을 순 없겠지만. 당신이 하필 딱 그때 약국에 와서는...'
이든이 창문을 내린 채 아무 말이 없자 아영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오빠 안색이 안 좋으세요.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그는 엄마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걸 후회했다. 요즘 엄마와 전화 통화를 피했더니 궁여지책으로 문자를 보낸 거였다. 내년에 엄마의 칠순 잔치에 결혼할 여자를 데려오라는 말을 질리도록 들어서 이제는 '결혼할 여자' 얘기만 들어도 공황장애가 올 지경이 됐다. 아영을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나 아니면 집에서 샤워 후에 천천히 확인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괜스레 버리려고 묶어둔 쓰레기봉투를 열고 어떤 쓰레기였는지 냄새를 확인한 것이다.
"오빠 미혼이죠?"
"네,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이든은 책방지기인 수연 씨에게 사실을 들었겠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냥 제 짐작이에요. 오빠 나이에 결혼했거나 연애 중이시라면 독서 모임에 나올 여유는 없을 거로 생각했죠. 물론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추론이었다. 결혼했다면 육아와 가사를 돕느라 책을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게 당연했다. 목하 열애 중이라면 책보다는 서로의 몸이나 마음을 탐하는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을 테니까.
"저는 남자 회원이 있을 줄 몰랐어요."
"남자가 끼어 있어서 좀 불편하죠."
"아니요. 그 반대예요. 저는 학교도 남녀공학이 좋아요. 어떤 모임이든 남자와 여자가 적당히 섞여 있는 게 낫다고 봐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오마하에서 그의 존재가 다른 여성 회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독서 모임을 할 때면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서 학습된 후천적 성인 젠더(Gender) 코드가 달라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 다른 회원들과 공감하지 못하고 혼자 겉도는 듯한 괴리감. 그녀들과 희로애락의 포인트가 달랐다. 수연 씨가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를 소개했을 때 매 순간 회원들의 입가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년에 드라마로 제작된다네요.'
"빨리 보고 싶다.'
'내 생각엔 이 드라마 여주로는...' 그녀들은 가부장의 '부'를 '녀'로 바꾼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쏟아내며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여성 회원들의 감탄사가 멀리서 메아리가 되어 그에게 들려왔다. 언제쯤이면 그녀들의 말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회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그게 가능은 할는지. 그녀들이 모여 앉아 있는 소파가 놓여 있는 거실로 발걸음을 뗄까 말까, 그는 자신의 방 문턱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