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은 그날 밤의 사건 이후로 오마하 독서모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서점대표 수연에게는 송도에서 다니기에 너무 먼 거리여서 죄송하다고 연락이 왔다고 했다. 이든은 그녀가 모임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아마도 자신과 관련 있을 거라 짐작했다. 나머지 회원들은 그녀의 부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7, 8월에 기나긴 폭염이 지나가고 이어진 9월의 무더위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에어컨 실외기는 길거리에 후텁지근한 바람을 쏟아내느라 바빴다. 무더위에 점심을 먹어보겠다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연신 덥다는 소리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그들은 목에 두르는 선풍기와 부채를 들고 얼음이 담긴 아이스커피를 주야장천 붙들고 살았다.
2024년 9월 독서모임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월 13일 금요일 밤이었다. 14일 토요일부터 18일 수요일까지 이어지는 긴 추석연휴를 앞두고 모인 독서모임이었다. 가정주부인 소미 여사님은 보험 컨설턴트인 손아래동서가 아버지 팔순기념으로 친정식구들 모두 하와이로 여행가기로해서 시댁에 못 온다고 시부모님에게 미리 허락받았다는 말만 남기고 오지 않기로 했다며 혼자 일할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고 열변을 토했다. 미혼인 지혜누나는 이번 추석에도 결혼을 맡겨놓은 거 마냥 사귀는 사람 있냐로 시작해서 언제 결혼할 거냐로 끝나는 고모들의 잔소리 들을 걱정에 내려가기 싫다고 말했다. 그래도 아직 연휴는 시작되지 않았고 회원들 모두 금요일밤인 오늘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카르페 디엠'이라고 쓰여있었다. 이든은 친구 현수와 일요일에 북한산 산행을 다녀와서 월요일 오후쯤 고향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가 페이 약사일 때는 자주 시간을 맞춰 함께 등산을 다니곤 했는데, 약국을 열고 나서는 주말에 서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산행이 뜸해졌다.
지혜 누나는 여느 때처럼 회원들이 발표한 책들을 접시 위에 음식을 플레이팅 하듯 포개서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오마하 단톡방에 책 사진이 올라오자 다들 사진을 찍는 감각이 탁월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홍주는 긴 추석연휴를 코 앞에 두고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다고 슬슬 회원들에게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만복동 골목에 밤참이란 심야식당의 골뱅이 무침이 끝내준다는 그녀의 꼬임에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결국, 서점문을 닫고 집에 가려던 수연 씨마저 그 기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합세했다. 지혜 누나는 소미 여사님을 태우고 나머지는 이든의 차에 올라탔다. 밤참 식당은 옛날 오마하 독립서점 바로 옆골목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불금 밤 10시에 시작된 만복동 번개모임은 그렇게 날을 넘겨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다들 배가 고팠는지 참 많이도 먹었다. 음... 테이블 위에 골뱅이무침, 두부 부침, 계란말이, 어묵탕 안주가 들락거렸다. 말을 많이 하면 배가 굶주려 고달프다. 그건 약국에서 일할 때도 그렇고 독서모임에서 책얘기를 하다 수시로 옆길로 새며 수다를 떨어도 마찬가지였다.
약국을 개국하고 나서 특별히 만나 술 한잔 할 사람도 없던 터라 이든은 오랜만에 맛보는 해방감에 맥주를 들이켰다. 평소라면 한 잔을 가지고 모임 끝났을 때까지 버텼을 것을 오늘은 벌써 네 잔 째 비우고 있었다. 별일이었다. 그의 주량은 동네 친구들이 잘 안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맥주 한 잔을 마시고 토했으니까. 그는 술을 권유하는 선배들에게 맥주 한 잔이 본인 주량이라고 설레발을 치곤 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셨던 기억은 약학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참석한 고등학교 향우회 모임에서였다. 얼핏 세어봐도 20명 가까이 되는 선배들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선배가 자신의 이름과 기수를 말하면 그도 자신의 이름과 기수를 대고 따라준 소주 한 잔을 그 자리에서 원샷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는 선배의 이름이나 기수를 틀릴 때마다 벌주를 마셔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중에 술집에서 나갈 때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서 거리를 비틀비틀 걸었다. 아스팔트가 일어서서 얼굴을 후려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여관에 들어와 잠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밤이었다. 그는 다음 일곱 번의 생에 동안 마셔야 할 소주를 그날 다 마셔버렸다.
새벽 2시가 되었지만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소미 여사님이 연신 하품을 해댔다. 그도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터라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잠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할거 같아요."
가게밖으로 나오자 심야 식당 뒤편에 뜰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으니 '인간들아, 그만 떠들어대고 얼른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구시렁대는 듯했다. 지혜 누나는 이런 날 남자친구가 차를 딱 대놓고 태우러 오면 얼마나 좋겠냐고 홍주를 붙들고 노래를 불러댔다. 그리고 와서 이렇게 말하는 거지.
"술 마시느라 자기 피곤했지. 어머, 이 혹사당한 피부 좀 봐."
누나가 셀프 위로를 한답시고 자기 머리를 쓰다듬더니 양손을 교차하여 자신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도 외로운데. 딸꾹. 안 되겠다. 이든아, 너라도 한번 안아줄래?"
"누나, 원래 인간은 날 때부터 외로움이란 디폴트 값이 주어진 채로 태어난대요."
소미여사님이 지혜 누나를 향해 십자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자매님, 부디 행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세요. 그럼 세상만사 마음이 편안해진답니다."
소미여사의 말을 들은 수연과 홍주가 배꼽을 잡고 까르르 웃었다. 지혜누나가 이든이 안아줄 때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술주정을 부렸다. 안 그러면 날밤을 꼴딱 셀 테니 다들 얼른 한 번 안아주고 집에 가자고 거들었다.
"자아, 모태솔로의 기라도 받아 가세요 누님." 하면서 그가 누나를 안아주었다. 그에게 안겨있던 누나가 놀라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다들 지혜 누나가 웃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녀는 이든의 사타구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가운데 굉장히 화가 나있는 친구가 살고 있어."
이든도 지혜 누나의 직접적인 언급에 민망해 너스레를 떨었다.
"새벽시간이라 졸려서 그래요."
"걔도 졸아?"
"남자들은 모두 생리학적으로 그래요."
지혜 누나는 재미있다는 듯 그를 놀렸다. 수연 씨가 다음 독서모임 날짜를 꺼내면서 화가 난 친구 얘기를 일단락되었다.
"모두 추석연휴 잘 쉬고, 아니 여기 일하셔야 하는 분도."
수연이 소미 여사의 어깨를 감싸며 추석인사를 했다.
"연휴 잘 보내시고 다음 달 모임에서 봬요."
"네'
서로들 덕담을 나누며 뿔뿔이 헤어졌다. 긴 추석연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잠결에 오한이 들어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몸은 자동으로 움츠러들었다. 분명 난방을 틀었는대도 몸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토요일 점심, 온몸이 밤새 멍석말이라도 당한 것처럼 쑤시면서 어질어질하고 열이 올랐다. 해열제라도 먹어야 했기에 엄마가 보내준 누룽지를 조금 끊여 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속이 메슥거려 와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화장실 변기에 앉았다. 변기 위에서 떠오른 생각은 이렇게 혼자 있다가 쓰러져서 뭔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찾아왔다. 지금이라도 119에 연락해서 응급실을 찾아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술 먹고 몸살난 게 무슨 큰일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낼 일인가 싶었다. 얼른 옷을 주워 입은 후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에 가고 싶어졌다.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은 현수가 일전에 새벽까지 술 마시다가 결국 술병이 나서 응급실에 찾아가서 링거 맞고 죽다 살아났다는 경험담을 들어서였다.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픽하고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죽을 것 같은 끔찍한 순간이 엄습했을 때, 갑자기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순식간에 열감이 훅하고 느껴지더니 땀이 흘렀다. 그러고 나니 어지럽고 메슥거리고 느낌이 잦아들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내 몸을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이라면 해열진통제를 먹고 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구급상자를 꺼내 타이레놀 서방정을 한 알 먹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몸을 왼쪽으로 기울여 최대한 웅크리고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이렇게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흘리고 나면 감기가 떨어져 나가곤 했다. 누가 얼큰하고 뜨끈한 김치 콩나물국을 끓여준다면 정말 고맙게 먹겠지만... 배달이고 뭐고 도무지 그럴 정신이 없었다.
다시 깨어나보니 저녁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걸어 봤는데 아직도 두통증상이 남아있고 미열이 느껴졌다. 계란 프라이를 먹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삼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시 누룽지를 끓이고 만복동 시장 반찬가게에서 사 온 시금치 무침을 꺼내 먹었다. 입맛이 없으니 시금치가 아니라 물에 젖은 종이를 씹는 느낌이었다.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는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이 내는 앓는 소리를 듣는 이가 있다면 찾아와 주기를 빌었다.
일요일 아침이 되었다. 잠결에 주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명절을 앞두고 지방에서 엄마가 올라오셨을 리도 없고... 현수 녀석이 집에 와 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오늘 북한산 산성분소 주차장에서 만나 등산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제야 현수와 한 약속이 생각났다. 어젯밤이라도 현수에게 몸이 아파 등산을 못 갈 거 같다는 연락을 했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현수에게 다섯 통의 전화가 와있었다. 현수가 보낸 카톡을 열어 보고 나서야 녀석이 얼마나 연락이 안돼 안절부절못했을지 알 수 있었다.
'이든아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제발 좀 전화 좀 받아.'
그는 주방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불안했다. 좀도둑이라면 얼른 방문을 걸어 잠그고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할 판이었다. 그의 몸안에도 선사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fight or run away' 유전자가 있을 테지만, 지금은 무조건 도망쳐야 할 때였다. 상대가 방안에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하게, 모기가 날갯짓하는데 들이는 힘만으로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는 주방 쪽을 빼꼼히 살폈다. 주방싱크대에 서 있는 사람은 다행히 불한당 같은 남자가 아닌 젊은 여성이었다. 회색 바탕에 흰색 격자 줄무늬가 있는 앞치마를 두르고 돌돌 말아 올린 머리에 옻칠한 나무젓가락을 비녀처럼 비스듬히 꼽고 있었다.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게 아니라 음식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민주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그는 눈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니 반갑고 한편으론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떡진 머리를 하고 이틀째 씻지도 못해서 냄새날 텐데.'
민주가 신입생 때 함께 자전거여행할 때야 씻기 힘든 환경이었으니까 예외로 한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선배,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보네."
"현수랑 통화 좀 할게."
소파에 앉아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번 가자마자 현수가 전화를 받았다.
"하이, 브로(bro) 어찌 된 거야. 여사친이랑 밤새 술이라도 마신 거야?"
"금요일에 독서모임 끝나고 새벽까지 술을 마셨더니 감기몸살이 왔나 봐. 어제는 하루 종일 기절한 듯이 잠만 잤어."
"지난번 나처럼 술병이 단단히 나셨구먼. 그러게 내가 평소에 운동 좀 하라니까."
현수는 그와 연락이 안 되자, 민주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소식을 물었고 민주가 직접 오피스텔에 가보기로 했었던 것이다. 그는 현수에게 북한산 등반은 어렵겠다고 사과했고, 추석연휴를 잘 보내라는 인사와 함께 민주에게도 안부 전해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현수가 안부전해달래. 추석연휴 잘 보내래."
그가 현수와 통화하는 모습을 그녀는 빤히 바라보고 서있었다.
"공동출입문은 어떻게 들어왔어?"
"밑에 경비아저씨에게 307호 사는 약사님이랑 결혼할 사이라고 하니까 들여보내주시던데."
"현관문 비번은 어떻게. 내가 말해준 적이 있었나?"
"내 생일이겠지 하고 눌러봤지. 뭐 좀 챙겨 먹었어?"
"누룽지 좀 끓여 먹었어."
"부실하게 먹었네. 선배, 육개장 끓이고 있는데. 먹을 수 있겠어?"
이든은 육개장이란 말에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치레를 하고 나면 엄마가 몸이 축났다고 끓여주신 육개장을 제일 좋아했다. 정말 아프다가도 뚝배기에 담긴 뜨끈한 육개장에 밥 한 그릇을 말아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나면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너 육개장 끓일 줄 알아?"
"육개장뿐이야? 오빠가 먹고 싶은 음식은 세상 어떤 음식이라도 다 해줄 수 있어. 우리 엄마 음식 솜씨가 엄청 좋으시거든. 그때 우리 집에 오빠 인사드리러 왔을 때..."
그녀도 그때 그가 혼자 식탁에 차려놓은 그 많은 음식을 손도 대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던 게 떠올랐는지 말을 아꼈다. 이든은 욕실로 가서 샤워를 마쳤다. 식탁에 앉으니 육개장 냄새가 식욕을 자극해서 군침이 돌았다.
"근데 내가 육개장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육개장을 다 끓였어?"
"선배, 육개장 좋아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먹을 정도로 좋아한다며. 그리고 병치레하고 나면 엄마가 늘 끓여주셨다고도 말한 적 있어."
실제로 싱크대 수납장에는 엄마가 육개장을 끓여 먹으라고 택배로 부쳐주신 말린 고사리며 토란대 꾸러미가 있었다. "여기 고사리랑 말린 토란대가 있길래. 엄마한테 전화해서 끓이는 법을 여쭤봤지. 소고기 양지랑 대파, 숙주, 느타리버섯, 무 등 몇 가지 사다가 끓여봤어. 처음 끓여본 거라 오빠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다."
이든은 숟가락을 들고 소고기 육개장의 국물을 입안에 흘려보냈다. 고추기름에서 느껴지는 칼칼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의 느타리버섯과 고사리, 토란대의 맛이 차례로 전해졌다. 아침에 엄마가 끓여서 이른 아침 고속버스 편으로 보내준 육개장 같은 맛이었다. 이든이 육개장에 밥을 말아 김치를 곁들여 천천히 먹기 시작했고 그녀도 식탁 맞은편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때? 엄마가 해준 육개장만큼 맛있어?"
"엄마가 해준 것보다 더 맛있어."
이든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의 칭찬 한 마디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가지런한 앞니가 하얗게 드러났다.
"그런데, 토란대랑 고사리는 불리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어떻게 삶은 거야?"
"엄마한테 물어보니까 압력솥에서 삶으면 된대서 그렇게 했어"
이든 자신도 집에서 육개장을 끊여먹어 본 적이 있지만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라 한 번 끓이려면 큰 맘먹고 해야 했다. 또 끓여 놓고 보면 양이 너무 많아서 하는 수 없이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 보관해야만 했다.
"설거지는 그냥 둬. 너 가고 나서 내가 할게."
"날이 더워서 지금 안 하면 냄새나. 얼마 되지도 않는데 뭐.
"명절인데 너도 얼른 집에 가봐야지."
"나 집 나왔어 선배."
집을 나왔다는 민주의 말을 듣고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떠올랐다. 하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진짜 내 편이 될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 나머지는 민주 부모님이 역정을 내고 계시겠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민주를 보고 있으면,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음에도, 그녀의 부모님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던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기에 감내하고 마음에 묻어두고 다시 찾아뵙고 결혼허락을 받아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정말 그렇게라도 그녀의 부모에게 인정받아야만 하나. 의사를 최고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분들에게 아무리 당신들의 딸을 사랑하고 결혼해서 힘을 합쳐 약국도 열심히 해서 보란 듯이 성공해 잘 살아 보이겠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만복동 골목길에 새로 생긴 독립서점 해밀 밖에 놓여있던 접이식 스탠드 블랙 보드에는 흰색 분필로 박 준 작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에 나온 글이 소개돼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보드판을 읽어 내려갔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그녀의 부모님 입에서 나온 말들이 그의 마음에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겼고 아직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는 봉합되지 않고 더 벌어져갔다. 그래서 그의 마음의 상처는 또 다른 만남과 관계를 지연시켰다.
'지금의 이런 내 모습에서 무얼 더 증명해야만 하는 걸까?'
그는 설거지하는 민주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설거지를 마친 민주는 정수기를 틀고 전기주전자에 물을 채워 끓이기 시작했다.
"선배, 차 마실래요? 홍삼진액에 대추차와 생강차를 넣어줄까요?"
"그래주면 고맙지."
그는 감기 기운이 있을 때면 홍삼진액에 마트에서 파는 대추와 생강청을 넣어서 마시곤 했었다.
"나도 한 잔 마실래."
그녀는 두 개의 찻잔을 꺼내 뜨거운 물을 삼분의 이 정도 채워 놓았다. 아마도 찻잔을 데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홍삼차를 건네고 본인은 캐모마일 티백을 꺼내 찻잔에 우려냈다.
"약혼식 날은 잡았어?"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아침에 부모님과 대판 싸웠어."
"아침에 오빠에게 가려는데 아빠가 약혼식 문제를 의논한다고 식탁에 앉아보라고 하시길래, 다녀와서 나중에 듣겠다고 했더니 지금 앉아보라고 하셔서 나는 지금 나가봐야겠다고 했어. 아빠가 너 또 그 약사 만나러 가느냐는 말에 아빠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요. 가족은 그다음이에요라고 말해버렸어."
평소 부모님의 말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던 딸이 아빠에게 대들었으니 민주 부모님은 배신감을 느끼셨을 게 뻔했다. "그랬더니 아빠가 당장 집을 나가라고 하셨어. 가족보다 네가 우선이면 네겐 더 이상 가족이 필요 없겠네. 그래서 짐 싸서 집을 나왔어. 나한테는 지금 오빠가 가장 중요해. 우리 부모님이 원하는 약혼자와 만나는 약속보다도."
소파에 앉아 있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침묵하는 사이 캐모마일 허브향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지금 내가 있을 곳은 우리 부모님 곁이 아니라 선배 옆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내가 선택한 사람과 내가 선택한 인생에 책임지는 인생을 살 거니까. 부모님이 정해준 삶을 살고 싶진 않아요."
"그래도 이렇게 부모님과 다투고 나와버리면..."
그는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당장 자신만 바라보고 사는 엄마와 형의 존재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나도 전문직이니까 오빠인생에 부담되지 않을게. 이 정도면 선배 로또 대박 맞은 건데... 하나도 즐겁지 않은 표정인데요."
이든은 지금 엄마와 형에 대한 걱정으로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그의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리고 탁자에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그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살짝 웃음도 나오는 걸 보니 이제 병세는 완연히 좋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오른팔에 팔짱을 끼며 어깨에 기댔다.
"걱정 마 선배. 나는 선배와 함께라면 매일 좋아하는 과일 사 먹을 돈만 벌어도 행복할 거 같아. 그리고 앞에서는 불같이 화를 내셔도 우리 아빠, 엄마는 딸을 끔찍이 아끼시는 분들이니까 금세 풀어지실 거야."
둘은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서로에게 기댄 채 그녀가 들려주는 보사노바 스타일의 재즈 음악을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사람들은 어색한 침묵이 싫어 음악을 듣는다지만 서로에게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침묵은 오히려 한없는 위로와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오늘 밤에 추석특선영화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tvN에서 방영한댔는데. 오빠 그 영화 봤어?"
그는 친구 현수와 개봉 첫날에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다시 보고 싶어 아직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기댄 채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 육개장을 끓이느라 긴장이 풀리면서 찾아오는 나른한 피로감인 듯 보였다.
"선배 퀘렌시아가 뭔지 알아?"
"퀘렌시아? 처음 듣는 단어인데."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스페인어로 애정, 애착, 귀소 본능, 안신처란 뜻 이래. 선배의 퀘렌시아는 뭐야?"
이든은 생각해 보았다. 그가 마음과 몸이 지쳤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재충전하는 공간이 어디일까 하고. 글쓰기와 책을 읽는 공간과 시간에 놓여 있을 때 그는 마음이 제일 편안했다.
"나의 퀘렌시아는 너와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 이렇게 말하면 정답에 가까운가?"
"정답이 어딨어."
그녀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원래 이 집안에 오랫동안 그와 함께 존재해 왔던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럼 너의 퀘렌시아는 뭐야?"
"음, 그건 비밀인데... 이제 진짜 우리 부모님과 나는 헤어질 결심을 해야만 하는 거 같아."
부모님과 헤어질 결심을 하겠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의 마음도 덩달아 복잡해졌다.
'그녀는 경제력이 없는 시어머니와 아직 미혼인 아주버니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선배는 여태 살아오면서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해졌어?"
이든은 현수를 만나 저녁을 먹던 날, 현수 엄마가 전화로 현수에게 했던 말을 듣고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기도 했고 마음에 눅지 근 해지는 위로가 되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현수 엄마가 전화통화를 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시더래. 현수야, 돈 벌려고 너무 애쓰지 말어. 현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약국을 오픈하느라 받은 대출도 갚아나가야 하고 결혼도 해서 애도 생겼으니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게 이치에 맞는 거잖아. 그런데, 엄마가 그러시더래. 너무 애쓰지 말..."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서러운 마음을 지우려 할수록 감정이 복받쳐서 그녀 앞에서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하려고 소파에서 힘없이 일어서려 했다. 그런 그를 그녀가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