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렇게도 힘들었던 소아정신과 수련이 모두 끝나간다. 타 주(state)로 이사할 예정이라 다행히 프로그램 디렉터에게서 마지막 일주일 임상 업무를 면제받았다. 숨통이 트였다. 휴우.
진료실에서 함께하던 환자들과 하나둘씩 마지막 이별 인사를 나누며, 수련의 끝이 몇 주 전부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후면 수련의 끝을 극적으로 알리는 전임의 졸업식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의 바쁘고 정신없던 수련의 신분의 삶과 이별할 것이다.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은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미래의 행운을 빌어줄 것이다. 후배들은 졸업하는 선배를 보면서 1년 남은 수련 기간에 대한 희망을 볼 것이다.
진료실 컴퓨터로 열심히 환자 인계장을 쓰고 있던 어느 목요일 오후 2시, 예정된 노크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가죽 자켓을 멋지게 소화하는 백발의 정신분석가 팀 듀건 (Tim Dugan) 교수님이다. 그는 전임의 2년차 내내 나에게 상담치료를 가르쳐 주신 지도 전문의 (psychotherapy supervisor)이다. 여느 때와 같이 갈색 종이백 안에 스콘 몇 개와 따뜻한 라떼가 담긴 종이컵 두 잔을 가져오셨다. 수련 과정에서 수많은 지도 전문의를 거쳐갔으나, 코로나 사태 이후 거의 모든 지도 시간은 원격으로 이루어졌다. 듀건 교수님은 그 와중에도 항상 대면 지도를 고수한 유일한 선생님이셨다.
보스턴 근교의 끔찍한 교통체증을 뚫고 직접 병원까지 찾아와 주시는데, 차마 나만 푹신한 등받이가 있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무실 의자를 책상 안으로 밀어 넣고, 교수님이 앉으시는 진료실 한 켠의 작은 의자와 똑같은 의자를 끌어 교수님과 마주 앉았다. 그 순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미국에 처음 건너와 전공의 1년차를 막 시작했던 2018년, 교수님들이 사무실에 들어오면 나는 의자에서 자동으로 기립했다. 한국에서 30년 이상 살면서 체득했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존경의 의미는 오래전에 상실한 자동적인 생존 반사 작용이었다. 교수님 한 분이 동아시아의 유교문화와 군생활 경험의 복합으로 발생한 행동 같다며 흥미로워 하셨다. 기억과 함께 미국에서의 생활 5년간 상대방에게 존경심을 표현하는 방식조차 많이 바뀌어 버린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마주 앉아 매주 1시간의 일대일 지도 시간 (supervision)을 갖는다. 미국 HBO 드라마 ‘In Treatment’ 에서 치료사인 주인공 폴(Paul)이 지도자인 지나(Gina)와 매주 금요일에 갖았던 만남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그 드라마에 나오는 고급진 가구와 부드러운 카펫은 누락된 좁고 투박한 진료실에서의 만남이다. 이 시간에는 보통 내가 일주일 간 정신치료 (소아정신과에서 정신치료는 놀이치료를 포괄하는 개념)를 했던 경과를 발표하고, 그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함께 토의를 한다. 정신치료 환자와는 보통 일주일에 한번 만났기 때문에 매주 갖는 지도 시간은 초보 치료자인 나도 큰 실수 없이 (실수가 있어도 1주일 만에 복구 기회를 갖을 수 있는) 치료를 끌고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듀건 교수님은 나와 환자 사이에 오고 갔던 대화에 더하여 각 순간에 내 안에서 일어난 생각과 감정,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함께 의논하기를 원하셨다. 전임의 2년차에 정신치료를 진행했던 여러 환자 중 특히 한 명은 내 안에 큰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외로움과 분노. 왜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감정을 느끼는 와중에도 내가 치료자로서 치료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교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과거 가족 내에서의 경험, 과거 수련 경험, 이민 경험, 그리고 현재 가족과의 경험 등에 대해 교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교수님은 무비판적으로 내 얘기를 참 잘 들어주셨다. 잘 듣는 법은 책에서 체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교수님은 나에게 온전히 “경청 되어지는” 경험을 직접 경험을 통해 선물해 주셨다. 자신의 이야기가 온전히 경청 되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한 부모는 자녀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책 뒷부분에서 따로 다룰 예정이다). 듀건 교수님의 지도로 나는 1년 동안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상담사이자 남편, 그리고 아버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듀건 교수님과의 마지막 지도 시간이다. 교수님은 내가 환자들과 작별 인사를 잘 했는지를 우선 확인하셨다. 지난 몇 주간 매주 내게 강조하셨던 사항이었다. 내가 1-2년간 매주 만나면서 함께 했던 아이들과 작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 올 텐데, 작별 과정에서 울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냥 울어도 된다는 거였다.
“눈물이 흘러내릴 만큼 환자와의 작별이 슬퍼야 치료가 잘 되었다는 의미지.”
듀건 교수님은 이별 과정에서 치료자의 눈물만큼 환자-치료자 관계의 끈끈함을 잘 나타내 주는 징표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환자의 증상이 좋아져서 치료가 종결되는 것이 아닌, 수련이 끝나서 어쩔 수 없이 치료가 종결되는 것. 이는 환자에겐 큰 충격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경험을 해본 환자는 수련의과의 정신치료 기회를 꺼리기도 한다. 시작부터 이별을 상정한다는 건 치료자에게도 환자에게도 참 괴로운 과정이다. 매주 만나서 자신의 세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한 사람이 떠나가는 것은 과거 일방적인 “버려짐“이나 상실을 경험했했던 환자에게는 특히 더 큰 상흔을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예정된 이별을 함께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함으로써 환자는 자신이 아낌 받았던 사람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진료실 밖 삶에서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를 찾고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오랜기간 정신치료를 했던 어린 환자들과의 이별은 비슷한 시간을 함께했던 성인 환자들과의 이별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독립시키며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나와 진료실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자양분이 되어서 병원 밖에서 이들이 잘 해낼 수 있을까? 나와 함께 있으면서 했던 말들, 품었던 생각들, 느꼈던 감정들 중 어떤 것이 그들 마음에 더 깊이 간직될까? 내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보다 그들이 우리가 함께한 시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 갔었으면 하고 바란다. 때론 진료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별 말없이 과녁에 공을 함께 던지며 시간을 보냈던, 힘들 때 떠오르는 사람으로 남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환자들과 마지막 시간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걸 얘기하니 듀건 교수님은 웃으신다.
“눈물은 맺히는 게 아니라 흘러내릴 정도는 돼야지. 허허. 눈물을 일부러 참는 건 치료자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지. 그 방어가 누구를 위해 좋은 걸까? 과연 그것이 치료적인까? 아님 내 자신에게 드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처하기 위한 치료자를 위한 노력일까?”
그렇게 환자에 대한 1년의 논의를 모두 마쳤다. 교수님은 나에 대한 졸업식 축사를 다 완성했다고 하셨다. 올해 졸업식은 졸업하는 전임의에 대한 축사를 전임의 각각이 지명한 교수님 한분이 읽게 된다고 한다. 지도 전문의 중 내가 개인사를 가장 많이 솔직하게 얘기했던 교수님인 듀건 교수님께 축사를 부탁했다. 과거를 얘기하다 보니 참 속이 후련해지는 눈물도 많이 흘렸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 이주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교수님은 요청을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졸업식 당일에 내가 처음 들으면 오열을 할 수도 있는 축사를 썼기 때문에 꼭 미리 읽어주고 싶었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교수님. 어떤 내용일지 기대와 걱정이 복잡하게 뒤섞인다. 혼란스러운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교수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고칠 테니 알려달라고 하신다.
약 5분가량의 축사였다. 도입부에서는 동아시아 유교 사회 문화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좀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존중되는 서방(West)인 미국으로 건너온 수련의라고 나를 소개하셨다. 그리고 내가 자유를 떠나 걸었던 수년간의 여정의 경험을 기반으로 내면의 감옥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에게 자유를 선물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신치료사라고 언급하셨다. 그러면서 정신치료 수련을 통해 환자뿐 아니라 내가 많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뿌듯했다고 하셨다. 축사는 미국에서 수련을 끝내고 더 큰 자유를 의미하는 서쪽(West)로 떠나는 우리 가족을 축복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축사를 통해 내 인생이 “자유의 확장”을 위한 여정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미리 리허설을 해준 교수님께 감사했다. 미리 듣지 않았다면 졸업식에 입고 간 정장이 눈물 콧물 받이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내가 어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추구했는지는 뒤에서 다룰 기회가 있길 바란다. 서론부터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로 독자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이다.
교수님과의 마지막 일대일 지도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미래 진로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 당분간 대학병원에 몸을 담으면서 정신치료 및 가족치료와 관련된 전공의 및 전임의 교육에 관여하고 싶었다. 전임의 수련 중 환자와 그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배웠던 것들, 정신치료에서 배운 기술들, 컴퓨터 폴더에 정리해 쌓아 놓은 수업 자료들, 그리고 지도 교수님들과 공유했던 순간들을 엮어 책을 쓰고 싶었다.
소아정신과 수련 과정 동안 일반 정신과 전공의 수련 7년 (한국 4년, 미국 3년) 간 배웠던 것보다 훨씬 많은 걸 배웠다. 좋은 정신과 의사이자 치료사가 되는 것뿐 아니라 좋은 가족 구성원이자, 친구, 사회 구성원이 되는 데에 필요한 자양분을 얻었다.
수련을 시작할 때는 아이가 하나였다가 졸업을 할 때에는 둘이 되었다. 아들 둘이 커가는 과정을 보며 소아정신과 수련을 병행할 수 있던 것은 나에겐 축복이었다. 체력적으로는 큰 시험이었지만 말이다. 첫째를 기르면서 소아 발달학을 1독했고, 둘째가 태어나면서 2독을 했다. 아이들을 더해 커지는 우리 가족을 가족 시스템 이론을 통해 바라볼 수 있었다. 정신역동 놀이치료 이론은 집에서 아이들과 놀아줄 때 유용한 참고서가 되었다. 전임의 수련을 통해 육아에서 높은 우선 순위에 놓고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련 후 첫 직장으로 일찍 퇴근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최우선으로 골랐다. 소아정신과 전문의로서 육아, 인간관계, 가족관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데엔 큰 책임이 따른다. 가족 내에서 스스로 그걸 실천해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알고도 안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매우 취약한 지점이다.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육아의 과정은 매우 힘들다고.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이 제시한 충분히 좋은(good enough) 양육자라는 개념이 이를 증명한다. 얼마나 아주 좋은 양육자가 되는 것이 어려우면 적당히 잘해도 충분하다고 쓰게 된 것일까? 아무리 육아와 소아발달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육아는 고된 업무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양육자들에게 이 책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충고형 서적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고된 육아에서 그래도 가슴 뭉클한 기억에 남을 순간을 조금 더 늘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모든 양육자들은 가족을 위해 한결 같이 자신에 세계 (내적 그리고 외적 경험의 총집합으로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육아로 인해 체력이 고갈되고, 취미 생활 및 사회 생활에 제약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화와 짜증이 늘어 아이에게 욱해서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육아서에 나오는 아름답고 수려한 말들은 실전에선 꿈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아이와의 관계는 순간적으로 깨질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그렇게 일시적으로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아이는 태어난 이후 부모, 타인, 그리고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내적 발달 과정을 거치는가? 최신 신생아 연구 결과는 양육자-영유아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놀이 치료 기술 중 일상 생활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심리적 외상 경험이 어떻게 세대를 뛰어넘어 공유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이 책은 한 인간의 탄생, 정신적 발달, 그리고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훑어보려고 한다. 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과거 문헌뿐 아니라 내 개인의 삶 그리고 진료실에서의 치료 경험을 공유하려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듀건 교수님을 포함한 지도 전문의는 모두 실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후 언급하게 되는 환자 케이스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가상으로 작성되었음을 명확히 한다.