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켜자,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가 흘러나왔다. 나른한 밤공기에 어울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말했습니다. 힘든 고갯마루를 넘을 때 다리가 부러지는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넓은 대로에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리가 부러집니다. 방심과 타성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잘 되어 갈 때, 잘 끝났다 싶을 때 한 번 더 살펴보고 더욱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방심과 타성의 불티 하나가 천년 공든 탑을 불태웁니다. 니체의 《숲으로 가다》에 나온 글귀를 들려드렸습니다. 지금 운전하고 계신다면 목적지까지 안전 운전하시길 바랍니다. 연인과 함께 드라이브 중이시라면 운전하는 그 사람을 위해, 조수석에서 당신을 응원하는 그분을 위해 힘내라고 손을 잡아주세요.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첫 곡은 원슈타인의 "존재만으로" 듣겠습니다.'
그녀는 원슈타인의 "존재만으로"를 따라 부르며 흥얼거렸다.
“오빠, 자기소개할 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든이 본명이에요?” 아영이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서 마시며 물었다.
“응 맞아. ‘착하고 어진’이란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인데. 왜?”
그녀는 물을 마시다 말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대며 웃었다. 그는 그녀의 웃음 포인트가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미안해, 오빠."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너무 웃느라 눈물이 났는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그러다 운전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으로 카메라 프레임 모양을 만들고는 오른쪽 눈을 감고 렌즈가 작동하듯 앞뒤로 움직였다.
"오빠가 톰 크루즈랑 좀 닮은 거 같기도 하고."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톰 형?" 세계적인 톱스타 톰 크루즈를 닮았다는 말에 그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보셨죠. 거기 톰 크루즈가 맡은 배역 이름이 IMF 최고 요원 '이든 헌트'거든요."
이든은 순한글 이름이었지만 얼핏 들으면 외국인 이름 같다는 아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중학교 다닐 때 그의 별명이 이반 이바노프였었다. 이든이란 이름에서 어떻게 이반 이바노프가 연상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위아래 앞니가 툭 튀어나온 입이 싼 병철이 녀석이 떠들고 다니니 학교에 별명이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중학교 내내 반 친구들에게 이반 이바노프로 불렸고 학기 초에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들도 이반에 러시아에서 유학 온 학생이 있느냐고 묻기도 하셨다. 그때마다 교실은 배꼽을 잡고 웃느라 뒤집어졌고, 이든은 앞에 나가 자신의 이름에 관해 설명해야만 했다.
"이든이란 이름은 착하고 어진 뜻을 가진 순한글 이름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아무 소용없었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동급생들은 이반 이바노프가 더 잘 어울린다고 놀려댔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면 스파시바(감사합니다) 라거나 화장실에서 어깨를 부딪치기라도 하면 이즈비니체(미안합니다)라고 놀려댔다.
“연구소는 다닐 만해?”
"신약 개발하는 바이오 메디컬 연구소예요. 신입이라 로딩이 크진 않아요."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앞으로 걸어가면 약사로 미래가 정해져 있는 그의 삶보다 이공계열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취업한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그는 요즘 그녀 또래의 주 관심사가 무언지 궁금해 물었다.
“아무래도 명품과 남자에 대한 관심이 제일 크죠.” 아영은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무심히 대답했다.
“솔직하네. 근데 그렇게 말하면 남자들이 속물이라고 놀리지 않나.” 속물이란 단어는 그녀보다는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속물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는지 얼굴색이 달라졌다. 이든은 불과 만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성에게 속물이라고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이미 그녀는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마음속으로 그녀와 사귀는 가능성을 점쳐본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저는 한국 땅에서 결혼해 애를 키우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해 보여요. 비혼이 요즘 세태에 당연한지도 몰라요.”
그는 결혼해서 애를 키우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하다는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었다. 내년 5월 자신의 칠순 잔치에 며느릿감을 만나겠다는 엄마의 꿈은 덧없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이렇게 작별 인사를 남기면서 어둠 속으로 방금 사라졌다.
“친구 중에 책 읽는 분들이 많아요?”
“MZ 세대라고 책을 안 읽을 거 같죠. 제 주변 친구들은 책벌레들이에요.”
취업하기 힘든 세대라 시간을 쪼개어 자기 계발서를 읽거나 다양한 스펙을 쌓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지도 앱을 확인해 보니 송도 캠퍼스타운역까지 대략 15분을 남겨놓았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량은 남동근린공원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차 안에 조용한 적막을 깨고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후배 민주였다. 옆에 아영이 있어 이든은 민주의 전화를 애써 받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 연속해서 민주에게 전화가 결려왔다.
‘이 시간에 민주가 무슨 일이지?’
"오빠 전화 왔어요. 급한 일인가 본데요."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문자 메시지 함을 열어 도착한 문자가 혹시 있는지 확인했다. 그의 시선이 전방과 휴대전화에 번갈아 머무는 동안 차는 술 취한 사람처럼 좌, 우로 조금씩 비틀거렸다.
“오빠, 운전하면서 휴대전화 보면 안 돼요.”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그는 휴대전화를 센터 콘솔박스에 내려놓고 전방을 주시했다. 왼쪽 반대편 차선에서 쏜살같이 도로를 건너는 흰색 개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랐는지 흰색 개는 멈칫했으나 건너기로 마음먹었는지 다시 재빨리 도로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범퍼에 '쿵'하고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부딪힌 물체는 ‘깨갱’ 거리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몸뚱아리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나가떨어졌다. 이든은 순간적으로 차량의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며 급정거했다. 차는 도로의 움푹 팬 곳에 덜컥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리고 멈춰 섰다. 그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영은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어떻게."
‘사람을 치었나?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좀 전에 도로를 건넌 흰색 개인가.’ 그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조수석 콘솔 박스에서 비상용 손전등을 꺼내 도로에 쓰러져 있는 물체를 향해 비췄다. 차와 충돌한 물체는 흰색 개가 아니었다. 불빛을 비추자 고통스러워하는 잿빛 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난생처음 로드킬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어떻게 이 사고를 수습해야 할지 몰라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아영도 차에서 내려 조수석 차량 문을 붙잡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가 결심한 듯 도로에 널브러져 있는 잿빛 개에게 다가서자 어느새 다가온 흰색 진돗개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붉게 충혈된 눈이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흔들렸다. 적황색의 눈빛에 눌려 그가 놀라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자, 흰색 개는 전장에서 쓰러진 동료를 부축해서 일으키려는 군인처럼 잿빛 개의 몸통을 주둥이를 집어넣고 일으키려 애썼다. 쓰러져 있던 잿빛 들개의 다리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잿빛 개가 신음을 내며 일어났지만, 다리가 부러졌는지 네 다리로 반듯이 서지 못해 오른쪽 뒷다리를 질질 끌었다. 곧이어 흰색 개는 땅바닥에 다리를 질질 끌리며 절룩거리는 잿빛 개를 부축하듯 몸을 밀착해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천천히 사라졌다. 이든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차에 올라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비록 사람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 개를 기르던 주인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활활 타오르던 생명의 불꽃을 꺼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왈칵 몰려들어 와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했다.
"죽었어요?" 아영이 숨죽이듯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죽지는 않았는데 많이 다쳤어."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운전하면서 휴대전화 하면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이든은 숨통을 조여오듯 차 안에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흰색 그랜저 차량의 비상등이 점멸하는 사이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